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독서의 위로 『인간실격』
8시 50분, 정문 앞의 고요함
고2 딸과 국립세종도서관 앞에 섰다. 종교 활동을 하지 않는 우리 집에서 일요일은 늘 길고 공허했다.
아이가 하루 종일 핸드폰을 보며 뒹굴거리는 모습을 보는 게 힘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 모습을 보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더 힘들었다.
“도서관 가서 공부하고, 맛있는 것도 먹자.”
의외로 딸은 금세 수락했다. 문이 열리자 곧장 2층 열람실로 향했다.
창가 난간 자리, 사람들의 동선에서 살짝 벗어난 곳.
딸은 교재를 꺼내 펜을 들었고, 나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 말했다.
“나 1층 가볼게.”
“응.”
딸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나는 1층 서가를 어슬렁거리다 일본문학 코너에서 다자이 오사무의 『디 에센셜』을 발견했다.
그중 마지막에 실린 『인간실격』.
만화로만 접했던 작품을, 이번엔 활자로 만나보고 싶었다.
“너무도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첫 문장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부끄럼.’ 불행도, 고통도 아닌 단어.
요조는 그것으로 자신을 설명했다.
그 문장이 오래 머물렀다.
생각해보면 나도 늘 부끄러워하며 살아왔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게, 시선을 마주하는 게,
심지어 내 감정을 인정하는 것조차 부끄러웠다.결혼 후엔 더 복잡해졌다.
어머니와 아내 사이, 아들과 남편 사이.
“당신은 내 편이 아니네.”
그 말은 두 방향에서 동시에 들려왔고,
나는 늘 사과했다. 둘 다에게.
그러다 점점 내 자리는 사라지고, 나만 남았다.
“남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 그것이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유일한 의무라 생각했습니다.”
요조의 문장을 읽으며 젊은 시절 같았다면 그와 함께 무너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그 사실 하나로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딸을 떠올렸다. 딸은 힘들면 “나 오늘 기분 별로야”라고 메시지를 보낸다.
나는 그 말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감정을 표현하는 게 약함이라 믿었던 세대.
이제야 안다. 감정은 숨길 게 아니라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걸.
점심시간, 도서관 식당이 주말에 문을 닫아 인근 쇼핑몰에 있는 식당에 갔다.
“뭐 먹을래?” “돈까스.”
짧은 대화 끝에 식사가 나왔다.
딸은 핸드폰을 보고, 나는 창밖을 봤다.
“아빠는 뭐 읽어?”
“응… 『인간실격』이란 소설.”
“아, 그거 나 작년에 읽었는데.”
손이 멈췄다.
“…그래?”
“응, 재밌었어.”
그 한마디에 웃음이 났다.
나는 그 책을 ‘위로’로 읽었고, 딸은 ‘재미’로 읽었다.
같은 책이 다른 삶에 다른 손잡이가 되어준 것이다.
그 차이가, 세대의 거리이자 마음의 닮음이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극복하기 위해 읽었고, 딸은 그저 한 편의 이야기를 즐겼다.
부끄러움의 무게가 세대마다 조금씩 옅어지는 걸 보며, 안도감이 들었다.
오후 내내 각자의 자리에서 머물렀다.
딸은 문제를 풀고, 나는 책장을 넘겼다.
가끔 고개를 들어 서로를 확인했다.
그 고요한 평화만으로도 충분했다.
6시가 되어 방송이 흘렀다.
“폐관 시간입니다.”
딸이 책을 덮으며 기지개를 켰다.
“배고프다.”
“뭐 먹을래?”
“파스타.”
차에 올라 음악을 틀었다.
딸은 에어팟을 끼고, 나는 운전을 했다.
창밖의 하늘이 천천히 저물었다.
평범한 일요일 저녁, 하지만 어쩐지 마음 한쪽이 가벼웠다.
『인간실격』을 덮으며 생각했다. 젊은 날의 나는 요조와 함께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부끄러움을 품은 채로라도, 다시 읽고, 다시 살아낼 수 있다.
요조는 말했다. “인간, 실격.”
하지만 나는 이제 안다. 실격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을.
그날 도서관에서의 고요한 시간은 내 삶을 다시 읽는 연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