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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카버

불완전한 삶의 문장을 쓰던 사람

by Jwook

간만에 책장을 정리하다 발견한 책

그동안 사놓은 책들을 정리하다 발견한 책, 레이먼드 카버의 책들. 언젠가 읽어야지 싶어 사두었다가 잊고 있었던 책이다. 다시 꺼내 들고 몇 페이지를 넘기다 보니, 예전에 느꼈던 그 묘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카버의 소설을 읽으면 '어, 이게 뭐지?' 하면서 곰곰히 생각하게 되는 여운을 준다. 문장은 단순한데, 뭔가 찝찝하다. 이야기는 끝났는데, 끝나지 않은 것 같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무언가 중요한 일이 지나간 것 같다. 그 이상한 기분을 설명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건 — 카버의 소설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장이 어려워서가 아니다. 오히려 문장은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다. 중학생도 읽을 수 있을 만큼 평이한 단어들, 짧고 건조한 문장들. 하지만 그 단순함 속에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불안이 계속 따라붙는다. 그의 소설이 어려운 이유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물의 감정도, 사건의 의미도, 관계의 배경도 직접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마치 대화 도중 상대방이 말을 멈췄는데, 그게 끝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순간처럼. 집중하지 않으면 그냥 스쳐 지나가고, 집중하면 묘하게 마음 한구석이 무거워진다.


카버는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 그는 이야기를 완성하지 않고, 독자에게 그 빈칸을 채우라고 던져둔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읽는 게 아니라 함께 완성하는 것에 가깝다. 그 불편함이, 그를 다시 손에 들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레이먼드 카버를 한번쯤 읽어볼 만한 이유가 있다. 그의 소설은 우리가 일상에서 애써 외면하는 감정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만든다. 사랑이라 부르기엔 너무 무겁고, 무관심이라 하기엔 너무 아픈 그 어딘가의 감정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 우리 안에 있는 것들. 카버는 그것을 건드린다. 그래서 읽고 나면, 삶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통해 만난 레이먼드 카버

무라카미 하루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삶의 방식이 나에게 강한 영감을 준다. 그래서 나는 그가 듣는 음악을 찾아 듣고, 그가 본 영화를 찾아보고, 그가 쓴 에세이를 읽는다. 무라카미 소설 속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규칙적인 루틴, 음악적 취향, 고요한 공간에 대한 애착. 그것은 그의 삶의 반영이며, 나 역시 그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의 감수성을 조금이라도 체험해보고 싶어 한다. 레이먼드 카버를 알게 된 것도 그 과정에서였다.


하루키는 자신이 영향을 받은 작가로 이름이 비슷한 두 레이먼드를 자주 언급한다.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 하나는 일상의 균열을 담은 단편 작가, 다른 하나는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대가. 언뜻 보면 전혀 다른 두 작가지만, 하루키는 이들에게서 공통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하는 기술"이었다. 챈들러의 필립 말로가 냉소적인 한마디로 세상의 추함을 드러내듯, 카버의 인물들은 침묵 속에서 삶의 무게를 드러낸다. 하루키는 이 두 작가로부터 여백의 미학을 배웠고, 그것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했다.


미국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 1938–1988) 는 20세기 후반 미국 단편문학의 부활을 이끈 작가로 평가받는다. 하루키는 카버의 작품을 직접 일본어로 번역하며, 그의 문학을 "간결하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이라 평했다. 하루키가 카버에게 끌렸던 이유는, 화려한 사건보다 삶의 틈새에서 느껴지는 공기, 침묵, 무력감 같은 것을 글로 옮겨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키의 『여자 없는 남자들』이나 『노르웨이의 숲』에서 느껴지는 '텅 빈 듯한 외로움', '말로 다 하지 않는 감정'은 사실상 카버의 문학적 리듬과 맞닿아 있다. 둘 다 사건보다 정서, 설명보다 여백을 선택한 작가다.


카버의 문체 ― 말을 지워가며 쓰는 사람

카버는 화려한 문장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문장을 '지워나가는 작가'에 가깝다. 그의 인물들은 평범하고, 대체로 가난하거나 외롭고, 때로는 술에 취해 있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단순하지만, 그 안엔 인생의 균열이 조용히 스며 있다.


그는 흔히 "미국 문학의 미니멀리스트(minimalist)"로 불린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문장을 줄이는 작가가 아니라, "삶의 가장자리에서 쓰는 사람"이었다. 그의 소설은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읽고 나면 묘한 여운이 남는다. 그 여운은 '우리도 결국 저들과 다르지 않다'는 자각 때문이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 말로는 닿지 않는 감정

카버의 대표작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Love)』은 1981년 발표된 동명 단편집의 표제작이다.


이 소설에는 네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들은 부엌 식탁에 앉아 진(Gin)을 마시며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대화를 나눈다. 누구도 정답을 내리지 못한 채, 이야기는 빛이 사라지듯 조용히 멈춘다. 결말은 없고, 결론도 없다.


읽고 나면 독자는 묻게 된다.
"그래서… 결국 뭐가 사랑이라는 거지?"

바로 그 불완전함의 순간이 카버의 진짜 의도다. 사랑이든 인생이든, 우리는 언제나 말로 다 정의할 수 없다는 것. 카버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네 사람의 입을 빌려, "말로는 닿지 않는 것의 슬픔"을 보여준다.


잘린 듯 끝나는 단편들 ― 인생의 단면처럼

카버의 단편은 늘 '중간에서 끝난다'. 시작도 끝도 아닌 어느 오후의 공기 속에서 이야기가 멈춘다. 그것은 독자를 불친절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오히려 삶 그 자체가 본래 그렇게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생의 절정에서 인생을 멈추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의 말 중간에서, 한숨 사이에서, 술잔을 비우며, 문득 삶이 스러진다. 카버는 그 찰나의 무심함을 포착했다. 그래서 그의 단편은 완결이 아니라 "단면(斷面)"이다. 삶을 세로로 자른 단면 — 그 속에 응축된 진짜 인간의 질감을 보여준다.


그의 생애 ― 가난, 알코올, 그리고 글쓰기

카버의 인생은 소설보다 더 소설 같았다. 그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스무 살도 되기 전에 결혼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가난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며 공장 노동자로, 세차장 직원으로, 우편물 분류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밤마다 짧은 이야기를 썼다.


그의 삶은 늘 파탄 직전이었고, 그 파편들이 그의 문장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그의 인물들은 늘 무언가를 잃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는 나중에 금주에 성공하고 재혼 후 잠시 평온을 찾았지만, 50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짧은 생애였지만, 그는 문학이 어떻게 인간의 부서진 조각들을 다루는지 보여준 작가였다.

왜 지금, 레이먼드 카버를 읽어야 할까?

우리가 사는 시대는 말이 넘쳐난다. SNS, 뉴스, 짧은 영상 속에서 모두가 '의미'를 말하지만, 정작 진심은 잘 보이지 않는다. 카버의 소설은 그 반대편에 서 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것을 말하는 문학.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우리는 멈춰 서게 된다.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진짜 말하고 있는 게 사랑인지, 아니면 외로움의 다른 이름인지를 묻게 된다. 카버의 소설은 삶의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그저 이렇게 속삭인다.

"우리는 아직, 말하는 중이다."

다시 꺼내 든 레이먼드 카버의 책. 오래된 문장 속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대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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