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볼〉 이후, 인간이 남은 자리
야구는 오랫동안 '감(感)'의 스포츠였다. 메이저리그의 역사는 스카우트의 매의 눈, 감독의 직관적인 촉, 그리고 팬들의 뜨거운 직감으로 이어져 왔다. 이 오래된 공식은 수십 년간 신성불가침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2002년,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라는 작은 구단이 이 공식을 뒤집었다. 뉴욕 양키스의 3분의 1 예산으로 팀을 운영해야 했던 단장 빌리 빈에게 '감'은 사치였다. 그는 돈이 없는 팀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로 데이터를 들었다.
고전적인 야구인들이 무시하던 출루율, 장타율, 대체 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WAR) 같은 숫자들이 처음으로 팀의 언어가 되었다. 감각 대신 확률이, 경험 대신 통계가 지배하는 혁명의 시작이었다.
이 실화를 스크린에 옮긴 작품이 바로 베넷 밀러 감독의〈머니볼(Moneyball)〉이다.
베넷 밀러(Bennett Miller) — 1966년 뉴욕 출생.《카포티》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고,《폭스캐처》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의 영화는 ‘현실의 냉정함 속에서 인간의 진심을 탐구하는 시네마’로 평가받는다. 〈머니볼〉은 내 다섯 손가락 안에 꼽는 인생 영화 중 하나다.
〈머니볼〉은 단순히 약팀의 승리 공식을 찬양하는 영화가 아니다. 베넷 밀러의 카메라는 빌리 빈(브래드 피트 분)의 얼굴을 집요하게 클로즈업한다.
그가 경기를 직접 보지 못하고 복도를 배회하는 장면, 전화기 너머로 경기 결과를 듣는 순간의 경직된 표정 — 영화는 데이터 혁명가의 불안을 은밀하게 드러낸다.
빌리 빈은 ‘사브르메트릭스(Sabermetrics)’라 불리는 새로운 분석 체계 — 즉, 야구를 통계로 해석해 승리를 예측하는 과학적 방법론 — 으로 무장했지만, 여전히 선수 개인의 눈빛을 읽으려 한다.
피터 브랜드(조나 힐 분)가 제시한 알고리즘은 완벽했지만, 빌리는 끝내 라커룸으로 내려가 선수들과 마주해야 했다.
이 영화의 진짜 긴장은 회의실에서 벌어진다. 오랜 경험을 지닌 스카우트들은 분노한다. "숫자가 어떻게 인간을 설명하나?"
그들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보수성이 아니라, 자신의 오랜 감각이 무너져가는 시대에 대한 두려움이 담겨 있다. 밀러는 이 충돌을 판단하지 않는다.
대신, 데이터와 직관이 서로를 필요로 하는 순간을 조용히 기록한다. 빌리가 스카우트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수를 선발하지만, 그 선수가 부상으로 이탈했을 때 — 화면은 다시 빌리의 고독한 얼굴로 돌아온다.
데이터가 아무리 정밀해져도, 그 데이터를 해석하고 책임지는 것은 여전히 사람이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지금, 야구는〈머니볼〉개봉 당시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진화했다. 2024년, KBO는 세계 최초로 자동 볼 판정 시스템(ABS)을 1군 리그 전면 도입했다.
메이저리그보다 앞선 도입이다. 이제 스트라이크와 볼은 사람이 아닌 기계가 판정한다.
논란의 여지는 사라졌지만, 동시에 심판과 선수 사이의 미세한 신경전 — 그 인간적 드라마 역시 지워졌다. 투수가 심판을 설득하듯 던지던 '바깥쪽 볼'의 예술은 이제 밀리미터의 냉정한 좌표로 환원된다.
피칭 트래킹, 발사각, 타구 속도, 수비 시프트까지 — 모든 장면이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분석된다. 감독의 작전은 분석팀의 알고리즘으로 계산되고, 팬들조차 회전수(RPM)나 익스텐션(Extension) 수치로 투수를 평가한다.
야구는 더 이상 '감정'의 스포츠가 아니라 '데이터' 기반의 정교한 산업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야구가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데이터로는 계산되지 않는 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9회말 2아웃 만루의 투수가 느끼는 압박감, 타자가 번트를 들었다가 내리는 0.3초의 망설임, 덕아웃에서 흐르는 보이지 않는 리더십 — 이 모든 것은 알고리즘이 포착할 수 없는 인간의 영역이다.
데이터는 확률을 제시하지만, 그 확률이 99%일지라도 남은 1%의 변수는 언제든 게임의 흐름을 바꾼다.
빌리 빈이 이룬 진짜 혁명은 데이터의 완전한 승리가 아니라, 데이터 시대 속에서도 인간의 판단이 여전히 필요함을 증명한 것이다.
그는 숫자를 믿었지만, 숫자에게 종속되진 않았다. 확률의 차가운 논리를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직관이 만들어내는 드라마를 끝까지 지켜냈다.
그래서 〈머니볼〉은 '데이터의 영화'가 아니라 '인간의 영화'로 남는다. 경기는 통계로 분석되지만, 감정으로 기억된다.
팬들은 WAR 수치로 선수를 평가하지만, 가슴에 남는 건 데이터가 포착하지 못한 한순간의 표정과 울음이다. 감독은 알고리즘의 작전을 참고하지만, 마지막 대타 카드는 여전히 직감으로 결정된다.
그리고 오늘, 2025년 한국시리즈는 LG 트윈스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한화 팬으로서 많이 아쉬움이 남지만, 숫자가 쌓아 올린 시즌의 끝에서도 승부를 완성한 것은 여전히 사람의 손이었다.
야구는 여전히 인간의 스포츠다.〈머니볼〉 이후의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숫자 너머의 눈빛과 결단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