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오브 어스》가 보여준 체험의 철학
영화는 완결된 서사를 제시하지만, 그 감정적 여운은 비교적 쉽게 휘발된다. 그러나 양질의 게임은 종료 후에도 오랫동안 플레이어의 '체험된 기억'으로 잔존한다. 이는 감정을 수동적으로 '관람'하는 것과 능동적으로 '체험'하는 것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 글은 《라스트 오브 어스》 시리즈의 스포일러를 포함합니다.
주말 오후나 연휴가 주어지면, 나는 나만의 동굴로 들어간다. 스팀 할인 기간에 사놓고 플레이하지 못한 게임들을 하나씩 설치하고 플레이하는 시간. 《라스트 오브 어스》도 그렇게 내 라이브러리에 들어왔다.
이 게임은 세균 감염으로 문명이 붕괴된 세계에서 중년 남자 조엘과 10대 소녀 엘리가 생존하는 이야기다. 작품성을 인정받아 HBO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시즌3까지 예정되어 있다.
《라스트 오브 어스》가 보여준 스토리 자체는 《월드 워 Z》, 《워킹 데드》, 《28일 후》 같은 아포칼립스 장르의 익숙한 문법을 따른다. 대부분의 좀비물이 그렇듯, 여기서도 좀비는 하나의 환경일 뿐이다. 진짜 이야기는 아포칼립스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인간들이 다양한 갈등과 대립을 겪는지에 집중된다.
그러나 이 게임이 역사에 남은 이유는 캐릭터 설정과 그 안에 녹인 철학, 그리고 훌륭한 게임성과 그래픽, 음악, 조작 시스템이 완벽하게 결합했기 때문이다.
나는 게임을 조금 늦게 시작했다. 이미 다 할 사람들은 해봤을 때였다. 유튜브 게임 영상도 보고, HBO 드라마 시즌2까지 모두 감상한 뒤였다. 결말도, 반전도, 논란이 된 장면들도 머릿속에 있었다.
그런데도 어느 순간 직접 플레이하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스토리를 알면서도 체험해보고 싶다는 묘한 갈망. 지난 추석 할인 때 게임을 구매했고,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플레이했다. '보는 것'과 '하는 것'이 정말 다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게임을 끝낸 뒤 내 안에 남은 깊은 감정적 혼란으로 명확해졌다.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1》의 초반, 아포칼립스가 갑작스럽게 펼쳐지는 혼란 속에서 조엘은 딸을 잃는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 그는 딸과 비슷한 나이의 엘리를 만나 그녀를 어딘가로 데려다주라는 임무를 맡게 된다. 엘리는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감염되지 않는 면역자였다.
그 만남은 세상을 구하기 위한 여정의 시작이자, 조엘에게는 오래도록 묻어두었던 딸에 대한 그리움, 아픔의 흔적과 다시 마주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그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 혹은 또 다른 비극의 예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순간부터 여정은 이미 시작된다.
들뢰즈는 '강도(intensity)'를 단순한 양적 차이가 아닌, 존재론적으로 다른 질적 경험이라 말했다. 10℃와 20℃의 차이는 숫자상 10도지만, 얼음과 물이라는 완전히 다른 상태를 만든다. 게임의 체험이 그렇다. 같은 스토리라도 '보기'와 '하기'는 단순히 시간의 차이가 아니라, 존재 방식 자체가 다른 경험이다.
드라마에서 조엘이 부상당한 엘리를 업고 눈 덮인 길을 걷는 장면을 봤을 때, 나는 '감동적인 연출'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게임에서 직접 그 길을 걸었을 때, 나는 울컥했다. 같은 스토리인데, 감정의 밀도가 완전히 달랐다.
왜 그럴까? 게임에서 나는 수십 시간을 그들과 함께 보냈다. 어두운 폐건물에서 컨트롤러를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적의 발소리를 듣고, 탄약이 두 발밖에 남지 않았을 때 긴장하며 버튼을 눌렀다. 폐허가 된 도시 앞에서 캐릭터를 멈춰 세우고 풍경을 바라봤다.
드라마에선 스쳐가는 2분짜리 장면이었던 것들이, 게임에선 내가 직접 조작하고, 선택하고, 견뎌내야 할 20분의 긴장이 되었다. 조엘과 엘리가 겨울을 지나는 시간, 나도 실제로 겨울을 지났다. 그 시간은 압축할 수 없고, 건너뛸 수 없고, 오직 견뎌내야만 한다.
특히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조엘이 엘리를 바라보는 시선은 더 이상 게임 속 연출이 아니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절박함은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과 겹쳐졌다. 긴 여정 끝에 도착한 종착지에서, 수술대에 오른 엘리가 죽게 된다는 사실은 조엘에게 다시 한 번 딸의 죽음을 겹쳐 보이게 한다. 이번만큼은 구해야 한다는 판단. 조엘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엘리를 구해낸 뒤, 끝내 그녀에게 진실을 숨긴다.
그 장면에서 나는 그의 선택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불편함을 느꼈다. 윤리는 분명 개입되지만, 그동안 축적된 둘만의 여정과 서사는 그 선택을 쉽게 단죄하지 못하게 만든다. 게임은 이 감정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내 손으로 그 선택을 실행하게 만들고, 그 무게를 온몸으로 감당하게 한다.
메를로-퐁티는 신체를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살아내는 주체로 보았다. 우리는 머리로 세상을 이해하기 전에, 손과 발과 눈으로 먼저 세상을 산다. 게임은 바로 이 '신체적 거주'를 강제한다.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에서 그 질문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게임 초반, 파트1에서 수십 시간을 함께한 조엘이 갑작스럽게 죽는다. 그를 죽인 사람은 시즌1 마지막 조엘에 의해 부모를 잃은 애비라는 여성이다. 플레이어는 조엘의 죽음에 분노한다. 엘리는 복수를 다짐한다.
게임 중반부터 나는 애비가 되어야 했다. 컨트롤러를 쥔 것은 내 손이었지만, 화면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내가 증오하던 캐릭터였다. 애비의 눈으로 보고, 애비의 손으로 싸우며, 그녀에게도 지켜야 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했다.
닐 드럭만은 “플레이어가 눈물이 아니라 선택의 무게로 울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슬픔을 연출하는 대신,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직접 떠안게 함으로써 그 감정의 책임까지 플레이어에게 넘기는 방식이다.
애비를 증오하는 것은 내 머리였고, 그 증오의 대상을 조종하는 것은 내 손이었다. 컨트롤러를 내려놓고 싶었지만, 게임을 끝내기 위해서는 결국 그 버튼을 눌러야 했다.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분노했다. 출시 직후 별점 테러가 이어졌고,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 분노는 단순한 서사 충격이 아니었다. 영화에서 악인의 사연을 보는 것과, 게임에서 그 악인이 되어 행동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기 때문이다.
애비가 조엘을 죽인 이유는 명확하다. 부모를 죽인 자에 대한 복수다. 드라마였다면 이해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은 수십 시간을 함께한 조엘을 잃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지 않았다. 어쩌면 우리는 조엘과 엘리가 끝내 행복하길 바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질문은 하나로 수렴된다. 내가 애비의 버튼을 누를 때, 나는 여전히 나인가, 아니면 잠시 애비가 되는 것인가.
같은 이야기를 유튜브로 보고, 드라마로 보고, 게임으로 했다. 세 가지 경험은 완전히 달랐다. 유튜브는 10분 만에 정보를 줬고, 드라마는 몇 시간에 걸쳐 감동을 줬다. 그러나 게임은 수십 시간 동안 기억을 남겼다.
내 손이 기억하는 선택의 무게를. 내가 직접 걸었던 그 길의 감촉을. 그리고 내가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 되어야 했던 그 혼란을. 이것이 좋은 경험이었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 다만 이런 질문만은 확실하다. 우리는 예술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위안만을 원하는가, 아니면 불편한 질문도 감내할 용기가 있는가?
스토리텔러가 전달할 수 있는 감정의 결은 매체마다 다르다. 영화는 압축된 감동을, 소설은 내밀한 사유를 준다면, 게임은 '내가 그것을 했다'는 체험의 무게를 남긴다. 영화는 감정을 보여주지만, 게임은 감정을 살게 한다.
우리는 늘 새로운 체험을 갈망한다. 단순히 보고 듣는 것을 넘어, 온몸으로 살아내는 경험을.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에 등장하는 VR 헬멧 게임처럼, 언젠가 우리는 더욱 완벽한 몰입 속에서 다른 시대,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게임은 당신의 손에 컨트롤러를 쥐여줄 뿐, 대신 길을 선택해주지는 않는다. 그 길을 걷는 것은 오롯이 플레이어의 몫이다. 손이 기억하는 윤리, 몸에 새겨지는 서사. 그 무게가 때로는 버겁게 느껴질지라도, 우리는 그 체험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질문 앞에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