아리 애스터의 세계를 따라가다, 제작사로 눈이 향했다
이 글은 A24를 평가하거나 규정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저 영화를 보다가 생긴 호기심을 따라 자료를 찾아보고, 내가 이해한 만큼 정리해본 개인적 기록에 가깝다. 영화의 해석과 취향은 언제나 열려 있고, 이 글 또한 수많은 관점 중 하나로만 가볍게 읽어주면 좋겠다.
《유전》을 극장에서 본 날, 나는 두 시간 내내 의자 손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아리 애스터는 내게 '감정을 견딘다'는 것이 육체적 경험이라는 걸 가르쳐주었다. 《미드소마》의 햇빛은 《유전》의 어둠보다 더 잔혹했고,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불안은 스크린 밖까지 따라왔다.
그런데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가 시작되기 직전, A24 로고가 스크린에 떴다.
단 3초.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그 문자 세 개가, 그날따라 유난히 오래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로고가 '이 영화를 보기 전에 나를 기억해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감독 이름보다 제작사 로고가 먼저 각인된 순간이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에올, aka EEAAO, 2022) 제95회 아카데미 작품상 포함 7관왕 수상작. 멀티버스를 소재로 가족애와 철학적 질문을 결합하여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A24의 대표 흥행작이다.
아리 애스터의 기괴한 세계, EEAAO의 광기 어린 다중우주, 미나리의 서정적인 낯섦—이 서로 다른 작품들 뒤에 같은 이름이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의미 있게 다가왔다. 나는 비로서 질문했다.
"A24는 도대체 어떤 회사이기에, 이렇게 다른 세계들을 같은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A24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첫 번째 요소는 감독에게 전권을 주는 작업 방식이다. 대본 수정 요구, 흥행을 위한 각색, 결말 변경 같은 전통적 개입을 최소화한다. 이 방식은 들뢰즈가 말한 '리좀(rhizome)'의 구조를 닮았다. 할리우드의 전통적 제작 시스템이 스튜디오-프로듀서를 정점으로 하는 수직적 나무 구조라면, A24는 감독들 각자가 자율적 마디가 되어 수평적으로 뻗어나가는 리좀이다.
아리 애스터의 공포는 가족 트라우마의 수직적 침강이고, 조던 필의 공포는 인종과 계급의 수평적 침투다. 사프디 형제의 불안은 도시 하층부의 리얼리즘이며, 로버트 에거스의 불안은 역사적 광기의 재현이다. 모두 같은 뿌리줄기에서 자라나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증식한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역설이 생긴다. A24는 감독들에게 '각자 자유롭게 가라'고 말하지만, 그들이 만든 영화는 모두 'A24스러워진다'. 중심은 명령하지 않지만, 중력처럼 작동한다. 이것이 A24의 교묘함이다. 통제하지 않으면서 통제한다.
이 철학이 허울 좋은 원칙으로 끝나지 않는 이유는 비즈니스 모델 때문이다. 대부분 작품을 1,500만~2,000만 달러 이하의 저예산으로 제작한다. 《문라이트》는 제작비 150만 달러로 6,500만 달러를 벌었고, 《유전》은 제작비 1,000만 달러로 8,300만 달러 수익을 냈다.
위험은 줄고, 실험은 대담해지며, 성공 시 수익률은 폭발한다. 감독에게 자유를 준다 → 대담함이 화제가 된다 → 저예산이라 수익률이 높다 → 그 수익으로 다시 자유를 산다. 이 순환은 작가주의를 비즈니스 모델로 전환시켰다.
미스 반 데어 로에의 "Less is More"는 단순히 장식을 제거하는 최소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구조의 정직성(structural honesty)이다. 건축에서 구조를 감추지 않고 드러낼 때, 공간은 비로소 자신의 본질을 획득한다. 철골 기둥이 노출되고, 유리가 구조와 피부를 겸할 때, 건축은 자신이 '어떻게 서 있는가'를 숨기지 않는다.
미스 반 데어 로에(1886–1969)는 모더니즘 건축을 결정적으로 이끈 인물로, ‘Less is More’라는 미니멀리즘의 철학을 건축으로 구현한 대표적 거장이다. 바우하우스 마지막 교장을 지냈으며, 유리·철강·대리석을 활용한 극단적 미니멀리즘, 구조적 정직성, 보편적 공간(Univeral Space) 개념을 통해 현대 건축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오늘날 모든 현대건축의 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A24는 이 원칙을 영화에 적용한다. 저예산이라는 구조적 제약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감정의 밀도로 전환한다. 《문라이트》는 마이애미 빈민가를 있는 그대로 촬영했다. 《레이디 버드》는 고등학생의 평범한 일상을 거대한 사건 없이 담담하게 따라간다. 《미나리》는 아칸소 시골의 초라한 트레일러 주택에서 대부분 장면을 찍었다.
<미나리>(Minari, 2020) 정이삭 감독, A24 제작. 이민자 가족의 삶과 아메리칸 드림의 허상을 척박한 농장 생활에 투영하여, 역경 속에서도 피어나는 가족 간의 보편적인 사랑과 희망을 그려냈다. 이 작품으로 윤여정 배우는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연기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미스의 건축에서 철골 기둥은 정말로 구조다. 하중을 지탱한다. 그런데 A24 영화의 '저예산'은 정말 구조인가, 아니면 구조처럼 보이도록 연출된 스타일인가? 《미나리》의 트레일러는 가난의 구조를 드러낸다. 하지만 《스프링 브레이커스》의 네온빛은? 《엑스》의 그레인 필터는? 이것들은 저예산의 필연이 아니라 저예산의 미학화다.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복제 기술이 예술의 '아우라'를 파괴한다고 말했다. 유일무이한 존재감, 지금-여기에만 존재하는 현존성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영화야말로 벤야민이 지적한 복제예술의 정점이다.
그런데 A24는 역설적으로 복제시대에 아우라를 재생산한다. A24 로고는 예고편이 아니라 계약서다. 불편함을 감수하겠다는 관객과, 그 불편함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제작사 사이의. 관객은 로고를 보는 순간, 대중적 쾌락이 아니라 밀도 있는 감정과 조우하게 될 것임을 직감한다.
하지만 벤야민의 아우라는 '지금-여기'에만 존재하는 현존성이다. A24가 만드는 건 정말 아우라일까? A24 로고를 보며 느끼는 기대감은 아우라가 아니라 브랜드 각인에 가깝다. 스타벅스 로고를 보면 '커피 맛'을 예상하는 것처럼, A24 로고를 보면 '불편하지만 밀도 있는 감정'을 예상한다. 이건 아우라가 아니라 조건화된 반응이다. A24가 복제시대에 재생산한 것은 아우라가 아니라 아우라의 환영이다.
이들은 대규모 홍보 전략 대신 마케팅 예산의 95%를 온라인과 소셜미디어에 집중한다. 강렬한 포스터와 비주얼, SNS 밈 활용, A24 콜렉션 북과 의류 같은 소장품 형태 확장, 멤버십 AAA24를 통한 커뮤니티 구축으로 취향이 맞는 관객에게 직접 파고든다. 결과적으로 A24는 영화만 만드는 회사가 아니라 "취향을 설계하는 브랜드"가 되었다.
하지만 이 철학은 동시에 위험을 품은 아름다움이다. 2022년 Vulture의 비평가 Nate Jones는 A24가 "자기 패러디의 위기(teetering on the verge of self-parody)"에 있다고 지적했다. 촬영감독 출신 감독 션 프라이스 윌리엄스는 더 신랄하다. "A24는 인디가 아니라 스튜디오입니다. 공장이죠. 그들의 영화는 영화가 아니라 수학 공식입니다."
A24 영화에는 공통된 시각 문법이 있다. 색의 과포화, 광각의 불안, 폭력의 미학화. 《스프링 브레이커스》《미드소마》《엑스》 모두 색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유전》《라이트하우스》《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광각 렌즈가 만드는 왜곡된 공간감. 《미드소마》에서 노인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장면은 공포이면서 동시에 퍼포먼스다.
이 문법은 누가 만들었을까? 감독들인가, 아니면 A24의 프로덕션 디자이너들인가? 아니면 '이런 스타일이 A24에서 통한다'는 암묵적 합의인가? 문제는 이 스타일이 자기복제 단계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펄》은 《엑스》의 복사본이고, 《맥시》는 다시 《펄》의 복사본이다. 티 웨스트의 3부작은 감독 개인의 진화라기보다 A24 호러 문법의 정교한 반복처럼 보인다.
감독은 자유롭게 창작하지만, 그 창작은 이미 A24라는 브랜드 안에서만 의미를 획득한다. 아리 애스터가 만든 공포는 그의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A24의 공포'이기도 하다. 건축가에게 대지를 제공하되, 그 대지 위에는 이미 보이지 않는 구조선이 그어져 있다.
필모그래피보다 한 줄의 로고가 먼저 보이던 그날 이후, A24는 내게 새로운 방식의 영화 관람을 연 스튜디오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A24는 하나의 징후이기도 하다.
A24가 증명한 것은 분명하다. 감독의 세계를 보호하는 제작 방식이 여전히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작가주의가 곧 수익이 될 수 있다는 것, 구조의 정직성이 감정의 밀도를 만든다는 것.
그러나 A24는 동시에 이것을 증명했다. 자유도 설계될 수 있다는 것. 감독에게 전권을 주되, 그 전권이 발휘되는 공간을 미리 설계해둔다. 리좀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정교하게 구획된 정원이다. 아우라를 재생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우라의 부재를 브랜딩한다. 독립영화를 살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독립영화의 정의를 바꿔버린다.
그날 극장에서 본 A24 로고는, 어쩌면 자유의 새로운 형태를 알리는 신호였는지도 모른다. 통제하지 않으면서 통제하는, 구속하지 않으면서 구속하는, 21세기 자본주의가 발명한 가장 세련된 자유의 형태.
로고가 감독보다 먼저 보였던 그 순간, 나는 영화·자본·미학이 교차하는 긴장의 한 장면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 긴장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질문해야 한다. 누구의 자유를 위한 구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