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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Mar 28. 2018

에세이8_남자론

남자론

아들이 커서 육체를 뽐낼 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남자는 진화한다. 이제 늙기 시작한 중년 남자에게도 한 문장이 허락된다면 이것이다. 남자는 여전히 진화한다. 남자는 근육이 아니며 고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남자는 진화한다. 생물 집단의 진화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집단화된 남자만큼이나 빛깔 없는 생물도 드무니까. 단지 한 남자, 그 남자가 빚어내는 진화를 예찬한다. 여자? 여자가 있으면 남자도 윤기가 난다. 하지만 그 남자 때문에 여자에 그늘이 진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서라도 한 남자의 진화. 


자궁에서 무덤까지 남자는 성장한다. 아침에는 몸으로 성장하고 저녁에는 정신으로 진화한다. 이름을 알리고 마음을 개선한다. 그것이 남자의 진화다. 나는 상점에서 카드 서명을 할 때마다 이름 석자를 또박또박 적는다. 그러면 점원은 내 얼굴을 훔쳐보면서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진화에 실패한 얼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몸은 이미 힘을 잃었고 매일 발뒤꿈치에서 통증이 난다. 며칠 전 아침의 일이었다. 출근 엘리베이터 안에서 지금의 내가 3년 전의 나보다 좀 더 진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하루 내내 기분이 좋았다. 


내 마음과 정신은 어떤 면에서 나아졌을까? 아내와는 많이 싸웠다. 밥을 먹다가 싸웠고 방을 옮기면서 싸웠다. 우리는 서로 별것도 아닌 일에 정성을 다해서 싸웠는데, 나는 아내가 눈물이 많다는 사실이 분했다. 그것은 남자를 억울하게 만든다. 부부싸움을 한 밤에 나는 코를 얕게 골다가 벌떡 일어나서 잠자지 않은 척 한숨 쉬며 뒤척이는 척했다. 자기는 한잠도 잘 수 없었노라고 여자는 다음 날 어필했다. 여자의 기억력은 대단하기도 했다. 전혀 관계없는 것을 끄집어내서 연관시키는 형이상학적 능력에 나는 한탄했다. 만월이 백 번이나 떴다. 아내는 성장했으며 나는 아내에게 순종했다. 이것이 내가 진화한 모습이다. 나는 여자를 모르지만 한 여자는 안다. 인간은 그리 합리적이지 않고 차라리 합리성을 버리는 게 낫다는 사실을 아내한테 배웠다. 내가 갖고 있던 온갖 생각은 어쩌면 내 생각이 아니라 남의 생각이었을지 모른다는 의심도 아내에게서 배웠다. 


아이들은 언제나 어른의 선생이다. 모든 남자는 아이를 직접 양육해야 한다. 모든 아이 돌봄을 남자가 해야 할 것처럼 하기를 권한다. 어차피 일은 나뉜다. 짜증을 내도 좋고 실수해도 좋고 잘 못해도 좋다. 갓난 두 아이를 어린이가 되기까지 키워 보니 인생이 살만해졌다. 여자는 화장실에 갈 때 휴지가 필요하다는 이치를 딸을 키우면서 알았다. 이것은 좋은 정보다. 요즘 아이들은 뛰놀 곳이 부족하다며 어른들은 한탄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이에게 부족한 것은 놀이가 아니라 환상이다. 나는 아이의 환상을 수락한다. 그러면 아이에게서 날개가 생긴다. 환상을 들려주면 아이는 꿈을 꾼다. 인간은 이처럼 엉터리며 그러므로 풍성하다. 나는 이제 사람들을 고정된 관점에서 보지 않는다. 남자는 아이를 키우면서 진정한 어른이 된다. 이런 줄도 모른 채 죽어간 숱한 남자 조상은 얼마나 억울할까. 


남자에게는 환상이 필요하다. 기왕이면 연약한 꿈을 권한다. 너무 튼튼한 꿈을 쥐고 있으면 고난을 겪을 때마다 멍이 들고 망가지기 십상이다. 여린 꿈이란 언제든지 체념하고 또다시 깃드는 꿈이다. 우리 인생은 좌절을 피할 수 없다. 논리와 과학과 합리와 온갖 지식은 남자를 강하게 한다. 하지만 고집과 편견과 우월감을 낳기도 한다. 나는 남자에게 꿈을 권한다. 가장 밑바닥에서조차 우리 인간은 꿈만 있다면 능히 살 수 있다. 실패할 때마다 그 실패에 순종해서 꿈을 체념하고 다시 새로운 꿈을 취한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꿈에도 퇴적층이 생긴다. 그 퇴적층이 많다면 그 남자는 진화하고 있는 사람이다. 불현듯 생각난 옛 꿈이 이미 이루어져 있을 때가 있다. 


나는 지금껏 아주 많은 남자를 만났다. 스스로 개선하려는 남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고집이 셌다. 십 년, 이십 년 전 그대로의 남자라면 얼마나 슬픈 일이냐. 나는 당신에게 탈주를 권한다. 어제의 남자로부터의 탈주.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 것 같은 남자에서 여린 꿈을 꾸는 남자로. 


(월간에세이 2015-09호에 연재했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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