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힌 조종석의 고독과 달리는 자전거의 연대
어느 날 저녁, 퇴근 후 현관문을 열었을 때 거실의 공기는 평온했다. 고2 딸아이는 소파에 앉아 간식을 먹으면 TV를 보고 있었고, 나는 그 익숙한 풍경 뒤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때였다. 아이가 화면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아빠, 10월에 에반게리온 보러 극장 가자."
나는 순간 멈칫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2025년의 고등학생 입에서 나올 단어가 아니었다.
"에반게리온? 너 그걸 어떻게 알아?"
딸은 별일 아니라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요즘 애들이 재밌대. 재개봉한다길래… 아빠랑 같이 보려고."
그 짧은 대화가 내 안의 어떤 스위치를 켰다. 묘한 웃음과 함께, 잊고 있던 90년대의 기억이 밀려왔다. PC통신과 인터넷 게시판이 태동하던 시절, 우리는 밤새워 그 난해한 서사에 매달렸다. 신지, 레이, 인류보완계획. 그리고 '오타쿠'라는 단어가 막 대중의 입에 오르내리던 시절.
안노 히데아키가 설계한 것은 절망의 건축물이었다. 섬세하고 낯선 그 구조물은 단순한 로봇 애니메이션을 넘어, 세기말 청춘의 감정 구조를 송두리째 흔들었다.
시간은 흘러 2016년, 넷플릭스가 한국에 뿌리를 내리던 시점이 찾아왔다. '구독'이라는 개념조차 생경했던 그때, 메인 화면을 장식한 것은 《기묘한 이야기(Stranger Things)》였다.
"기묘한 이야기"라는 제목이 내게 특별하게 다가온 이유가 있다. 1990년부터 일본 후지TV에서 방영된 옴니버스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世にも奇妙な物語》—세상에서 가장 기묘한 이야기.
넷플릭스 작품의 영문 제목 'Stranger Things'는 직역하면 "이상한 것들" 정도지만, 한국 번역진은 이를 일본 시리즈와 동일한 "기묘한 이야기"로 옮겼다. 35년 장수 시리즈의 제목을 가져오면서, 동시에 그 존재를 완전히 덮어버린 셈이다. 번역이 원작을 지우는 기묘한 역전. 그 제목 덕분에 나는 처음 이 작품을 더 깊은 관심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마치 스필버그의 영화 필름을 다시 돌린 듯한 색감, 스티븐 킹의 소설 속 안개 자욱한 마을을 걷는 듯한 기분. 이 작품은 플랫폼의 경계를 넘어 전 세계인이 동시에 열광하는 거대한 문화적 현상이 되었다.
시간은 흘러 2025년, 마지막 시즌, 마지막 이야기를 전하러 온 《기묘한 이야기》와 30년 만에 극장으로 소환된 《에반게리온》이 다시금 우리 앞에 섰다.
세계의 종말을 막아야 하는 아이들의 운명은 닮아 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이 발 딛고 선 공간의 철학과 건축적 형태는 마치 거울의 양면처럼 완벽하게 다르다.
하나의 도시라기보다는 거대한 요새에 가까운 제3신도쿄시. 이곳의 시스템은 도시 전체를 방어 기제로 작동시킨다. 지표면 아래 거대한 지하 공동을 메운 '지오프론트' 안에는 특무기관 네르프(NERV)가 깊게 뿌리내리고 있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건 철저한 위계와 질서다. 어른들의 욕망과 정치적 계산이 만들어낸, 그리고 아이들을 그 시스템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비정하고도 정밀한 무대인 셈이다.
이 시스템 속에서 주인공 신지가 머무는 공간은 '엔트리 플러그(Entry Plug)'라 불리는 좁디좁은 조종석이다. 이곳은 어머니의 양수를 상징하는 37도의 LCL 용액으로 채워져 있다. 신지는 이 액체 속에 잠긴 채, 신경 접속(싱크로)을 통해 거대한 에바와 하나가 된다.
여기서 역설이 발생한다. 철학자 메를로퐁티는 우리 몸이 세계와 만나는 방식을 '살(chair)'이라 불렀다. 손으로 물건을 만질 때, 우리는 '나'와 '사물'이 분리되기 전의 원초적 접촉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엔트리 플러그에서 신지가 경험하는 것은 이런 직접적 접촉이 아니다.
그는 신경망이라는 인터페이스를 통해 세계와 만난다. 에바와의 접속은 극대화되지만, 세계와의 접촉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타인과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된다.
안노 히데아키는 이 공간 구성을 통해 냉소적인 질문을 던진다. "시스템은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속의 개인은 철저히 파괴될 수 있다." 신지의 싸움은 자의가 아닌 타의다. "에바에 타라"는 아버지 겐도의 명령은 거부할 수 없는 구조의 압박이다. 이곳에서 구원은 책임이고, 책임은 곧 고통이다.
엔트리 플러그의 37도 온기는 생명을 보호하는 온도가 아니라, 개인을 용해시키는 온도다. 신지는 그 속에서 어머니를 찾지만, 결국 만나는 것은 시스템의 차가운 명령뿐이다.
반면, 《기묘한 이야기》의 공간은 호킨스라는 작은 마을의 도로와 숲이다. 이곳의 주인공들—마이크, 더스틴, 루카스, 일레븐—은 거대 로봇 대신 자전거를 탄다. 자전거는 에바의 조종석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다.
조종석이 외부와 단절된 '밀실'이라면, 자전거는 바람을 맞으며 친구들과 나란히 달리는 '개방된 공간'이다. 에바는 전력이 공급되어야만 움직이는 수동적 기계지만, 자전거는 아이들이 스스로 페달을 밟아야만 나아가는 주체적 도구다.
철학자 이반 일리치는 자전거를 "인간 규모의 기술(convivial tool)"이라 불렀다. 자전거는 인간의 신체를 확장한다. 대체하지 않고. 더 중요한 것은, 자전거가 만드는 속도다. 아이들이 페달을 밟는 속도는 서로 대화를 나누고 돌아볼 수 있는 속도다. 자전거는 견고한 구조에 대항하는 무기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매개다.
그들은 같은 공기를 마시며 달리고, 같은 리듬으로 땀을 흘린다. 신지가 LCL 용액 속에서 홀로 호흡하는 동안, 호킨스의 아이들은 옆 친구의 거친 숨소리를 듣는다.
이들의 무기는 습기 찬 플래시라이트, 지직거리는 무전기, 그리고 서로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 마음뿐이다. 초능력을 가진 일레븐조차 힘의 원천은 시스템의 명령이 아니라, 친구들을 지키겠다는 사랑과 용기다. 호킨스의 아이들은 거대 조직이나 정부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서로의 손을 잡고 페달을 밟으며 해결해 나간다.
네르프가 '시스템의 논리'로 세계를 방어하려 했다면, 호킨스 아이들은 '사람의 온기'로 세계를 구원한다.
그들이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호킨스의 숲은 따뜻하지 않다. 밤은 춥고, 비는 내리고, 괴물은 어둠 속에 숨어 있다. 하지만 그 추위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의 체온을 나눈다. 연대는 추위를 견디는 방식이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에반게리온이 90년대 TV 앞의 고독한 개인들에게 "너만 외로운 것이 아니다"라고 말을 건넸다면, 넷플릭스 시대의 기묘한 이야기는 전 세계의 시청자들에게 "우리는 연결되어야 한다"고 외친다.
두 작품 모두 "세계의 운명을 누가 짊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지만, 그 끝에 도달한 답은 다르다.
에반게리온은 차갑게 경고한다. "거대한 시스템은 세계와의 완벽한 접속을 약속하지만, 결국 인간을 고립시킨다."
기묘한 이야기는 따뜻하게 위로한다. "인간은 약하지만, 함께 페달을 밟으면 견고한 구조보다 멀리 갈 수 있다."
이 극적인 대비가 주는 여운은 세월이 흘러도 유효하다. 아니, AI와 알고리즘이라는 더 거대하고 정교한 시스템 속에 살고 있는 지금의 우리에게 이 질문은 더욱 묵직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엔트리 플러그 속에서 홀로 기계와 접속할 것인가, 아니면 자전거를 타고 밖으로 나와 타인과 연결될 것인가.
하지만 나는 이제 다른 각도에서 질문을 던진다. 신지를 고립시킨 것은 정말 엔트리 플러그라는 공간 자체였을까? 아니면 그 공간을 설계한 어른들의 의도, 그 안에서 신지에게 말을 걸지 않았던 침묵, 그를 도구로만 취급했던 시스템이었을까?
호킨스의 아이들은 자전거를 타지만, 그들이 연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전거라는 기술 때문이 아니다. 서로를 포기하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기술은 중립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운명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을 누가, 누구와 함께, 어떤 관계 속에서 사용하는가다.
딸아이가 먼저 "에반게리온을 보러 가자"고 했던 그 날, 나는 문득 세대와 플랫폼을 넘어선 어떤 연결감을 느꼈다. 다른 시대를 살았지만, 같은 질문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
"처음부터 봐야 이해가 갈 텐데. TV 시리즈 안 보고 극장판만 보면 너무 어려울 거야."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에반게리온의 철학적이고 복잡한 서사는 맥락 없이 보면 당혹스럽기만 하다.
"그래도 보고 싶어. "
딸은 단호했다.
우리는 10월의 어느 주말, 집 근처 현대아울렛 메가박스에 가기로 약속했다. 평소 아이들과 자주 영화를 보러 가던 익숙한 곳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날이 다가오자, 고2 아이에게는 더 급한 것들이 있었다. 학교 과제, 시험 준비, 그리고 입시라는 견고한 구조가 아이를 조종석 안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아빠, 미안. 다음에 가도 돼?"
결국 우리는 극장에 가지 못했다. 약속은 미뤄졌고, 30주년 기념 상영 기간은 조용히 지나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더 정직한 결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를 구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극적이고 완결되지만, 실제 우리의 삶은 미완의 약속들로 가득하다.
"나중에 넷플릭스로 함께 볼까? TV 시리즈부터 천천히."
"응, 그게 나을 것 같아."
극장의 어둠 속에서 나란히 앉아 같은 스크린을 보는 대신, 우리는 거실 소파에서 리모컨을 나눠 들고 언젠가 에반게리온을 볼 것이다. 딸은 신지의 고독을 이해할까? 아니면 호킨스 아이들처럼 친구들과의 연대를 더 공감할까?
어쩌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 볼 것이라는 사실, 같은 질문을 나눌 것이라는 약속이다. 시스템이 지배하는 세계일지라도, 결국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차가운 기계가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함께 시간을 내어 손을 내밀 수 있는 용기라는 것을.
그 약속은 아직 지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켜지지 않은 약속도 약속이다. 미완의 연대도 연대다. 언젠가 아이의 시간이 조금 느슨해지는 날, 우리는 함께 신지의 조종석 안으로, 그리고 호킨스의 자전거 위로 들어갈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기다릴 것이다. 시스템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도, 관계는 그렇게 천천히 틈새를 만들어가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