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없는 영화 리뷰 : 애니멀 킹덤

영화를 보고, 글을 씁니다

by 일칠삼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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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몇 차례 말씀 드리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중년의 의사가 내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정말 시신경 절단술을 진행함에 동의하십니까?"


별다른 고민 없이 답했다. 이미 마음의 준비는 마쳤으니까.


"네. 동의합니다."

"시신경 절단술을 시행하면 시력을 영구히 상실하게 됩니다. 앞으로 그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없게된다는 뜻입니다. 이 점도 이해하셨습니까?"


의사는 내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헸다. 오히려 바라는 바다. 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으니까.


"네, 너무나도 잘 이해했습니다."


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이 일이 불법이라는 사실은 아시죠? 비용도 비용이지만, 도저히 선생님의 선택이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멀쩡히 기능하는 눈을 안 보이게 해달라니요.... 혹시 어떤 이유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죄송하지만 그건 비밀입니다."

"...혹시 요즘 발생한 일 때문입니까?"

"..."


대답하지 않았다. 의사는 궁금증이 가득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후회의 마음이 든다. 수술 일정을 미뤄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잘 안다. 일정이 미뤄질수록 내가 살고 있는 지옥의 시간은 길어진다.


그럼에도 아쉬운 마음이 든다. 이 눈에 마지막으로 담아 둘 세상의 모습이 꾸밈 장식 하나 없는 의사의 진료실이었을 줄은 몰랐으니까. 이 눈에 마지막으로 담게 될 사람이 피로에 찌든 중년 남성일 줄은 몰랐으니까.



02

그녀가 변한 것은 올해 여름이었다. 가장 먼저 체중이 눈에 띄게 불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갑상선에 문제가 있는 줄 알았다. 정상적으로 늘어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의 체중은 30kg가 증가했다.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며 진료를 받아봤지만 갑상선은 정상이었다. 다른 어떤 기관에서도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나칠 만큼 건강했다.


그녀는 지나치게 뚱뚱해진 자신의 모습에 공포를 느끼며 외출을 포기했다. 식사는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다. 그마저도 야채와 두부, 콩 등을 곁들여서 밥 한 공기도 안 되는 분량만 먹었다. 그럼에도 체중은 계속해서 증가했다.


2개월이 지날 무렵, 그녀의 코와 귀가 변하기 시작했다.


겨울의 첫 날 개장한 스키장의 슬로프처럼 매끈한 곡선으로 흘러내리던 그녀의 콧날이 하늘을 향해 들리기 시작했다. 동그랗고 아담하던 귀끝은 어느새 뾰족해졌다. 더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병에 걸린 게 아니다. 그녀에게도 변화가 시작됐다.



03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녀가 사람과 다른 새로운 종이 될지라도 상관없다. 그녀가 원숭이가 되건, 곰이 되건, 여우가 되건 상관없다. 그녀와 나 사이에는 종(種)으로 끊어낼 수 없는 단단한 서사가 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믿었다.


쫓기고 도망치고 달아나던 꿈에서 간신히 도망하여 잠에서 깨어났을 때, 눈 앞에 거대한 돼지가 보였다. 소스라치게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곧바로 깨달았다.


그녀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다. 나는 방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극한의 두려움을 느꼈다. 미안하다. 그녀에게 너무나도 미안하다. 종과 무관하게 그녀를 사랑한다는 마음이 우스웠다.


울고 싶었으나 그녀가 깰까 두려워 울지 못했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전기 포트에 물을 데워서 티백을 우려냈다. 거실 테이블에 앉아서 생각을 정리했다.


앞으로 이런 일은 더욱 자주, 더욱 심하게 발생할 것이다. 그녀의 모습은 더욱 달라질 것이다. 내가 사랑하던 그녀의 맑은 눈, 코, 이마, 작은 손은 이제 없다. 내가 사랑하던 그녀의 모든 외적인 것들은 이내 사라질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 없이 살 수 있는가. 냉정하지만 그녀 없이도 살 수 있다. 혼자 쓰기에 넉넉한 돈을 벌고 있다. 모아둔 자산도 제법 있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도 있다. 꾸준히 운동하고 있고, 나름 활동적이기에 새로운 인연을 만날 자신도 있다.


그럼에도 잘 살 수 있을지 묻는다면 그건 모르겠다. 꾸준히 운동하는 습관과 적당한 외부 활동과 넉넉한 돈과 마음이 맞는 친구들은 그녀가 있었기에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맞다. 그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의 나는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반푼이에 불과했으니까.


그래. 나는 그녀 없이 잘 살 자신이 없다. 하지만 오늘처럼 그녀를 두려워할까 무섭다. 그녀가 나의 두려움을 알게될까 두렵다.


마음을 다잡기 위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손이 떨려서 잔에 담긴 찻물이 출렁였다. 불안한 마음에 차를 연거푸 들이켰다. 찻잔의 반을 비우고 나니 마음이 좀 진정됐다.


뜨거운 물을 채워 차를 두 번 더 우려냈을 때,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그녀의 모습이 두렵다면, 그녀를 두려워할 상황 자체를 예방하면 되지 않을까? 두려움을 영구히 예방한다면. 그녀를 두려워할 일은 없다.


생계가 조금 걱정이지만, 벌어둔 돈이 있으니 지금부터 준비하면 된다. 집을 팔고 더 작은 곳으로 이사가자. 덩치가 커진 그녀는 조금 불편할 수 있겠지만, 함께할 수만 있다면 불편함은 문제가 될 수 없다.


곧바로 펜과 노트를 가져와서 생각을 옮겨 담았다. 우리의 삶이 무너지지 않을 방법을 정리하는 만큼, 최대한 정성스럽게 오랜 시간을 고민하며 글을 적었다. 이것은 우리만의 왕국(Our Own Kingdom )을 만들기 위한 첫 걸음이 될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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