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가 아닌 밀도로 사는 법
"강남 아파트 또 올랐대." 누군가의 한마디에 식탁의 공기가 무거워진다. "옆집은 자녀 영어 유치원 보낸대." 카톡방에 뜬 메시지 하나에 마음이 불안해진다.
"코스피 4000 찍었다는데, 삼성전자라도 살걸." 뉴스를 보다 한숨이 나온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두려움 속에 산다. FOMO — Fear Of Missing Out. 놓칠까 봐 두려운 이 감정은 이제 우리 사회의 공기가 되었다.
부동산, 주식, 자녀 교육, 심지어 취미 생활까지. 남들이 하는 걸 나만 안 하면 뒤처지는 것 같다.
새벽 5시, 미국 증시 마감 알림에 눈을 뜬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당기자 파란색 숫자가 펼쳐진다. -8%. 심장이 먼저 반응하고, 이성은 그 뒤를 따라온다.
FOMO는 욕심이 아니다. 그건 인간이 '시간' 속에서 느끼는 불안의 다른 얼굴이다. 자본주의 시대, 돈은 필요하다. 솔직히 남들이 돈 버는 걸 보면 배가 아프다. 그게 인간이니까.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 자체가 FOMO를 따라간다.
부동산 시장을 보자. "지금 안 사면 영영 못 산다"는 공포. 실제 필요가 아니라 '타이밍을 놓칠까 봐' 대출을 받는다. 그리고 그 무게를 수십 년간 짊어진다. 속도를 쫓다가 삶의 밀도를 잃는다.
자녀 교육도 그렇다. "요즘 애들 다 영어 학원 다니던데", "코딩 안 배우면 뒤처진대". 부모들은 아이의 미래가 아니라 '남들과의 격차'를 두려워한다.
학원을 많이 보내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이와 얼마나 깊이 대화하느냐가 중요한데 말이다. 여기서도 우리는 속도만 보고 밀도를 놓친다.
주식 시장도 마찬가지다. 코스피가 4000을 찍었다는 뉴스가 뜬다.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아, 삼성전자라도 사놓을 걸. 하이닉스라도..."
돈을 못 번 게 아쉬운 게 아니다. 나만 흐름에서 빠진 것 같은 그 소외감. 다들 버는데 나만 가만히 있었다는 뒤처짐의 불안.
부동산에 비해 주식은 접근성이 쉽다. 그게 장점이자 함정이다. 집을 사려면 수천만 원이 필요하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야 하고, 등기를 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진짜 괜찮은가' 수십 번 자문한다. 하지만 주식은 다르다. 클릭 몇 번이면 끝이다.
쉽다는 건, 클릭 몇 번으로 큰 이익을 볼 수도, 큰 손실을 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만큼 조심해야 하는 것 같다. 코인도 마찬가지다.
도박과 투자의 경계는 모호하다. 합법과 불법을 왔다 갔다 하며, 우리는 그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이건 투자야"라고 말하지만, 속으로는 "한 번만 더"라고 속삭이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투자를 잘 모른다. 2020년 4월, 테슬라 주가가 급등하던 때 모두가 "지금이 기회다"라 말했고, 나도 감정의 파도에 올라탔다. 300만 원을 넣었다. 처음엔 작은 돈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매일 밤 그래프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예전엔 하루에 스무 번 차트를 봤다. 그 돈은 어느새 내 자존심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래프가 오를 땐 세상이 나를 축복하는 듯했고, 꺾이는 순간 모든 확신이 무너졌다.
그날 밤 나는 검색창에 "테슬라 전망"을 스무 번도 넘게 입력했다. 그때 느꼈다. 돈을 버는 것보다 어려운 건 마음의 파동을 견디는 일이라는 걸.
코스피 4000 찍었을 때 수익 본 사람만큼, 손실 본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고점에 물린 사람도 있고, 중간에 패닉셀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우리 눈엔 성공담만 보인다.
SNS는 수익률 10%는 올려도, -10%는 올리지 않는다. 삼성전자 8만원에 산 사람의 이야기는 보이지만, 5만원에 판 사람의 침묵은 들리지 않는다.
다들 잘 버는 것처럼 보이는 건 착시다. 남의 속도가 아니라 내 하루의 밀도를 봐야 하는데, SNS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남의 속도를 보여준다.
그리고 주식 커뮤니티의 위로는 묘하다. 분명 나도 손실 중인데, 그보다 더 큰 손실을 본 사람을 찾는다. 그의 계좌를 보며 이상한 안도감을 얻는다.
“공부한 셈 치자.” “이 정도면 괜찮아.” 하지만 그것은 위로가 아니라, 인지 부조화를 달래는 방식일 뿐이다. 결국 내 계좌는 위로와 상관없이 비어 있다.
그렇게 주식을 그만 두려고 할 즈음, 주변에서 누가 전화를 한다. "이 주식 좋대, 너도 살래?" 그럴 때 우리는 대부분 그냥 산다.
그리고 반드시 후회한다. 그 사람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고, 설령 안다 해도 내 상황과는 다르니까.
그래서 누가 종목을 추천하면, 그냥 그 종목 이름을 메모해두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바로 사는 게 아니라, 시간 날 때 천천히 공부해보는 거다.
그 회사가 뭘 하는지, 왜 오르는지, 내가 이해할 수 있는지. 충분히 알아본 다음 투자 여부를 결정해도 늦지 않다.
주식을 안 해도 괜찮다. 진짜로. 하지만 지금 이 불안한 감정은 잘 기억해두면 좋겠다. 이 감정은 주식에서만 오는 게 아니니까.
"남의 집은 평수가 크던데", "남의 아이는 영재교육 받는다던데", "남의 직장은 연봉이 높다던데". 우리는 평생 이 문장들과 싸운다.
FOMO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면 그 불안조차 하나의 감정 데이터로 남는다.
어느 날 나는 투자 원칙을 적기 전에, 먼저 나를 적어보기로 했다. 세 가지 질문을 종이에 썼다.
나는 왜 이걸 하려는가.
남들이 하니까? 아니면 진짜 내가 원해서? 월급날, 통장 잔고를 보며 '이걸로 뭘 할 수 있지?' 묻는 대신 '이게 나를 위해 일하게 할 순 없을까?' 생각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오늘 무엇을 할지 스스로 정할 수 있는 삶. 그게 내가 원하는 것 같았다.
무엇을 보고 판단할까.
남의 말이 아니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보려고 했다. 애플을 살 때는 제품 발표회가 아니라, 내가 매일 쓰는 맥북을 생각했다. 내가 직접 느낀 것에서 시작하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어디서 멈출 것인가.
잠을 설치기 시작하면 그건 신호다. 수익률이 아니라 내 수면이 기준이 됐다. 멈춘다는 건 포기가 아니라 균형을 찾는 선택이었다.
이 세 문장은 내 계좌가 아니라 내 일상의 좌표가 되었다.
우리는 늘 '빨리'를 배워왔다. 성과, 속도, 성장. 그러나 시간은 속도가 아니라 깊이로 쌓이는 것 같다.
밀도란 하루하루가 켜켜이 쌓여 나이테가 되는 것이다. 나무는 빨리 자라지 않지만, 매년 한 줄씩 새로운 층을 더한다. 폭풍이 와도 뿌리가 깊으면 흔들리지 않는다.
시장은 속도를 재지만, 삶은 밀도를 남기는 것 같다. 누군가의 폭등보다, 하루하루 차분히 쌓인 경험의 무게가 더 오래 남는다.
물론 급등장에서 타이밍을 놓치면 후회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후회보다 무거운 건, 내가 왜 그걸 샀는지 설명 못 하는 순간이다.
남들이 사니까, 오를 것 같으니까. 그런 이유로 산 주식은 떨어질 때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었다.
이제 나는 투자 앱을 열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의 온도를 읽으려 한다. 지금의 불안이 '사실'에서 온 건지, '상상'에서 온 건지 구분해본다.
어떤 날은 매수를 멈추고, 어떤 날은 그냥 걷는다.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10초만 바라본다. 그 10초가 때론 성급한 결정을 막아준다. 이제는 하루에 10분만 차트를 본다.
"오늘 이 숫자를 봐야 하는 이유가 있나?" 없으면 닫는다. 있으면 본다. 그리고 그 이유를 노트에 적는다.
남들이 뛰어들 때 잠시 숨 고를 수 있는 사람, 그게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다.
시장은 흔들리지만, 나는 오늘도 나의 밀도로 산다.
이 글이 누군가의 새벽 5시에 닿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