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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팽이 Aug 14. 2020

이빨과의 전쟁(1)

30대에 영구치와 이별을 고했다

  국회의원 선거가 끝날 무렵, 상악 오른쪽 끝 어금니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과거 치과에 방문했을 때 '치아에 금이 갔으니 쓰시다 통증이 생기면 신경치료를 받으시라'라는 말을 듣고 약 8개월 뒤이다. 그 얘기를 해준 치과에 방문하려니 2주를 기다리란다. 다른 치과들도 어찌 그리 환자가 많은지. 통증이 신경 쓰여 얼른 갈 수 있는 치과를 수소문하여 방문했다.





  혹자가 말했다. 치과는 안 아플 때 가야 한다고. 통증 강도에 따라 비용의 단위가 바뀐다고. 황당하게도 치아 크랙이 문제가 아니고 바깥쪽에서 잇몸 쪽으로 충치가 있단다. 충치가 뿌리까지 깊으면 발치해야 할 수도 있단다.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나이 서른둘에 발치라니! 8개월 만에 충치가 이렇게 깊어진 건지, 아니면 발견을 못 한 건지 괜히 그 치과가 원망스러웠다. 신경치료로 살릴 수 있다는 게 다행이긴 했지만, 가뜩이나 입을 크게 벌리면 왼쪽 턱이 빠져서 힘든데, 맨 안쪽 치아라 치료기간 내내 입을 잔뜩 벌리고 있어야 해서 그게 더 괴로웠다.


  신경치료가 마무리될 무렵, 이번엔 하악 작은 어금니 쪽에 불인지 전기인지 지지는 듯한 통증이 하루 종일 지속됐다. 하필 주말이라 치과도 대부분 닫거나 예약이 꽉 차 진료를 받을 수가 없었고, 하는 수 없이 대학병원 응급실에 가 진통제 주사와 마약성 진통제를 받아 들고 겨우 잠들었다. 신경 치료하던 병원은 예약 아니면 진료도 안 해줘서 또 다른 병원을 수소문해야 했다. 이 작은 뼛조각이 어찌나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지. 얼음을 물고 있으면 잠시 괜찮다가 또 얼굴에 벼락이 치다가 반복이다. 치통은 사람이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든다. 당장 이 고통을 멈추게 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게 만든다.


  결국 또 다른 치과에 방문했다. X-ray나 CT 상에서는 문제가 보이지 않는단다. 이런 불타는 고통은 급성 치수염에서 발견된다는데 치아는 멀쩡하고, 사진에서 안 나오면 크랙을 의심한다는데 난 씹을 때뿐만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미친 듯이 아팠다. 일단 통증을 잡아야 했기에 급하게 마취를 하고 신경치료를 시작했다. 그렇게 내 두 번째 이빨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틀 뒤, 8개월 전에 금이 갔다고 금으로 씌운 이가 너무 아팠다. 이끼리 닿기만 해도 전기가 통하는 고통이 왔고, 잇몸 염증 때문인가 싶어 워터픽을 썼더니 이틀 전 겪었던 통증이 되살아났다. 며칠 더 지켜봐도 고통이 더욱 커질 뿐이었다. 아뿔싸, 진짜 문제는 여기에 있었구나. 엉뚱한 이를 죽인 것 아닌가 싶어 가슴이 아팠다. 한 달만에 이빨 세 개에 손을 댈 판이었다.


  그렇게 치과에 방문하여 이번엔 완전한 사형선고를 받았다. 신경치료를 해도 가능성이 희박하여 발치해야 한단다. 사실 이때 방문했을 땐 이가 너무 아파 반쯤 포기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상태였다. 차라리 뽑아서 고통에서 자유로워지는 게 마음이 편하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서른둘에 임플란트라니. 발치 후 며칠을 울었다. 내 노력에 대한 억울함과, 치아를 떠나보내는 아픔과, 앞으로 살 날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남은 세월 더 많은 임플란트로 살게 될 것이 걱정되었다. 이 세상에 서른에 임플란트를 한 사람은 나 혼자만 같았다.




  이렇게 치아 세 개에 사형선고, 그중 하나는 사형집행을 했다. 이것이 불과 한 달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름 양치질에 치실에 치아관리에 신경 쓴다고 생각하던 나였는데, 이런 내 노력들을 모두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이가 약한 집안에서 태어난 가족을 원망하기도 하고, 치아를 빼버린 치과도 원망했다. 세상 모두가 원망으로 뒤덮이는 순간이었다. 뽑은 금니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아파 팔지도 못하고 서랍 속에 숨겨두었다. 팔아버리면 정말로 이별을 하게 될까 봐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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