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글을 씁니다
연필심이 종이를 긁으며 등 뒤로 선을 남긴다. 사각. 사각. 선은 일정 간격을 두고 곧게, 동그랗게, 때론 휘어지며 여백을 채운다. 커터칼을 꺼내 연필 끝의 나무 몸통을 깎는다. 뭉툭한 연필심도 날카롭게 다듬는다.
사격에 앞서 총의 영점(총알이 떨어지는 지점)을 조정하듯, 뾰족해진 연필심 끝으로 노트를 두들긴다. 톡. 톡. 이내 사격 명령이 떨어진 듯, 날렵한 심이 쉬지 않고 종이를 스친다. 비어있던 노트가 선으로 메워진다.
태인은 기획의 뼈대를 잡을 때마다 연필과 노트를 찾았다. 한 때 태블릿과 노트북을 사용하기도 했다. 키보드는 생각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옮겨 적기에 좋다. 마치 강의 급류를 타고 내려오는 래프팅 보트 같다. 뇌리에서 풀려나오는 끊임없는 문장과 단어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글을 생각의 하류로 인도한다.
연필은 생각의 물줄기를 타고 흐르는 나뭇잎과 같다. 굴곡진 생각의 흐름을 몸소 느끼며 때로는 바위에 막히고, 와류를 만나 한자리를 맴돌기도 한다. 그럼에도 하류로 글을 인도한다.
둘 모두 생각의 하류에 도착하는 것은 같다만, 나오는 결과물은 꽤 다르다. 물론 여기에 정답은 없다. 태인은 나뭇잎의 속도가 좋다. 생각의 흐름을 몸소 느끼며, 시시각각 변하는 변수와 아이디어의 전환과 리스크 점검의 과정이 자신에게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한창 와류에 걸린 나뭇잎이 한 자리를 맴돌고 있을 때, 누군가 태인의 어깨를 건드렸다. 톡톡.
디자인 팀의 주혜였다.
"팀장님, 제안 제작 회의 요청하셨다고 해서요. 회의 시작이 3시 맞을까요?"
태인은 연필을 내려놓고 주혜를 바라봤다.
"아, 네. 3시 맞아요. 지금 몇 시죠?"
"3시요."
"벌써 그렇게 됐나요? 그럼 지금 시작하시죠."
태인은 작성 중이던 노트와 연필을 챙기고 회의실로 이동했다. 회의실에는 기획팀, 디자인팀, 영상팀 멤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태인은 빈자리에 앉아서 멤버들을 한 명씩 둘러봤다. 그리고 회의를 시작했다.
"들어서 아시겠지만, 이번 광고 콘셉트는 '롱폼 콘텐츠'입니다."
3개월 전 입사한 기획팀의 진희는 노트북으로 워드프로세서를 켜고 태인의 말을 받아 적었다.
"요즘 숏폼 콘텐츠가 대세라는 점은 우리도 잘 알고 광고주도 잘 압니다. 우리를 포함한 우리의 다음 세대는 앞으로 더 짧고, 더 빠르고, 더 간결하게 콘텐츠를 소비할 거예요. 그래서 많은 광고대행사가 더 자극적이고 더 짧은 콘텐츠를 뽑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죠."
태인은 잠시 숨을 골랐다. 말을 받아 적는 진희의 키보드 소리도 함께 멈췄다. 회의실이 잠시 고요해졌다.
"하지만 우리는 반대로 생각할 겁니다. 우리는 '롱폼 콘텐츠'만을 만들 거예요. 미디어 플랫폼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제안할 생각이에요."
회의실에 앉은 모든 인원이 태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숏폼 콘텐츠가 우리의 뇌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광고주도 잘 알고 있죠. 혹시 모르면 우리가 잘 알려줘야겠죠? 숏폼을 어떻게 풀......."
태인은 회의를 마친 뒤 클라이언트에게서 도착한 메일을 확인했다. 답변을 보내는 발송 버튼을 누르고 작성 중인 파워포인트를 켰다. 텅 빈 슬라이드의 흰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제작 회의는 무사히 끝마쳤다. 기획팀의 생각과 의사는 잘 전달했다. 이제 결과는 제작 팀의 손에 달렸다. 광고에 대한 태인의 생각은 명확하다. 광고 기획의 일은 제작자의 터치에 의해 완성된다. 아무리 훌륭한 기획이어도 제작의 퀄리티가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면 대중의 관심을 끌기 어렵다.
어차피 대중은 완성된 디자인과 영상을 통해 광고를 마주한다. 어떤 전략과 콘셉트를 바탕으로 광고가 탄생했는지 궁금한 사람은 거의 없다. 아니. 그냥 광고 자체에 관심이 없다. 광고는 스킵의 대상일 뿐.
제작물 초안이 나오면 제작 팀과 수 차례의 피드백을 거쳐 밤새도록 수정을 진행하고, 완성된 제작물을 제안서에 삽입하고, 기획 배경과 광고 콘셉트와 그에 따르는 제작물, 운영 방안, 스케줄, 목표 KPI, 예산을 작성하면 제안서가 완성된다.
그렇게 완성된 제안서를 들고 클라이언트가 지정한 장소에 도착하면 엄숙한 분위기의 회의실이 기다린다. 준비해 온 제안서를 매력적으로 소개하고 수 일을 기다려 결과 발표를 기다린다. 광고 업계에서 은메달과 동메달은 의미가 없다. 오로지 금메달만 인정되는 잔혹한 종목이다. 그렇게 치열한 경쟁을 뚫고 1등을 거머쥐면 드디어 세상에 광고를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태인은 지끈대는 머리를 붙잡고 발코니로 나왔다. 세찬 바람이 머리칼을 헝클고 스쳐갔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텅 빈 슬라이드를 매혹적인 글과 이미지와 영상으로 채우려면 몇 날 밤을 지새워야 할 것이다. 10년에 가까운 세월을 지속해 온 일이기에 큰 부담은 없다. 다만 숨을 돌릴 잠깐의 시간이 필요하다.
태인은 주머니에 든 담뱃갑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한숨처럼 뱉은 담배연기가 바람에 휘말린 채 빌딩 위로 높이 솟구쳤다.
fin.
영감을 받은 글
- 김영하 '글의 침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