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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는 소설, 지어지는 공간, 무너지는 경계

성해나 『혼모노』를 듣고

by Jwook

넷플릭스 왜 보나,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

박정민의 그 한마디가 스쳐 지나간 다음 날, 나는 차 안에서 밀리의 서재 오디오북을 재생했다. 서점가 베스트셀러로 화제인 『혼모노』가 왜 이북이 서비스 안되고 오디오북으로만 제공되는지 의아했지만, 그냥 그렇게 되어 있었다. 나는 이 책과 작가에 대한 아무런 정보 없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밀폐된 차 안은 작은 방이 되었고, 그 안에서 나는 연속적으로 다른 공간들 속으로 이동했다. 카페, 갤러리, 광장, 굿판, 설계실, 회의실, 백화점, 연습실. 듣고 있을수록 이상한 감각이 생겼다. 인물이 움직여 공간이 바뀌는 게 아니라, 공간이 먼저 열리고 인물은 그 안에서 비로소 드러났다.


그제야 알았다. 왜 굳이 오디오북이었는지. 활자로도 좋았겠지만 소리와의 만남은 기대 이상이었다. 운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랄 만큼 귀에 꽂히는 몰입감이라니. 활자가 상상을 자극할 때, 소리는 공간을 진동시키며 마음에 직접 닿는다. 성해나는 바로 그 입체적인 감각으로 소설을 짓고, 그 안에서 인물을 생생하게 숨 쉬게 만들었다.

건축을 공부하며 공간을 읽는 훈련을 해왔다. 동선, 재료, 빛의 방향, 천장 높이 같은 요소들. 성해나의 소설 속 공간들은 단순한 배경 이상의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곳의 공간은 인물들에게 권력으로, 때로는 윤리적 질문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일곱 개의 공간을 통과하며 반복되는 하나의 물음으로 독해하려 한다.

진짜란 무엇인가?

거주의 이상과 감시의 현실 사이 — 〈구의 집〉

하이데거는 건축과 거주를 같은 차원에서 보았다. 건축은 단순하게 집을 짓는 행위가 아니라 '거주하게 만드는 것', 즉 인간이 세계 안에 자리 잡는 방식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러나 〈구의 집〉에서 건축가가 설계하는 공간은 거주가 아니라 고문의 공간이다.

"빛은 보여주되 닿을 수 없게 만들자."


근대 건축이 추구했던 '빛의 숭고함'은 이곳에서 절망을 연장하는 장치가 된다. 르 코르뷔지에가 꿈꾼 햇빛 가득한 방은, 구의 집에서는 희망을 보여주되 절대 손에 닿지 않게 하는 폭력의 공간으로 전환된다. 공간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으며, 설계에는 언제나 의도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성해나는 매우 조용하면서도 정확하게 드러낸다.


푸코가 분석한 감시의 구조—보이지 않는 권력이 사람을 조용히 통제하는 방식—가 여기서 건축 언어로 번역된다. 설계자는 묻는다. 효율적인 고문실은 훌륭한 건축인가? 기능을 완벽히 수행하는 공간은 윤리적으로도 정당한가?


매끈한 표면 아래의 주름 — 〈잉태기〉

〈잉태기〉에 등장하는 백화점, 마사지샵, 공항은 모두 고도로 정제된 공간이다. 소음과 감정은 제거되고, 몸과 동선, 태도는 관리된다. 부드러운 조명과 공손한 대화 속에서 불편함마저 시스템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이 매끄러운 표면 아래에서 인물들은 쇼윈도 앞의 걸음, 마사지 베드 위의 이완, 공항의 대기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통제하며 자신의 위치를 가늠한다. 안락함은 긴장을 없애기보다 감춘다.


들뢰즈가 말한 ‘주름’처럼, 〈잉태기〉의 공간들은 단순해 보이지만 내부는 겹겹이 접혀 있다. 그 매끄러운 표면 아래에서 딸 서진은 어머니의 보호와 할아버지의 판단 사이에 끼어 있다.


모성은 돌봄의 언어로 선택을 관리하고, 할아버지는 개입하지 않는 듯 판단의 자리를 유지한다. 그렇다면 사랑의 이름으로 작동하는 이 통제는 과연 사랑일까?


단절된 두 세계 — 〈스무드〉


고급 아파트 갤러리와 바깥 광장의 시위대. 두 공간은 유리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극명하게 대비된다. 안쪽은 무결해 보이지만, 바깥은 거칠고 시끄럽다.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가란 공동체 안에서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들리는지'를 결정하는 '감각의 분할'이라고 말했다. 권력은 특정 사람들의 목소리를 '언어'로 인정하고, 배제된 사람들의 외침은 단순한 '소음'으로 치부한다.


〈스무드〉의 유리는 이 분할을 건축적으로 시각화한다. 투명한 유리는 바깥을 보여주지만, 소리는 완벽하게 차단한다. 안쪽의 사람들에게 시위대의 절규는 의미 있는 메시지가 아니라, 갤러리의 고요를 방해하는 소음일 뿐이다.


작가는 묻는다. 이 투명하고 매끄러운 유리가 과연 소통의 창인가, 아니면 계급의 감각을 철저히 분리하는 단절의 벽인가?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의 불일치, 그곳에 이 사회의 가장 서늘한 균열이 있다.


관념이 아닌 몸이 말하는 것들 — 〈혼모노〉


메를로-퐁티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추상이 아니라 '몸의 경험'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철학의 언어가 아니라 지각하는 신체가 세계를 먼저 안다는 것이다.


이 말은 〈혼모노〉의 굿판에서 정확히 드러난다. 신이 떠난 무당과 신이 내린 신내기. 누가 진짜인가? 작가는 이 질문을 머리로 풀지 않는다. 대신 작두 위에 선 문수의 발바닥으로 답한다. 피가 흐르고, 날의 차가움이 몸을 관통하는 바로 그 순간.


건축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훌륭한 도면이라도 그 공간을 직접 걸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존재한다. 복도의 폭, 계단의 리듬, 벽의 질감. 몸이 먼저 감각하고, 이성은 나중에 따라온다. 진짜는 관념이 아니라 감각에 있다. 진짜 삶은 언제나 구체(Concrete)에서 먼저 시작된다.


생각하지 않는 것의 폭력 — 〈길티 클럽〉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말했다. 거대한 악은 악마 같은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길티 클럽〉에서 팬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감독을 지키기 위해 도덕을 분리하려 한다. 악의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네 아이에게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면?"


이 질문 앞에서 모든 논리는 붕괴한다. 생각하지 않는 것이 폭력이 되는 순간이다. 공간으로 비유하자면, 이것은 '보이지 않는 문턱'의 문제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수많은 문턱을 넘나들지만, 어떤 문턱은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장벽이 된다. 휠체어 사용자에게 계단은 넘을 수 없는 벽이지만, 비장애인은 그것을 문턱으로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생각하지 않는 것. 그것이 설계의 폭력이고, 관계의 폭력이다.


소통의 부재가 만든 균열 — 〈우호적 감정〉

회의실. 테이블, 의자, 프로젝터. 모두가 지역 재생이라는 선한 가치를 말한다. 그러나 이 공간에서는 아무도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각자의 언어로 각자의 논리를 펼칠 뿐이다.

회의실은 본래 '모임의 공간'이어야 한다. 원탁은 위계를 없애고, 큰 창은 바깥 세계와의 연결을 암시한다. 그러나 〈우호적 감정〉의 회의실은 형식만 갖춘 무대다. 사람들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세계에 산다.

소통의 부재는 곧 균열이 되고, 선한 의도조차 관계를 지탱하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공간을 설계해도, 그 안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만나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몸이 기억한 세계 — 〈메탈〉


〈메탈〉에서 중년이 된 밴드 멤버들의 몸은 청춘의 진동을 기억한다. 귀를 울리던 기타, 땀, 앰프의 떨림.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몸이 기억한 세계다.


연습실이라는 공간은 이중적이다. 좁고 습하고 방음이 되지 않는 그곳은 객관적으로는 열악한 공간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만들어진 소리, 함께 보낸 시간은 어떤 고급 스튜디오도 대체할 수 없는 진짜를 만든다.


혼모노(本物) — 진짜를 향한 욕망의 이중성

작가는 일곱 개의 전혀 다른 공간을 통해 하나의 질문을 반복한다. 진짜란 무엇인가?


신이 없는 무당은 가짜인가? 효율적인 고문실은 훌륭한 건축인가? 모성이라는 이름의 통제는 사랑인가? 공존을 말하지만 단절된 공간은 선한가? 생각하지 않는 우호는 관계인가? 시간이 지나도 남는 것이 진짜인가?

진짜를 향한 욕망 속에는 소유·창조·통제의 욕망이 얽혀 있다. 그 욕망은 때로 순수하지만, 종종 타인을 대상화하는 폭력으로 변한다. 작가는 그 과정을 조용하지만 냉정하게 보여준다.


건축도 그렇다. 우리는 '진짜 공간'을 만들고 싶어 한다. 진정성, 본질, 순수한 공간. 그러나 그 욕망이 지나치면 사람을 배제하는 공간이 된다. 사용자가 아니라 설계자의 이상만 담긴 집. 거주가 아니라 전시를 위한 건축.

진짜는 고정된 본질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계속 질문되어야 한다.

저자가 물러나고 공간이 말하는 순간

롤랑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을 말했다. 작가의 글이 완성되고 발행되면, 독자가 비로소 태어난다고. 작가는 작품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판단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다만 소설 속 공간을 펼쳐놓고, 그 앞에 멈춰 서라고 말한다.


건축학도가 주인공이었던 전작 《우리가 열 번을 나고 죽을 때》에서도 드러나듯, 성해나는 유독 건축에 관심이 많으며, 공간을 치밀하게 축조하는 작가다. 그녀는 스스로 '소설가가 아니었다면 건축가가 되었을 것'이라 말하며, 글을 쓰는 일을 설계와 통풍, 단열을 고민하는 집 짓기에 빗대곤 했다.


그토록 치밀하게 설계된 세계여서일까. 성해나의 소설은 유독 리얼하고, 때로는 마음 한구석을 아리게 찌른다. 누군가는 자본의 논리를, 또 누군가는 관계의 균열을 읽겠지만, 나는 '공간의 구조와 그 안의 관계'를 본다. 소설 속 공간들이 닫힌 배경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단면을 다층적으로 열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시 묻는 것

오디오북이 멈춘 뒤에도 공간들은 내 안에서 계속 움직였다. 건물을 올려다보며 나는 다시 묻게 된다. 우리는 어떤 공간에 살고 있는가? 이 공간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만들어졌는가? 공간이 묻는 윤리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는가?


이 모든 디테일을 가능케 한 것은 작가의 성실한 관찰과 취재였다. 설계실의 팽팽한 긴장과 굿판의 신성함, 갤러리와 광장을 가르는 경계, 백화점과 공항에서 느끼는 정제된 분위기, 회의실의 균열과 연습실의 여운. 작가는 이질적인 공간들을 횡단하며 그 안에 숨겨진 관계를 읽어냈다


작가는 한남 더힐을 답사하고, 백화점 명품관을 관찰하며, 태극기 집회 현장 한가운데 섰다. 영화와 미술, 무속과 건축, 조직과 가족, 그리고 음악. 이 모든 분야를 가로지르며 성해나가 축적한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간이 품은 관계, 그리고 윤리였다.


〈구의 집〉을 비롯해 건축의 현실—실시설계 과정이나 건축주와의 협업이 생략된 지점처럼—다소 과장되거나 압축된 설정들이 눈에 띄기는 한다. 다만 이 단편집이 가로지르는 세계의 범위를 고려하면, 그것은 결함이라기보다 하나의 선택에 가깝다. 다양한 분야를 빠르게 횡단하는 서사 속에서, 공간이 품은 윤리와 관계를 드러내는 데에는 여전히 충분한 설득력을 유지한다.


어쩌면 작가의 관심은 완결된 재현에 있기보다, 그 공간이 우리에게 무엇을 묻게 만드는가에 더 가까운지도 모른다. 작가는 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질문의 각도를 바꿔준다.


세 줄 요약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깊이. 그 깊이에 머무르는 시간이야말로 문학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다시 공간 앞에 서는 윤리적 각성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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