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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Dec 31. 2021

공리주의

미리 보기와 철학평론

미리 보기


(46) 배부른 돼지보다는 궁핍한 인간이 낫고, 만족해하는 멍청이보다는 못마땅해하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낫습니다. 만약  바보가, 혹은  돼지가 다른 의견을 갖는다면 그건 문제를 자기 쪽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혹은 인간은 문제를 두루 생각합니다.


(53~54) 행복이 아주 유쾌한 흥분 상태가 지속됨을 의미하나요? 만약 그렇다면 그런 의미의 행복은 불가능하며 이는 너무나 명백합니다. 한껏 고무된 쾌락의 상태는 순간적으로만 지속되거나 경우에 따라 중단되었다가  시간 혹은 며칠 지속될 뿐이니까요. 그건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이 아니라 이따금 섬광처럼 번뜩이는 기쁨입니다.  점에 대해서는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고 가르쳐온 철학자들 역시 자신들을 비웃는 사람들 못지않게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한 행복은 황홀경의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능동적인 즐거움이 수동적인 쾌락을 단연 압도하도록 기틀을 잡고 인생이   있는 이상을 기대하지 않으면서 고통은 적고 일시적이지만 다양하고 많은 쾌락으로 이루어지는 인생의 순간순간을 행복이라 했습니다.


(62쪽) 공리주의 도덕에서는 타인을 위해 자신의 최대 행복을 희생하는 힘이 인간에게 있다고 인정합니다. 단지 그런 희생 자체가 선함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뿐입니다. 행복의 총량을 늘리지 않거나 늘릴 것 같지 않은 희생은 헛됩니다. 공리주의가 갈채를 보내는 자기 헌신은 오직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며, 그건 인류 전체이든, 인류의 집단적 이익이 고려된 개인이든, 타인의 행복이나 그 행복의 수단에 기여하는 일입니다.


(76~77) 정말 별난 가정도 있더군요. 인류가 공리를 도덕의 판단 기준으로 여기는  동의하더라도, 무엇이 유용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어떤 합의도 하지 못할 것이며, 그러므로  문제에 관해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치고 법과 여론에 의해 강제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고 말합니다. 누가 봐도 말도  되는 내용이 도덕 기준에 들어갔다면 어떤 도덕 기준이든 제기능을 하지 못함을 증명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인류는 여러 가설을 통해 지금까지 어떤 행위가 행복에 영향을 미칠 것인지 확고한 신념을 얻은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게 전승된 신념이 대중에게 도덕 규칙이 되며, 이는  나은 규칙을 찾기 전까지 철학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철학자들은 아마도 많은 주제에 대해  나은 규칙을 찾으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윤리 규정이라고 해서 결코 신성한 권리는 아니며, 행위가 만인의 행복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인류는 여전히 배워야  것이 많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아니, 진지하게 주장합니다.


(94쪽) 현재의 목적을 생각해 볼 때, 의무감이 타고난 것인지 외부에서 주입된 것인지 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타고난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의무감이 자연스럽게 부여되는 대상이 무엇인지 여전히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선천적인 의무 이론을 철학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은 직관적인 인식이 도덕원리이며, 타고난 감정은 도덕의 내용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선천적인 것이 관건이라면 타고난 감정이 있어서 그게 타인의 쾌락과 고통에 관련된 감정이어서는 안 될 이유가 있겠습니까?


(132쪽) 보다 구체적인 의미로 보면 어떤 사람이 선을 행한 상대방으로부터는 선을 보상받고, 악을 행한 상대방으로부터는 악을 보상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악을 선으로 갚으라는 계율이 정의 실현의 사례로 여겨진 적은 결코 없지요. 단지 다른 고려 사항들을 살피느라 정의의 요구를 외면한 사례로 이해됩니다.


(151쪽)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정의의 개념은 행동 규칙과 그 규칙에 구속력을 부여하는 감정, 이 두 가지를 전제로 합니다. 행동 규칙은 모든 인류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며, 인류의 선을 구현함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감정은 행동 규칙을 어긴 사람을 처벌해야 한다는 바람입니다. 덧붙여서 이 감정에는 규칙 위반으로 인해 고통받는, 즉 규칙 위반에 의해 그 권리(이 경우에 적합한 표 현을 사용한다면 말이지요)가 침해당하는 특정인에 대한 생각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정의감은 자기 자신 또는 자신이 공감을 느끼는 사람들을 향한 공격이나 피해를 막아내고 보복하려는 동물적 욕망이, 확장된 공감이라는 인간의 능력과 지적인 이기심이라는 인간의 발상에 의해 모든 인간을 아우를 수 있도록 그 범위가 넓어진 것 같습니다. 정의감은 이성적인 요소에서 그 도덕성을 얻고, 동물적인 요소에서 그 특유의 당당한 분위기와 자신만만한 에너지를 도출합니다.


(166쪽) 그렇다면 정의로운 것과 편의적인 것의  차이는 단지 상상 속의 구별일까요? 정의가 정책보다 신성하며, 정의가 충족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정책에 귀 기울여야 할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인류가 착각에 빠져 있기 때문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의 특성과 기원에 대해 우리가 했던 설명을 생각해 보면 정의와 편의는 분명히 구별됩니다. 행동의 결과로 도덕성을 판단하는 것을 지극히 경멸한다고 공언하는 사람들 중에서 나만큼 정의와 편의의 차이점을 중시하는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공리주의> 평론


한때 철학이 모든 학문을 점유하던 시절이 있었다. 우주의 삼라만상과 인간 세상의 모든 원리까지 철학이라는 집 안에서 탐구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인류 역사를 좀 더 들여다 보면, 정작 철학이 누리던 영광과 전설의 시간은 매우 짧았다. 인류사 어디에서나 종교가 대부분의 지적 권세를 차지했다. 종교가 힘을 잃자 이번에는 과학이 철학의 권위를 가져갔다. 남겨진 철학의 유산과 지평은 인간 행위에 대한 탐구였다. 그것을 사람들은 도덕철학 혹은 윤리학이라 불렀다.


21세기 현대에 이르러 철학은 곧 도덕으로, 윤리학으로 변모했다. 이런 분야에서 여전히 두 명의 철학자가 반드시 언급되니 한 명은 임마누엘 칸트이며 다른 한 명은 존 스튜어트 밀이다. 후자는 이름으로 언급되기보다 자주 ‘공리주의’로 대체된다. 칸트철학과 공리주의는 도덕철학에 대한 상반된 입장이다. 그러므로 논쟁의 당사자로 항상 언급되었다. 고등학교 교실에서, 대학교 교과과정에서 혹은 사회의 지적인 토론장에서 도덕이 언급되는 곳 어디에서나 칸트철학과 공리주의는 빠짐없이 거론된다. 어째서? 무슨 이유로? 그 까닭에 대한 해답이 바로 이 책 <공리주의>이다.


1785년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라는 걸출한 저서를 펴냈다. 칸트의 철학은 현대 사회의 이념으로 자리잡았으며 공교육의 밑그림이 되었다. 그런데 칸트가 펼쳐내는 이념과 매우 다르면서도 매혹적인 세계관이 발표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1863년에 출간된 <공리주의>라는 책이었다. 이런 출판 사건 때문에 우리는 칸트와 함께 공리주의를 배우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실제로 읽어 본 사람이 드물다. 사람들은 그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거나 ‘양적/질적 공리주의’라는 언명만을 기억할 뿐이니 애석한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원한다.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저마다 생각이 다름에도 행복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행복이 인간 행동의 기준이 될 것만 같다. 그러나 도덕은 선한 행위를 하도록 명령하는 법률이며, 그 법률에 따라 우리 인간은 때때로 자신의 본능에 역행하면서까지 의무를 이행한다. 이런 점을 강조하는 철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이 보기에 행복은 누구나 지니는 본능에 속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행복론과 행복을 추구하는 쾌락주의는 도덕철학의 원리가 될 수 없었다. 이들 철학자의 대표적인 인물이 임마누엘 칸트였다. 인류 지성사에서 칸트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런데 이런 철학을 조목조목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월간 잡지에 투고한 이가 있었다. 그가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이며, 그때의 투고 글이 바로 <공리주의>였다. 그는 사회의 진보를 믿었다. 인간은 무엇이 선량한 행위인지 배워야 하며, 사회 여론은 무엇이 더 올바른 행위인지에 대한 공론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류의 잔인하고 비참한 역사를 생각해 볼 때, 교육과 여론을 빼면 참된 도덕은 불가능하다고 밀은 믿었다. 그런데 인간의 자율성을 주창하는 칸트철학은 교육과 여론형성에 유난히도 침묵했다. 밀이 보기에 개인이 지니는 준칙이 과연 보편적으로 따를 수 있는 규칙인지를 개인 스스로 판단하도록 유보하는 칸트철학은 ‘형식론(정언명령)’만 가르쳤지 실제 교육현장에서 써먹을 수 있는 알맹이가 없었다. 밀의 입장에 따르면, ‘거짓말하지 말라’라는 규범은 도덕의 제1원리가 되지는 못할지라도 그 자체로 도덕법이 될 수는 있다. 그러나 칸트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라는 규범은 개인의 준칙이 될지언정 그 자체로 도덕법이 아니다. 그 준칙이 과연 보편적인 법칙이 될 수 있겠느냐는 ‘자율적인 심사’를 거쳐야 하는데, 이는 결국 도덕을 사회적 관점이 아닌 개인적 문제로 만든다. 그러므로 칸트의 도덕철학으로는 사회 진보를 이끌어 갈 수 없다. 밀은 도덕원리라고 한다면 마땅히 무엇이 도덕인지 그 내용을 직접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 생각의 총체적인 결과물이 바로 <공리주의>였다.




책은 곧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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