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준 건축가의 '압축'과 유홍준 미술사학자의 '확장'
건축에는 밀도(密度, Density)가 있다. 건폐율과 용적률로 규정되는 이 밀도는, 대지 위 공간을 얼마나 채우고 얼마나 비울지 결정하는 설계의 기본이다.
건물이 너무 밀집하면(밀도가 높으면) 답답하고 숨 쉴 공간이 사라지며, 너무 드문드문하면(밀도가 낮으면) 도시의 활력이 떨어진다.
마찬가지로 글에는 온도가 있듯, 밀도라는 게 있다.
어떤 글은 단어마다 의미가 눌려 있어 한 줄을 읽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반대로 어떤 글은 바람처럼 가볍다.
의미보다는, 공기가 먼저 다가온다.
둘 다 글이다.
하지만 읽고 나면 남는 것은 전혀 다르다. 전자는 돌처럼 가라앉고, 후자는 안개처럼 흩어진다.
우리는 어떤 밀도를 설계해야 하는가.
최근 유현준 교수의 유튜브에서 유홍준 교수를 만났다.
건축과 미학이라는 전문의 세계를 대중의 언어로 번역해 들려주는, 그야말로 ‘공간의 해설자’ 같은 작가다.
유현준의 『공간의 미래』, 『어디서 살 것인가』는 공간을 통해 삶을 재구성하는 책이고,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걸으며 보고, 보며 사유하는 책이다.
건축가와 미술사학자. 한 사람은 건축을 설계하고, 한 사람은 미학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두 분의 책을 읽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건축이나 미학보다 글쓰기 자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같은 대상을 다루지만, 문장의 밀도가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그 차이는 단순히 스타일이 아니라, 세계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였다.
나는 오랫동안 ‘설명하는 글’을 써왔다. 이해시키고, 설득하고, 끝까지 논리를 세워야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문장들이 답답해졌다. 완벽하게 닫힌 문장은 지식의 전달에는 효율적이고 정보는 남았지만, 여운은 머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여운을 주려고 노력했다. 질문으로 끝내거나, 마지막 문장을 비워두거나, 은유로 마무리했다. 설명을 하되, 생각을 강요하지 않으려 했다. 선택을 열어두려 했다.
그런데 여전히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문장은 열려 있는데, 글 전체는 여전히 빽빽했다. 밀도를 높인다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일까?
그때부터 나는 문장과 문장 사이의 공기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현준과 유홍준, 두 사람의 글을 다시 펼쳤다.
그의 문장은 짧지만 무겁다. 한 문장 안에 개념, 구조, 역사가 층층이 쌓여 있다.
“계단은 수직을 수평으로 번역하는 장치다.”
“건축은 관계를 설계하는 것이다.”
이런 문장은 한 번 읽고 지나칠 수 없다. 멈춰 서서, 다시 한 번 곱씹어야 한다. 그 순간이 사유의 압력이다.
개념 하나가 은유 하나로 압축되어 있고, 그 은유는 다시 현실의 공간으로 펼쳐진다. 그는 『공간의 미래』에서 계단, 창문, 골목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이 공간을 어떻게 경험하는가를 논증한다.
한 문단이 하나의 개념을 완성하고, 다음 문단은 그 위에 쌓인다. 논리는 철근처럼 단단하고, 은유는 유리처럼 투명하다.
읽고 나면 머릿속에 구조물이 선다.
그의 문장은 길지만 가볍다. 바람이 지나가듯, 이야기가 흐른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그는 쌍봉사 대웅전 앞에 선다. 그리고 기둥 하나, 추녀 하나를 천천히 따라가며 그것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누가 지었으며, 어떤 시간을 견뎌왔는지 풀어놓는다.
설명이지만 설명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가 걷는 속도로 문장이 흐르기 때문이다.
이 문장에는 개념이 없다. 논증도 없다. 하지만 경험이 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독자에게로 전이된다. 나도 그 앞에 서고, 나도 그 추녀를 올려다본다.
그는 석탑, 불상, 기와를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시간이 사물에 어떻게 스며드는가를 보여준다.
설명보다는 묘사가 앞서고, 논증보다는 감각이 먼저 다가온다. 하나의 유물 앞에서 그는 역사를 말하지만, 문장은 산책처럼 느슨하다. 읽고 나면 어딘가를 다녀온 기분이 든다.
유현준은 세계를 압축해서 문장에 담는다. 복잡한 현상을 하나의 개념으로 응축하고, 그 개념을 하나의 은유로 박제한다. 여러운 현상을 하나로 단순화한다. 그래서 그의 글은 밀도가 높다. 무겁다.
유홍준은 세계를 확장해서 이야기로 푼다. 하나의 대상을 역사, 일화, 감상으로 풀어내고, 그 과정에서 독자가 함께 걷도록 만든다. 그래서 그의 글은 밀도가 낮다. 가볍다. 유연하다.
하지만 둘 다 좋은 글이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자신의 밀도를 의도적으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유현준은 밀도를 높이되, 문단 사이에 숨을 남겨뒀고, 유홍준은 밀도를 낮추되, 이야기 안에 생각을 숨겨뒀다.
나는 여전히 개념을 압축하고, 논리를 세우고, 이해시키려 한다. 그게 편하고, 익숙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그게 나다.
다만 요즘은 가끔 멈춰 선다. 설명을 하되, 결론까지 끌고 가지 않으려 한다.
생각의 방향을 제시하되, 도착지는 열어두려 한다. 그 정도의 환기. 문장을 완벽하게 닫지 않는 그 미세한 균열.
스타일을 바꾸겠다는 건 아니다. 다만 문장과 문장 사이에, 조금 더 공기를 남겨두려 한다.
밀도가 없는 글은 흩어지고, 여백이 없는 글은 무너진다. 전자는 말이 너무 가벼워서 날아가고, 후자는 말이 너무 무거워서 깔린다.
문장은 건축물처럼, 균형으로 완성된다. 하중을 견디되, 공간을 남겨야 한다. 의미를 눌러 담고, 숨을 틔워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문장을 다듬는다. 한 줄을 지우고, 한 줄을 남기며.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게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글은 꽉 채워질 때가 아니라, 멈춰 설 때 온전한 형태를 갖춘다.
그리고 그 멈춤은, 독자가 비로서 숨 쉬기 시작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