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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Apr 11. 2022

철학단편선

월간이소노미아 6호 | 생각하는 사람들을 빛나게 도와주는 할아버지들

월간이소노미아 6호가 발행됐습니다.

지금까지 노션(notion)으로 월간이소노미아를 발행했어요. 매거진은 기사가 여럿 있어야 하고, 그러다 보니 여러 개의 링크가 필요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링크를 잘 클릭하지 않습니다 ㅠㅠ


그래서 그냥 이곳 브런치에, 간단하고 편리하게^^, 월간이소노미아 발행합니다. 월간이소노미아? 그게 뭔데?? 네.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하시는 분들을 위해 이소노미아 출판사가 한 달에 한 권 정성껏 만든 책을 소개하는 Book Magazine입니다. 


1. 책소개

먼저 책의 표지를 소개합니다.

108mm*172mm의 얇은 책입니다.

책 제목은 <철학단편선, 생각하는 사람을 빛나게 도와주는 할아버지들>입니다. 표지의 텍스트 배치가 좀 어색하지요? 이상하게 띄어쓰기를 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우리말 표기의 띄어쓰기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칙이라기보다는 필요에 따라 제안된 발명이어서 디자인할 때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달에 펴낸 책은 아래와 같습니다.


시구처럼 4/5/5/5 의 셀을 만든 다음에, 하나의 음절과 셀 하나를 일대일 대응시켰습니다. 빈칸은 허수고, 셀을 할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띄어쓰기가 없습니다. 


물론 어색함이 있습니다. '되지않는세'와 '게도와주는'은 이상한 언어표현입니다. 하지만 이런 어색함은 의도되었습니다. 문자가 지닌 <시각요소>와 <의미요소> 중에서, 단지 시각요소의 배열에 변화를 줌으로써 의미요소에 어긋남이 발생합니다. 이 어긋남이 사람들의 '의미적 이해'를 방해합니다. 방해를 받지 않으면 그냥 스치고 지나갔을 겁니다. 방해를 받으니까 다시 책의 표지를 보게 됩니다. 어떤 이는 뭐야 띄어써야지 라고 생각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요즘은 이렇게 디자인도 하네 라고 생각하겠지요.


누군가 의미요소에 어긋난 문자 배열을 지적한다면, 그건 좋은 것입니다. 지적당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있지도 않는 것보다는 나은 디자인 전략이라고 생각해 봤습니다.


가격은 10,000원입니다. 158쪽밖에 되지 않는 얇은 책입니다. 하지만 놀라실 거예요!!! 이 책은 3명의 할아버지가 등장합니다. 우리 인류 정신세계사에서 빛나는 지위를 차지하는 대철학자들입니다. 어째서 이 세 분이 한 권의 책으로 묶였을까요? <생각>을 키워드로 묶인 철학 엔솔러지입니다!!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쇠렌 키르케고르 (11)

1편 집단은 거짓이다(15)


임마누엘 칸트 (41)

2편 계몽이란 무엇인가 (45)


파르메니데스 (69) 

3편 자연에 관한 서사시 (73)

단편 1(74) | 단편 2(80)| 단편 3(82) | 단편 4(84)| 단편 5(86) | 단편 6(88) | 단편 7(92) | 단편 8(94) | 단편 9(104) | 단편 10(106) | 단편 11(108) | 단편 12(110) | 단편 13(112) | 단편 14(114) | 단편 15(116) | 단편 15a(118) | 단편 16(120) | 단편 17(122) | 단편 18(124) | 단편 19(126) 


편집후기 (131)


1편 키르케고르의 <집단은 거짓이다>는 키르케고르 사상의 핵심과 그가 이해하는 신앙의 본질을 체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귀한 텍스트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기 때문에 당연히 집단의 일원이 되고, 무엇인가를 ‘집단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인간은 자연스럽게 정치적이거나 사회적인 이념뿐 아니라 종교에 대해서도 집단적으로 생각합니다. 집단으로서의 삶이 인간의 실존일까요? 키르케고르는 이 글을 통해 개인, 단독자로서의 존재가 진정한 실존임을 밝힙니다. 그러면서 집단으로 퇴락해 버리는 신앙을 단독자의 개념으로 회복해 냅니다.


2편 임마누엘 칸트의 단편 저작인 2편의 본래의 제목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이지만, 관용적으로 간단하게 줄여서 <계몽이란 무엇인가>로 약칭해서 사용합니다. <계몽이란 무엇인가>는 1784년 9월 30일에 씌어졌고 <월간 베를린>의 1784년 12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계몽주의가 무엇이며, 계몽주의 핵심이 무엇인지, 그 시대를 살았으며 계몽주의 사상을 대표하는 철학자가 직접 쓴 텍스트이기 때문에 이백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읽히고 연구되는 글입니다. 


이 글이 쓰이기 1년 전, 프로이센 정부에서 공직을 맡기도 한 목사 요한 프리드리히 쬘너가 <월간 베를린>에 <결혼식에서 더이상 성직자를 참여시키지 말자는 제안>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면서,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종교의식을 생략한 세속 결혼식의 폐습을 비판했습니다. 이 기고문에 “계몽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만큼이나 중요함에도 나는 이 질문이 답변된 것을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제기했어요. 이 기고문을 계기로 프로이센에서 계몽논쟁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성과가 바로 칸트의 이 글입니다. 칸트는 여기에서 “사페레 아우데, 과감하게 생각하라”는 계몽의 모토를  밝힙니다.


2500년 전의 시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매혹적인 우주론이 펼쳐지는 파르메니데스의 단편 서사시가 이 책의 3편을 구성합니다. 학자들은 본래 이 서사시가 800개의 행으로 이뤄졌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현재 150개 정도의 시구만 단편으로 남아있습니다. 


파르메니데스 서사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서시, 진리편, 의견편입니다. 서시에 해당하는 단편 1은 거의 온전히 전승됐어요. 시인이 여신을 만나러 가는 여정이며 여신은 시인에게 진리의 길과 의견의 길로 구별되는 두 개의 길을 설파합니다. 단편 2에서 단편 8 의 ‘내 신실한 말과 생각을 멈추노라’까지가 진리편입니다. 여신은 시인에게 있음과 없음의 초월적이며 충만한 존재의 비경을 펼쳐놓으면서, “생각되는 것은 있으며/ 있는 것이 생각되나니/ 그것은 모두 같은 것이니”라고 선언합니다. 그다음은 ‘진리와 비슷한 거짓’에 관한 필멸자의 의견이 조각조각 펼쳐집니다. 2500년 전 형이상학의 창안자는 우주를 누구보다 섬세하게 바라본 탁월한 관찰력의 소유자였어요.




2. 저자(번역가) 소개



저자 1: 쇠렌 키르케고르(1813~1855). 기록에 의하면 키르케고르는 굉장히 기묘한 외모를 하고 다녔다고 해요. 특히 헤어스타일이 무지막지했다고 하는데, 전승된 초상화가 별로 없어요. 아래의 훈남 드로잉이 키르케고르 할아버지에 관해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이미지입니다.

덴마크 철학자. 크리스천 사상가. 길지 않은 생애 동안 수많은 글을 남기며 신앙으로서의 기독교를 옹호하고 실존주의의 이정표를 세운 사람. 독실하고 부유한 개신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코펜하겐 대학교 신학부에 입학한 후 한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며 기독교에서 멀어졌지만 곧 원래 자기가 있어야 할 곳으로 되돌아왔다. 신앙을 옹호하되 교회를 비판하는 방향으로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켰다. “기독교는 개인이고, 여기에 있는 단독자다.” 키르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1843>, <두려움과 떨림1843>, <철학 단편들1844>, <불안의 개념1844>, <죽음에 이르는 병1849> 등의 저작과 7000쪽이 넘는 일기를 남겼다. “지금 내가 죽는다면 사람들은 나와 화해하고, 나를 인정할 수 있고 또 내가 올바르다는 것을 알 것이다.” (1849년 12월의 일기 중에서) 실제로 키르케고르 사후 그가 인류에 남긴 지혜는 덴마크를 뛰어넘어 여전히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저자 2: 임마누엘 칸트(1724~1804). 편집자가 제일 좋아하는 대철학자 칸트 할아버지를 소개합니다. 칸트 할아버지 초상화는 인터넷에 아주 많아요. 그런데 너무 미남으로 표현한 것은 실제 칸트 얼굴이 아닌 가짜라고 생각해요. 고민 끝에 이 이미지를 선택해 봤어요.

철학자 칸트는 63세에 이르러 집을 소유할 수 있었다. 그때는 이미 결혼 적령기를 한참이나 지난 나이였다. 쉰일곱 살에 첫 번째 위대한 저작 <순수이성비판1781>을 출간했다. 십 년을 넘게 시간강사 생활을 이어가다 마흔여섯 살이 돼서야 자기 고향에 있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철학과 교수가 될 수 있었다. 세상에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드물고 남들보다 성과가 없는 고단한 인생이라면 뒤늦게 빛을 본 칸트의 인생을 떠올려 봄직하다. 평범한 서민의 아들이었으며 젊어서 두각을 나타낸 인물도 아니었고 부와 명예를 위해 활발하게 활동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러나 칸트는 늦은 나이에 빛을 내기 시작한 천재였다. 인류 스스로 과감하게 생각하라는 메시지를 던진 계몽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철학자였다. 또한 그 자신이 인류가 현대의 정신세계로 진입할 수 있는 커다란 출입문이었다. <도덕 형이상학의 기초 1785>,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 비판 1790>,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1795>, <도덕 형이상학1797> 등을 썼다. 


저자 3: 파르메니데스(515~450 BC) 할아버지는 고대의 거인이에요. 수수께끼 같은 대철학자였어요. 형이상학과 논리학의 창시자이자 매혹적인 우주론을 펼쳐낸 분이기도 해요. 이분은 라파엘로의 유명한 그림 <아테네 학당>에서 앞쪽 중앙에서 두 번째로 서 있는 븐이에요.

라파엘로 <아테네의 학당>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로 지금의 이탈리아 남부 엘레아에서 태어났다. 서양철학사에서 최초로 형이상학과 우주론을 설파한 철학자로 여겨진다. 또한 최초의 논리학자라는 견해도 있다. 그는 후대에 서사시 한 편을 남겼다. 원제가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았으나 통상 <자연에 관하여On Nature>로 언급된다.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은 서사시에 쓰인 것처럼, ‘있음은 있음이요 없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며, 존재하는 것은 ‘하나’로 존재하고 그것은 변화할 수 없음을 설파한다. 동시대에 살았던 철학자로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과 대립한다. 존재의 동일성을 강조한다면 파르메니데스요, 존재의 변화를 강조한다면 헤라클레이토스의 가르침을 듣는다. 파르메니데스는 플라톤 사상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고대의 거인이었다.


1편 키르케고르 <집단은 거짓이다>를 서미나 선생님이 번역하셨어요. 나머지는 이소노미아 편집부가 담당했습니다.

서미나 | 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뒤 교육계에 오래 몸담았다. 글밥아카데미를 수료하고 현재 바른번역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책으로 <실패에 대하여>, <컬러의 일>, <사랑은 널 바꾸려 들지 않아> 등이 있다.

3. 책속에서


조금만 소개할게요. 

제1편 <집단은 거짓이다>에서는:


(22/23쪽) 집단은, 이것이냐 저것이냐가 아니라, 지금 살아있는 것이냐 오래 전에 죽은 것이냐, 낮은 자들의 무리냐 귀한 자들의 무리냐, 부자냐 가난한 자냐 등이 아니라, 바로 그 개념에서, 거짓입니다. 집단은 단독자로 하여금 온전히 회개하지 않게 하고 무책임하게 만듭니다. 아니면 단독자의 책임을 무리의 일부로 나눔으로써 약화시킵니다. 주목하십시오. 가이우스 마리우스에게 감히 손댈 수 있는 군인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집단을 자각하거나 집단적인 것을 생각한 서너 명의 여성이 있고, 누가 그런 행동을 했는지,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사람들이 알아낼 수 없다는 가능성이 확실하게 주어진다면, 그때 그 여성들은 용기를 내서 그를 해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진리와 동떨어져 있는 것인지요! 


(28/29쪽) 집단을 사로잡기 위해서 그렇게 대단한 속임수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약간의 재주와 소량의 거짓과 인간의 격정적인 감정에 관한 조금의 지식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진리의 증인 중 아무도 — 아, 여러분과 나, 우리 모두가 진리의 증인이 되어야 할 텐데 — 감히 집단과 상대하려 하지 않습니다.


(33쪽) 진리의 전달자는 오직 단독자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단독자에게 스스로를 내보입니다. 이런 인생관에 따르면 단독자가 바로 진리입니다.


(35쪽) 하지만 나는 성경에서 <너희는 집단을 사랑하라>는 계율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하물며 종교윤리적으로, <집단을 진리의 최후 법정으로 승인하라>는 계율은 더더욱 읽은 적이 없습니다.


제2편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는:


(46쪽) 계몽은 인간이 자처한 미성숙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미성숙이란 타인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입니다. 이런 미성숙의 원인이 지성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타인이 가리켜 주지 않으면 결심도 용기도 내지 못하기 때문이라면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사페레 아우데! 과감하게 생각하라! 이것이 계몽의 모토입니다.


(50쪽) 계몽에 필요한 것은 자유 말고는 없습니다.


(59쪽) 어느 한 사람이 자신의 계몽을 미룰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잠시 동안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에 관하여든 아니면 자기 후손들에 관하여든 계몽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은 신성한 인간의 권리를 짓밟고 해치는 일입니다. 


(67쪽) 마침내 인간을 기계보다 나은 존재로서 존엄성에 맞게 대하는 것이 유익함을 발견한 정부 체제의 원리로 화답할 것입니다.


제3편 <자연에 관한 서사시>에서는... 

사실 이 번역이 매우 희귀본이거든요. 파르메니데스의 서사시 번역본을 구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구천 원에 이걸 입수할 수 있다는 겁니다!! 2500년 전 고대 그리스 대철학자의 서사시입니다.


(83쪽) 

생각되는 것은 있으며 

있는 것이 생각되나니 

그것은 모두 같은 것이니


(97/98쪽) 

다른 한 길은 있음의 길이니 

진실된 길 

어찌 있음이 소멸하겠는가

어찌 없음이 생겨나겠는가 

없음이 생겨난다면 없음이 아니요

앞으로도 생겨나지 않을 것임이니 

창조는 절멸돼 있고 

파괴는 들리지 않고

나뉨이 없도다 

모두 동일하므로 

있음은 함께 하나이나니 

어느 곳에서도 더하지 않노라

있음은 충만하나니 

어느 곳에서도 덜하지 않노라 

그러므로 모든 것이 연속되니라

있음은 있음에 다가가되 

거대한 결속으로 제한되나니 

움직임이 없노라 

있음은 시작도 없고 중단도 없구나 

탄생과 소멸은 저 멀리 

참된 믿음이 쫓아냈으므로

동일함 안에 동일한 채로 

스스로 있으므로 

그곳에서 있음은 움직이지 않노라 

굳센 필연성 때문이로다 

있음은 저 제한하는 결속 안에 있으며 

사방으로 구속되는 것 

한계가 없는 있음은 합법이 아니로다 

있음은 모자람이 없나니 

모자라다면 모든 게 부족하지 않겠느냐 

저 동일한 것은 생각하는 것 

그러므로 생각이 있노라 

나타난 것 안에는 있음 아닌 것이 없으므로 

너는 이런 생각을 품겠느냐 

있음에서 분리되어 없음이 있다거나

없음이 있을 것이라거나 

허나 운명의 여신이 있음을 속박했도다 


(117쪽) 

태양의 빛줄기들을 항상 바라보는구나




4. 출판사 서평

이 책 <철학단편선, 생각하는 사람들을 빛나게 도와주는 할아버지들>에 대해 편집자가 독자에게 전하는 생각을 글로 정리해 봤어요. 매번 책을 펴낼 때마다 항상 고민하는 게 바로 이 부분이에요. 편집자들의 사적인 생각이 공적으로 표현되는 거니까, 편집하면서 읽고 또 읽고, 이해하고 또 이해한 생각이기도 하고, 또 이 책을 펴내게 된 기획의도이기도 합니다.


읽고 싶어도 구하기 어려운 텍스트들이 있다. 분량이 방대해서 미처 우리말로 번역되지 못한 경우도 있지만, 그 반대로 인류의 지성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저작임에도 분량이 너무 적어서 한 권의 책으로 편찬되지 못하기도 한다. 이 책은 ‘종교’와 ‘생각’이라는 두 단어를 열쇳말로 세 편의 철학 단편을 하나로 엮었다. 키르케고르의 <집단은 거짓이다>, 임마누엘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 파르메니데스의 <자연에 관한 서사시>가 자연스러운 우리말의 옷을 입고 세상에 나왔다. 각 단편은 분량이 매우 적다. 그러나 그 의미는 유별나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집단은 거짓이다>는 실존주의 철학의 개척자이자 기독교 사상가인 키르케고르의 사상과 문장과 신앙심이 담겨있다. 사상은 독특하고, 문장은 탁월하며, 신앙심은 독실하다. 이 책의 빛나는 장점은 ‘단독자’ 개념을 독자에게 선물한다는 점이다. 키르케고르 자신도 ‘세속적인 목적’에 관해서는 집단이 타당성이 있고 결정적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것이 민주주의 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이 진리인지에 관해서는 집단은 거짓이며 거짓일 수밖에 없음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집단은 회개하지 않는다. 집단은 비겁하다. 집단은 생명을 차별한다. 집단은 허위다. 키르케고르는 이 단편을 통해 진리의 전달자는 집단이 아니라 오직 단독자임을 밝힌다. 단독자가 진리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단독자가 될 수 있다. 또한 단독자여야만 신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러나 진리는 거짓만큼 발이 빠르지 않으며 거짓은 진리보다 맛있게 준비되어 있으니, 단독자가 되는 길은 쉽지 않다.  지식, 교육, 규율, 절제, 자기 부정, 자신을 향한 정직한 염려가 필요하다. 결국 집단에 자기를 맡기지 말고 진리를 위해 생각해야 한다.


과감하게 생각하라. 다시 말하면 용기를 내서 스스로 알려고 하라, 이것이 계몽의 모토이다. 우리 인간은 과감하게 생각해야만 미성숙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임마누엘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쓰인 표현이다. 이만큼 계몽주의의 핵심을 설명하는 저작이 있을까? 스스로 과감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집단에 종속되고 거짓에 현혹되며 나쁜 선동에 휩쓸리고 만다. 18세기, 19세기의 계몽주의 시대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를 향한 여전한 충고다. 그렇기 때문에 칸트의 이 단편이 지금도 읽힌다. 칸트에게 생각은 곧 표현의 자유와 연결되기 때문에, “계몽에 필요한 것은 자유 말고는 없습니다”라는 명제가 제시된다.  하지만 무제한적인 자유는 아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지식인으로서 자기 이성을 공적으로 사용하는 자유는 무제한 허용되어야 하지만, 자기 이성을 사적으로 사용한다면 자유가 제한될 수 있음을 논증한다. 인간의 미성숙은 타인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이며,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바로 계몽이다. 과감하게 생각하라.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에는 어느 고매한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생각되는 것은 있으며 있는 것이 생각되나니 그것은 모두 같은 것이니”라는 시구를 읊었다. 있음은 있고, 없음은 없다는 동어반복을 통해 창조도 없고 변화도 없으며 소멸도 없는 진리의 비경을 제시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형이상학과 논리학의 탄생을 열어젖혔고 매혹적이고 황홀한 우주론을 펼친 고대의 거인 파르메니데스다. 파르메니데스의 <자연에 관한 서사시>가 이 책의 3편에 위치해 있다. 파르메니데스는 진리의 길과 진리를 닮은 거짓의 길(의견의 길)을 여신의 목소리로 전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그리스 철학에 관심을 가져도 파르메니데스를 만나면 절망한다. 본디 난해할 뿐더러 흔히 사용하는 우리말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저명한 서사시가 시의 형식으로 우리말로 알맞게 번역되었다. 평범한 독자들에게 선물과 같은 번역이다. 여신이 말씀하신다. 있음에도 | 부재한 것을 지켜보아라 | 머릿속에 흔들림 없이 존재하노라 | 있음으로 한몸이 된 것에서 | 있음을 잘라낼 수 없을 테니 | 우주 모든 곳으로 흩어지겠느냐 | 흩어진 것이 다시 모이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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