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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시재라, 전라도 말은 살아있다 4

물에 비친 찔레꽃

by 코디정

여성들이 모여 장을 담그며 혹은 바느질을 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 하나하나가 그 이야기 속 여성이다. 서남 전라도 서사시 <그라시재라>에는 한국 현대사를 할퀴고 간 아픔이 역사의 한 장면처럼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아름다운 다큐멘터리가 한국의 미학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여기, 시냇물에 앉아 빨래하면서 냇물에 비친 찔레꽃 그림자를 증언하는 여성이 있다. 서남 방언이 아니었다면 이 아름다움을 어떻게 표현해낼 수 있었을까? <그라시재라> 4부 <항꾼에 사세>에 실린 시 한 편을 소개한다. ('항꾼에'라는 말은 '함께'라는 뜻의 서남 방언) 서사시에 수록된 아름다운 서정시.



물에 비친 찔레꽃


나는 꽃 중에 찔레꽃이 질로 좋아라

우리 친정 앞 또랑 너매 찔레 덤불이

오월이먼 꽃이 만발해가꼬

거울가튼 물에 흑하니 비친단 말이요

으치께 이삔가 물 흔들리깜시

빨래허든 손 놓고 앙거서

꽃기림자를 한정없이 보고 있었당께라

그것으로 작문 써서 소학교 때 상도 받었어라


(후략)



조정 시인의 <그라시재라>. 모든 시편이 서남 전라도 방언으로 씌었다. 서남 여성들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동란을 겪으며 자식을, 형제를, 부모를 잃은 여성들이 어떻게 삶을 움켜쥐고 서로 의지하면서 다음 세대를 함께 키워냈을까? 이 책은 그 감동적인 서사를 시로 보여준다. 누군가 한국 문화의 특성을 한(恨)의 문화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여성의 한'이다. 누군가 이 나라에서 페미니즘을 말한다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 여성의 존재를 봐야 한다. 조정의 <그라시재라>는 한국 여성의 존재 방식을 지역언어로 보여준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시간을 통과해 낸 여성들이 이웃을 따뜻하게 굽어본다.



입체 인스타6.jpg


책은 곧 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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