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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Mar 29. 2018

편지10_자유론

역사해석을 독점하려는 사람들에게


(2014년에 <제국의위안부>라는 책을 읽고 서평을 기록했던 글입니다. 욕설과 저주가 난무했던 책이었지만, 저는 역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채찍 같은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일곱 차례의 서평을 통해 이 책을 변론했지요. 이곳 브런치에 옮겨봅니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절실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이 글을 마지막으로 <제국의위안부>에 관한 서평의 막을 내립니다. 일곱 번째 연재이자 마지막은 침묵으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아래의 문장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19세기의 현인 J.S.밀의 것입니다. 이 목소리는 J.S. 밀의 1859년 저작 <자유론 On Liberty>에 있는 문장에서 나옵니다. 모두 밀의 목소리이며, 나는 그저 그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겨 적을 뿐입니다. 펭귄클래식 코리아의 <자유론>에서 옮겼습니다.

150년 전의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21세기의 우리 사회의 정신세계가 19세기의 영국 사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느낍니다. 부끄러움은 사람을 뜨겁게 합니다. 이것은 패배감과 르상티망과 정신승리의 뜨거움과는 거리가 멉니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조용히 주먹을 쥐는 뜨거움입니다. 반성적 사유가 없다면 역사적 부끄러움을 자학 사관으로 치부하고 맙니다. 부끄러움은 송두리째 부끄러움이며, 그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에 소속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지금이 구한말입니다.


1859년의 존 스튜어트 밀이

2014년의 한국 여론재판의 원고들에게:


여론의 힘과 심지어 입법의 힘까지 빌려서 개인에 대한 사회의 권력을 부당하게 확대하려는 경향 역시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87). 인간이란 자신이 정말 중시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용을 보이지 않는 것이 워낙 자연스러운 일입니다(79). 다수의 감정이 여전히 순수하고 강렬한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에 복종하라는 요구가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79). 그러나 인간의 정신이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진리를 위해 의견의 다양성이 필요합니다(142).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인류가 한 가지 의견이라 하더라도, 인류가 이 한 사람을 침묵시키는 것이 부당한 것은, 이 한 사람이 권력을 가질 때 그가 인류를 침묵시키는 것이 부당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의견의 표현을 침묵시키는 것은 특별한 해악을 낳으니, 그것은 현세대의 인류는 물론 차세대의 인류를 강탈하는 셈이라는 것입니다. 그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들보다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그렇습니다. 그 의견이 옳다면, 인류는 오류를 진리와 바꿀 기회를 박탈당하는 셈입니다. 그 의견이 틀리다면, 인류는 거의 이에 못지않게 큰 혜택을, 곧 오류와의 충돌에 의해 창조되는, 진리에 대한 더 분명한 지각과 더 선명한 인상을 잃는 셈입니다(92). 토론이 부재할 때에는 의견의 근거들만 잊히는 것이 아니라 의견의 의미 자체도 너무 자주 잊히기 때문입니다(124).


개인적 경험을 통해 절실히 느끼기 전에는 그 완전한 의미를 깨달을 수 없는 진리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진리의 경우에도 그 사람이 그 진리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들에 의해 찬반 논쟁되는 것을 자주 들었다면, 그 의미가 훨씬 더 많이 이해되었을 것이며, 이해된 것은 정신에 훨씬 더 깊이 새겨졌을 것입니다. 어떤 것이 더 이상 의심스럽지 않게 될 때 그것에 대해 그만 생각하는 인류의 치명적인 경향은 인류가 저지르는 오류 중 절반을 차지하는 원인입니다(130).


가공할 만한 해악은 진리의 여러 부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갈등이 아니라 진리의 절반에 대한 조용한 탄압입니다. 사람들이 양편에 다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을 때에는 항상 희망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오직 한편에만 유의할 때, 오류는 편견으로 굳어지며, 진리 자체는 허위화됨으로써 더 이상 진리의 효과를 내지 못합니다(144).


그러므로 진리의 한 부분이 전체라고 배타적으로 자처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저항해야 합니다. 그에 대응하려는 충동 속에서 오히려 이번에는 저항 세력이 부당하게 행동한다면, 이 일면성은 다른 일면성처럼 한탄스로운 것이기는 해도 반드시 관용되어야 합니다. 예컨대 기독교인들이 이교도들에게 기독교에 공정하라고 가르치려면, 그들 자신이 이교에 공정해야 한다는 것과 같습니다(143).


열정에 불을 붙일 만큼 크고 중요한 주제들에 대해 논쟁하기를 회피할 때, 인민의 정신은 그 근저에서부터 결코 자극을 받지 못했으며, 또 가장 평범한 지성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생각하는 존재라는 존엄함을 고양하는 그 어떤 자극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와 같은 지적 자극의 한 예는 종교 개혁 직후의 유럽 상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예는, 비록 대륙과 교양 계층에 국한된 것이기는 했지만, 18세기 후반의 사상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훨씬 더 짧게 지속된 세 번째 예가 괴테와 피히테 시기의 독일에서 일어난 지적 흥분이었습니다. 이 시기들은 각각 상이한 의견들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만, 권위의 굴레가 파괴되었다는 점에서는 모두 똑같습니다(117).


반대자들의 주장을 듣되 그것을 실제로 믿는 사람들로부터, 그것을 열심히 옹호하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는 반대자들의 주장을 가장 일리 있고 가장 설득력 있는 형태로 알아야 합니다. 그는 주제에 대한 참된 견해가 맞서 처리해야 하는 난점의 힘을 전면적으로 느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진리를 피상적으로만 소유할 뿐 진리의 핵심부, 곧 그러한 난점과 맞닥뜨려 그것을 제거하는 부분을 정말 소유하지는 못할 것입니다(121).


모든 의견의 자유로운 표현은 과도하지 않고 공정한 토론의 한계를 넘지 않는다는 조건에서만 허용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145).


흔히 과도한 토론이라고 말하는 것, 즉 독설, 야유, 인신공격 등과 관련해 말하자면, 이러한 무기들에 대한 비난은, 양편 모두에 대해 똑같이 그것들을 금지하자고 제안된다면 더 많은 공감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지배적인 의견에 대해서만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자 할 뿐입니다. 지배적이지 않은 의견에 대해서는 그것들을 사용해도 보통 비난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사용하는 사람은 심지어 정직한 열정과 의로운 분노를 보여 주었다는 칭찬까지 얻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들을 사용하는 데에서 무슨 해악이 일어나든 가장 큰 해악은 그것들이 상대적으로 무방비한 사람들에게 사용할 때 일어납니다. 어떤 의견을 그런 식으로 주장함으로써 무슨 부당한 이익을 끌어내건 그것은 모두 거의 배타적으로 표준적인 의견에만 이익이 됩니다. 한 논객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잘못은 상반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악하고 부도덕한 인간으로 낙인찍는 것입니다(146).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의견과 상반되는 의견은 언어를 신중하게 절제하고 불필요한 모욕을 가장 조심스럽게 회피함으로써만 발언권을 얻을 수 있고, 여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힘을 잃게 되는 반면, 지배적인 의견 쪽에서 사용하는 과도한 매도는 정말 사람들로 하여금 상반되는 의견을 표명하지 못하게 하고, 또 상반되는 의견을 표명하는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지 못하게 합니다. 따라서 진리와 정의를 위해서는, 지배적인 의견이 지배적이지 않은 의견에 대해 매도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147).


자신의 반대자들이 정말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의 의견이 정말 어떤 것인지를 차분하게 바라보고 정직하게 진술하며, 어떤 것도 반대자들에게 불리하게 과장하지 않고, 반대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혹은 그렇게 생각될 수 있는 어떤 것도 감추지 않는 모든 사람에게는, 그가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건, 그에 합당한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이것이 공공 토론의 참된 도덕입니다(148).


우리는 이제 의견의 자유, 의견의 표현의 자유가 네 가지 다른 근거에서 인류의 정신적 복리(인류의 다른 모든 복리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에 필수적임을 인정했으니, 이제 그 네 가지 근거를 간단히 요약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어떤 의견이라도 그것이 강제로 침묵당하면, 그 의견은 아마도 확실히 진리일 것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무류성을 가정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 침묵당한 의견이 오류라 해도, 진리의 일부를 담고 있을 수 있으며, 또 실제로 담고 있는 경우가 아주 흔합니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일반적인 의견 혹은 현재 지배적인 의견이 전적으로 진리인 경우는 아주 드물거나 없기 때문에, 진리의 나머지가 충족될 기회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오직 반대되는 의견들이 서로 충돌할 때밖에 없습니다.

셋째, 표준적인 의견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진리라 할지라도, 그것이 활발하게 열심히 도전받도록 허용되지 않고 또 실제도 도전받지 않는다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것을 어떤 편견처럼 가지게 될 뿐, 그 합리적 근거들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거의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넷째, 그 신조의 의미 자체도 상실되거나 약화되어 성격과 행동에 생생한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 교조는 단순한 형식적 선언이 되는 데 그치고, 선을 위해서는 무력하면서도, 이성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나오는 마음으로부터의 진정한 확신이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것은 방해하고 막을 것입니다(144-145).


우월한 계급이 존재하는 곳마다 그 나라의 도덕의 대부분은 이 우월한 계급의 이익과 우월성의 감정에서 나옵니다. 반면, 이전에 우월했던 계급이 그 우월성을 잃을 경우, 혹은 그 우월성을 잃을 경우, 혹은 그 우월성이 더 이상 존중되지 않을 경우, 지배적인 도덕적 감정은 자주 우월성에 대한 참을 수 없는 혐오의 자국을 담게 됩니다. 완벽하게 순수한 혐오의 감정을 발생시킵니다.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은 마술사와 이단자를 불태워 죽였습니다. 공감과 반감의 결과였습니다(77).


마지막으로, 인간의 오류는 교정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토론과 경험을 통해 자신의 실수를 교정할 수 있습니다. 경험만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경험이 어떻게 해석될 것인지를 보이기 위해서는 토론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97). 자유롭고 대담한 사색을 포기하지 마십시오(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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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호는 해당 문장이 있는 펭귄클래식코리아 판본 페이지 번호입니다. 밑줄 단어는 문장을 자연스럽게 이어주기 위해서 제가 붙였습니다. 한다체는 습니다체로 바꾸었습니다. 어차피 영어에는 이런 구별이 없는 데다가 <자유론> 전체의 내용과 밀의 사유의 태도로 볼 때 습니다체가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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