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글을 씁니다.
정온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한창 여자친구와 섹스 중이었다. 그녀의 신음소리와 나의 헐떡임을 극복하기에 스마트폰의 진동음은 한없이 고요했다. 물론, 연락이 온 사실을 알았다 해도 섹스를 멈추지는 않았을 테다.
7년 만에 온 연락이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남산타워 일층에 있는 수제 햄버거 매장에서 소고기 패티를 만들었다. 스마트폰에는 부재중 전화 1통과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잘 지냈어? 오랜만에 연락하네. 다름 아니라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너밖에 떠오르질 않아서. 알잖아. 나 친구 없는 거. 시간 될 때 전화 한 번 해줄래? 그럼 기다릴게.
정온다운 문자였다. 허례허식 없이. 용건만 간단히. 하지만 선은 넘지 않도록.
커피를 주문하고 정온을 기다렸다. 카페 안은 꽤나 소란스러웠다. 넓은 공간을 촘촘하게 채운 테이블마다 각양각색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작은 틈도 용납지 않겠다는 듯 쏟아져 나오는 목소리의 합은 공간을 소리로 가득 메워서 오히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소리와 소리가 서로를 옭아매서 테이블 하나만큼의 작은 공간을 벽처럼 꽁꽁 감쌌다. 덕분에 마음 편히 대화할 환경이 갖춰졌다.
문자와 마찬가지로 정온과의 통화는 용건에서 시작해서 용건으로 끝났다. 가능한 날짜와 시간을 묻고, 만날 장소를 정했다. 어떤 부탁인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가져온 책을 읽었다. 1950년대 미국에 살던 여성의 삶을 다룬 소설이었다. 소설 속 여성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임신한 아이를 지키기 위해, 깊은 산으로 들어가서 스스로의 힘으로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숲의 손을 빌려 아이를 정성껏 키웠다. 하지만 숲에서의 생존 지식이 부족한 그녀에게 굶주림과 야생의 위협은 참아낼 수 없는 고통이었다. 결국 그녀는 아이와 함께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아이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일면식도 없는 낯선 부모의 차량 뒷좌석에 목숨만큼 소중한 생명을 두고 달아났다. 차마 돌아볼 생각도 못하고 아이와 멀어지겠다는 마음 하나로 달리는 그녀의 숨소리가 글자 사이의 여백마다 느껴질 때, 책 위로 그림자가 졌다.
정온이었다. 7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그의 외모는 달라지지 않았다. 머리는 여전히 귀찮은 듯 뒤로 묶었고 은색 테의 동그란 안경을 썼다. 책을 덮고 그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하나도 안 변했다."
"응. 오랜만이네. 잠깐만. 주문 좀 하고 올게."
카운터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정온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과연 7년이라는 시간은 그를 변하게 만들었을까? 혹은 나를 한없이 초라하게 만들던 모습 그대로일까?
사실 의미 없는 질문이다. 나는 이미 답을 봤다. 그의 눈을 마주한 순간 알았다. 그곳에는 여전히 무해한 눈이 있었다. 원하는 것도, 보고 싶은 것도 없는, 그저 세상을 향하는 눈.
외경이 잘 보이는 카페의 통유리를 보는 것처럼, 그의 눈에는 상대를 생각에 빠지게 하는 힘이 있었다. 좀처럼 잡히지 않는 시선의 의미를 좇다 보면,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허탈함에 관심을 거두게 만드는 눈. 그곳에는 여전히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 눈이 있었다.
주문한 커피를 받아온 정온은 커피잔을 내려놓기도 전에 말부터 꺼냈다.
"이번에 공모전에 당선돼서 상금을 받았어."
솔직히 살짝 놀랐다. 공모전에 당선된 사실에 놀랐다기보다는 그 정온이 공모전에 출품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네가 공모전에 출품을 했다고?"
"정확히는 동생이. 나 몰래."
그럼 그렇지. 내가 아는 정온은 절대 제 손으로 본인의 글을 공모전에 출품할 위인이 아니다. 대학 시절, 정온과 참으로 많은 책을 읽었고, 미술 전시와 사진 전시를 기웃거렸으며, 틈만 나면 영화를 봤다. 우리는 항상 콘텐츠에 굶주려 있었고,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았으며, 더 나은, 더 많은 사냥감을 찾는 포식자의 눈으로 글과 그림과 영상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보아온 것들을 글로 남겼다. 우리는 서로의 글을 읽으며 자주 토론했다. 사실 정온과 나의 글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아득한 격차가 있었다. 피 토하는 심정으로 쓰다 보면 다다를 수 있겠거니 생각할 수준이 아니었다. 완성도의 문제라기보다는, 글의 발상과 생각의 깊이에 관한 문제였다. 그때의 정온은 영화 '매트릭스'의 메시아, '네오(Neo)'처럼 느껴졌다.
정온에게는 세상의 이면에 담긴 소스코드를 이해하고 분석하며, 새롭게 규합하는 힘이 있었다. 당시의 내겐 노력으로 닿을 수 없는 불가해의 영역처럼 느껴졌다.
다만 그런 그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정확히는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구성원으로서의 단점이었다. 그에겐 사람이라면 흔히 바라는 욕구가 부재했다. 가장 먼저 이성에 관심이 없었다. 학부 시절에는 문화에 관한 깊은 이해도에 반하여 호감을 표한 몇몇 여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여성을 성적인 호감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자를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다. 세상에 태어나며 탯줄을 잘랐을 때, 성욕도 함께 잘려나간 사람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물질, 권력, 명예에 대한 욕심도 없었다. 아마도 그의 노트북 워드프로세서에는 몇백 편 혹은 몇천 편에 달하는 글이 쌓여있을 테다. 내세우거나 알리는 일을 바라지 않는 그의 성격상, 세상에 공개된 적 없는 정온만 보았을 무수한 글들이. 아마도 그 안에는 출판사 편집자들이 거품을 물고 달려들 역작도 있을 테다. 아니.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정온에게 글을 쓰는 일은 우리로 치면 숨을 쉬고, 출근을 위해 걷고, 대중교통을 타는 수준의 일이다. 즉, 자랑할만한 것이 못 된다. 알릴 거리도 못 된다. 보통의 사람은 숨을 쉬고 대중교통 타는 일을 굳이 알리고 싶어 하진 않으니까. 정온도 그럴 뿐이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정온은 취업하지 않고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글을 썼다. 그 이유를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항상 같았다.
'당장 먹고 살 수만 있다면 그 이상의 돈은 불필요해. 취업은 불필요한 돈을 주고, 필요한 시간을 못 쓰게 만들어.'
어느 날은 진지하게 불교에 귀의하는 것은 어떠냐고 물었다. 성욕, 물욕, 권력욕, 명예욕이 없는 사람이라면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 해탈? 깨달음을 얻는 자 그 자체 아닐까?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간결하면서도 허무했다.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싶을 뿐이야. 거기서는 불경을 읽고 불교를 써야 하잖아. 관심이 가질 않아. 그리고 고기도 먹지 못하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공모전에서 받은 상금을 기부하려고 해. 도와줄 수 있겠어?"
"...기부를? 네가? 어디에 기부하고 싶은데?"
그래. 애초 상금을 쓸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런데 기부는 또 다른 문제였다. 정온은 욕구뿐만 아니라, 사회에 대한 관심도 크게 없었다. 오로지 자연과 자신뿐이었다.
"자연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단체였으면 좋겠어. 요즘 날이 너무 덥고 비도 많이 오잖아. 겨울은 덜 춥고. 내가 알던 자연을 조금은 천천히 잃고 싶어."
"지키고 싶은 게 아니라?"
"사람이 지킨다고 지켜지지 않아. 자연의 일은."
"그게 무슨 말이야?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자연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잖아. 그 노력들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무해한 눈이 나를 바라봤다. 괜히 부담스러워 시선을 커피잔으로 내렸다.
"자연은 늘 변화를 향하고 있어. 너무 많은 것은 넘치기 마련이야. 지금의 우리는 여러 방면에서 너무 많아."
이대로는 도저히 대화가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오후에 다른 약속이 잡혀있기에, 이야기의 맥을 끊었다.
"그래. 어떤 말인지 대충 이해했어. 그러니까 기부하는 방법을 모르겠으니, 환경단체에 공모전 상금을 기부해 달라는 말이지?"
"맞아."
"...그러다 내가 그 돈을 먹고 튀면 어쩌려고?"
정온의 눈이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7년 만에 만난 사람에게 너무 성급하게 부탁하는 거 아니야? 7년 사이에 내가 어떻게 변했을 줄 알고 그런 큰돈을 덥석 주려는 거야?"
"네가 써도 상관없어. 사실 기부를 하든 말든 그것도 중요하지 않아. 그저 그 돈이 불필요할 뿐이야."
정온은 그렇게 말하며 품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냈다.
"계좌번호를 알려줘. 입금할게."
일단 계좌번호를 불러줬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그 돈을 기부할 생각이다. 당장 돈이 궁한 것도 아니고, 남 부끄럽지 않게 살아온 계좌를 더럽히고 싶지도 않았다. 정온은 옮겨 적은 메모지를 품에 다시 넣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 하느라 바쁠 텐데 불러내서 미안. 시간을 더 잡아두고 싶진 않으니 그만 일어나자."
"...용건만 간단히. 좋아. 나가자."
액체류를 버리는 쓰레기통에 반 이상 남은 커피를 쏟아부었다. 카페 밖으로 나오니 날 선 바람이 얼굴을 할퀴었다. 목도리를 단단히 여미고 정온을 바라봤다. 정온은 나온 자리에서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그 옆에 서서 같이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을 바라보던 정온의 눈이 나를 향해 돌아섰다. 그곳에는 반짝이는 두 개의 하늘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