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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말이 이렇게 시가 되었습니다

서효인 시인의 <그라시재라> 발문

by 코디정

제가 편집한 시집

조정 시인의 <그라시재라>에 수록된 서효인 시인의 발문 전문을 공유합니다.

발문 원고를 처음 받아보고 엄청 감동했던 게 기억납니다.


입체 인스타.jpg


당신의 말이 이렇게 시가 되었습니다


서효인 시인


할머니, 오늘은 이상한 글을 읽었습니다. 아니, 시를 읽었습니다. 아니, 말을 읽었습니다. 아니 그것도 아니고, 그것을 뭐라 할까요. 이야기라고 할까요. 육성이라고 할까요. 그런 걸 읽었습니다. 그런 것을 들었습니다. 서남 방언이라고 합니다. 저도 서남 출신이지요. 목포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자랐으니 전라도에서도 서남쪽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할머니, 할머니도 서남 사람이지요. 진도에서 태어나 무안으로 혼인해 와 목포와 광주 송정에서 살다가 나주에서 가셨으니 서남 사람 맞지요. 서남 사람이었지요.


떠난 사람에게는 이렇게 과거형을 붙이는 게 알맞습니다. 할머니는 지금은 없고, 그때는 있었는데 그때 지금 못한 무언가를 해드릴걸, 하는 늦은 생각은 딱히 알맞지 않습니다. 코로나 시국에 추석 연휴에 할머니는 가시었고, 저는 애들 데리고 막히는 서해안고속도로에서 겨우 휴게소에 들른 참이었어요. 아이 간식으로 핫도그를 사주려 줄을 서 있었는데, 고모에게 전화가 오더라고요. 할머니 가셨다고. 그 말을 듣고 핫도그를 마저 사서 케첩까지 뿌렸습니다 제가. 오래 기다린 줄의 끄트머리였거든요. 와중에 케첩을 둘레둘레 골고루 뿌리고 있는 것이 웃긴지 슬픈지 괴이쩍은지 한탄스러운지 어깨가 들썩거리는데 빵가루를 입에 묻힌 아이가 왜 그러냐고 묻습니다. 우물거리면서, 아니 울면서, 다시 우물거리면서 왕할머니가 갔다고 그랬습니다. 차는 막히고 계속 막히고 끝없이 막히고 경기 북부에서 전라도 서남까지 가는 길은 멀고 또 멀어서 가는 길 내내 겉으로는 우물거리고 안으로는 울어야만 했습니다.


할머니 오늘은 정말 기이한 시집을 읽었다니까요. 코로나 시국에 할머니 요양원 들어가고는 2년을 목소리도 제대로 못 들었는데, 오늘 읽은 책에서 겨우 2년 전이 아니고 20년 전, 아니 30년 전 할머니 목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왕할머니가 여럿 나오는 책이었는데, 이게 시가 됩니다. 월출산 아래 한동네 사는 사람들이 그저 하는 말인데 이게 시가 됩니다. 죽음보다 깊은 비극을 겪고, 삶보다 넓은 희극을 사는 이들의 옛날이야기인데 그것들이 모두 시가 됩니다. 그렇다면 예닐곱 살 때 할머니랑 같이 살던 적에 들었던 당신 말도 모두 시였을까요. 생각해보니 할머니 영암에서 나는 무화과를 좋아했었던가, 아닌가 어린 내가 좋아했었나, 할머니가 맨손으로 영암에서 온 무화과 껍질을 까주면 넙죽넙죽 낼름낼름 잘 받아먹었는데, 오늘 만난 할머니들이 영암의 왕할머니들이에요. 할머니들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 할머니 이야기도 시가 아니기는 어렵겠다 싶었지요. 이게 시가 되더라고요. 서남 방언이. 할머니 말이. 내가 잊어버린 잃어버린 그 말들이 모두 다 그럽디다. 죽은 줄 알았던 말들이 지금껏 다 살아서는 모조리 시가 되었더라고요. <그라시재라> 이야기입니다.


할무니 그란디 왜 달은 안 늘그고 계속 그때랑 지금이랑 똑 같어요?
금메마다 달은 안 늘근디 어찌 사람은 이라고 못쓰게 되끄나이
할무니 못 쓰게 안 되얐어요 달 같이 이뻐요 참말로요


<그라시재라>에는 달처럼 예쁜 사람들이 나옵니다. 시에서는 주로 ‘무슨 무슨 떡’이라고 불려요. 떡은 댁으로 바꿔 부르면 됩니다. 공산떡은 공산댁으로, 화순떡은 화순댁으로, 월산떡은 월산댁인 것이지요. 댁은 지역을 뜻하는 명사 뒤에 붙어 지금의 고장으로 시집온 여성의 명칭으로 부릅니다. 이름 대신 고향이 명칭이 되는 셈인데, 할머니는 아마 진도떡으로 불렸을 듯합니다. 대체로 서남 여느 고장으로 불리는 이들이 대부분이지만 멀게는 보성이나 전주도 있었던 듯합니다.


<그라시재라>는 이름 대신 지명으로 불리거나 그도 아닌 성용네처럼 아들의 이름으로 대신 불리는 이들이 화자입니다. 말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지요. 이 책에 실린 시에서만큼은 말하는 자가 곧 시인이고, 말하는 자가 종래 주인공입니다. 삶에서의 화자가 곧 시적 화자가 되는데, 시인은 말하는 자를 관찰하고 묘사하는 대신 그들의 말을 대신 받아씁니다. 많은 ‘떡’들이 시인의 몸을 통과해간 듯, 아니 시인이 그들의 몸에 든 듯 말들이 폭발하는 것이지요. 폭발하는 말들이 만들어내는 여러 폭의 그림이기도 합니다. 받아쓴 말들이 만드는 카니발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시인이 그들을 예뻐하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라시재라>의 떡들은 육이오전쟁을 겪고 양민학살을 목도하고 거기서 살붙이를 잃기도 하고, 제 목숨 겨우 건지기도 한 사람들이고, 따지자면 할머니의 어머니나 큰고모나 작은할머니뻘인데요. 그들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을라나요. 할머니는 언제나 할머니인 것만 같은데. 제게도 할머니는 그랬습니다. 내가 태어나 할머니가 된 것이겠지만은, 할머니는 할머니가 아닌 시절이 없을 것만 같았다니까요. <달 같은 할머니>가 시집의 처음에 온 것은 참으로 절묘하지요. 아이가 묻습니다. 할머니 어렸을 때에도 달이 지금처럼 컸느냐고. 할머니에게도 아버지가 있느냐고. 할머니도 나랑 똑같았느냐고. 당연히 할머니에게도 아버지가 있습니다. 할머니에게도 손녀처럼 열 살, 열한 살 시절이 있었겠지요. 살도 희고 탄탄했을 것입니다. 달은 여전한데 소녀는 할머니가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되는 동안 별의별 일을 다 겪었겠지요. 어린 손자에게 그런 희비를 모두 말해줄 수는 없을 터, 할머니는 당신더러 못 쓰게 되어버렸다고 말합니다.


손녀의 대답은 꼭 조정 시인의 대답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할머니는 못 쓰게 안 되었다고요. 달 같이 이쁘다고요. <그라시재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통, 할머니 예쁘다는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닌 참말임을 증명하는 과정이 됩니다. 별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를 찾아 옛일을 회상하고 오늘날을 추렴하고 내일을 낙관하는 그들을 예쁘다고 하지 않으면 무엇이 예쁠까요. 그들은 서로가 긴밀하게 알아듣는 말투의 공동체로 엮이었고, 그 이유로 그들은 현대사의 굴곡을 함께 겪고 내 이웃의 사연과 사정에 귀 기울입니다. 곁의 사람의 말을 다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라시재라. 그러믄요, 그럴밖에요, 하는 뜻이지만, 꼭 그라시재라 하고 발음해야 통하는 그 말.


그랑께 성님 내가 죽어도 낯 들고 그 애기를 못 만낼 거시요 엄니 총소리 탕 나먼 나 한 번만 돌아봐주소 소리가 인자는 총소리보다 더 무서와라 성님 그라고도 내가 이 목구녀게 밥 밀어 넣고 사요


이 비극을 감히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무고한 주민이 살해되었다. 마을 사람이 학살되었다. 이곳이 양민학살의 현장이다. 피해자 숫자를 헤아리기 어렵게 많다. 현대사의 참혹한 현장이다…… 이와 같은 문장이 그들의 비극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단언컨대 없습니다. 무미건조한 문장으로 담기에는 사태가 개인마다 다른 모양의 상처를 남깁니다. 각자 다른 소리의 울음이 가슴속에 남고 각자 다른 장면의 필름이 머릿속에 각인됩니다.


숱하게 많은 젊은이가 좌익으로 몰려 참변을 당했고, 한마을에 살던 사람들이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어 죽고 죽였고, 무심코 행한 일이나 작은 선의가 죽어 마땅한 혐의가 되었습니다. 월출산 아래의 작은 마을도 비극의 폭풍을 피하지는 못했고, 누구는 죽은 동생의 찢긴 살과 내장을 수습해야 했고, 누구는 죽어가는 딸아이의 마지막 모습을 공포에 겨워 보지 못했습니다. 누구는 바람만 불면 어린 나이에 왜 죽었는지 모르고 죽은 아들이 생각나고 누구는 백일도 되기 전에 잃어버린 아이가 생각나고 누구는 천운으로 목숨을 건진 묘한 우연을 떠올립니다.


모두 다른 목소리가 한데 모여 거대한 합창이 됩니다. 이 합창은 가슴을 찢으며 부르는 장송곡입니다. 낮은 소리로 길게 읊조리는 곡소리이기도 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힙합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사연을 당신이 직접 부르는 노래는 목소리에 힘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를 당사자성이란 말로 대체하기도 합니다. 전라도 서남쪽의 비극은 서남쪽의 말로 비로소 당사자성을 획득합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의 시간을 통과해낸 사람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목구멍에 밥을 넣는 게 요사스럽게 느껴지고, 집에는 꼭 숨을 공간이 있어야 한다 여깁니다. <그라시재라>는 그렇게 살아남은 자들의 노래이자 울음이 됩니다. 울지 말라 서로를 다독이는 묵직한 응원이기도 합니다.


2부의 시 중에 보기 드물에 목숨을 부지한 사연이 있습니다. 그는 소학교 선생이었지요. 선생이 부족하니 급사가 1학년 담임도 맡았던 모양입니다. 그 급사 이름이 송자고요. 졸업식 때 사진을 찍으려 송자가 나오니 동료들이 급사가 졸업식에 낀다고 비아냥댔다고 하네요. 그가 대차게 나서 아이들 가르쳤으면 선생이지 누가 선생이냐 바른 소리를 했답니다. 그 송자가 난리 통에 실력자의 아내가 되어, 그를 구해준 것이지요. 어떤 선의는 또 다른 선의로 돌아오기도 할 겁니다. 그러기 어려웠던 시절에도, 선함을 향한 의지는 그들에게 분명했을 테니까요. 선한 의지의 당사자 또한 그들이었던 것입니다.


아니여 못 간다고 했당께 서울이 으디라고 내가 거그를 가 천지에 아는 사램 한나 없는 디서 머슬 보라꼬 살것능가 오메오메 농사짓기 심 안 들어야 나는 나 살든 디서 살란다 그랬네


할머니는 글을 몰랐지요. 초등학생이던 저에게 글을 가르쳐달라 했던 날이 생각납니다. 제가 무얼 가르칠 수 있었겠어요. 글 조금 안다고 할머니 앞에서 무장 까불어대기만 했지요. 늦기 전에 노인 학교 같은 데를 찾아 모셨어야 했는데, 그도 후회됩니다. <그라시재라>에도 뒤늦게 글을 배우는 할머니가 나옵니다. 선생님께 닭이라는 글자를 쓰는 법을 배워 닭을 닥으로 알고 있는 친구에게 귀여운 유세를 부리지요. 그런데 닭이라는 글자를 써먹을 데가 없습니다. 고민하다 하나 생각한 것이 닭장에 문패를 달아주는 것이죠. 그렇게 공산댁네 닭은 문패를 달 만큼 동네에서 출세한 닭이 되어버립니다.


그들이 글만 익히는 게 아니지요. 세상은 점점 변하고 있습니다. 월출네 며느리가 딸아이를 낳았다고 해요. 며느리가 시아버지에게 부탁합니다. 장날에 읍내에 가서 아이 이름을 받아달라고 말이죠. 월출네가 딱 잡아 쏩니다. 무슨 여자애 이름을 돈까지 남에게 쥐여주면서 정하냐고 말이죠. 할머니도 그랬잖아요. 동생이 말하길 할머니는 항상 저인 장남 위주였다고 해요. 동생은 1980년대에 태어난 여자애인데도 그랬으니, 그 시절은 오죽했겠나요. 며느리가 월출네 반응에 속이 상해 토라졌는데 그걸 하소연하는 월출네를 다른 이들이 타박합니다. 딸이라고 이름 우습게 짓지 말라고요.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해줍니다. 어느 영감님네에서 첫째 딸은 살림 밑천이니 제일이, 둘째는 연속으로 딸이라고 열이, 셋째가 또 달이라 묘해서 묘삼이, 넷째도 딸이라 아뿔싸 또 딸이야 하며 아사, 다섯째가 또 딸이라 다섯 번 괴이해서 괴오, 여섯째는 분해서 분육이, 일곱째는 이제 망조라고 망칠, 여덟째는 이제 웃음만 나온다고 소팔……. 우스운 이야기로 한바탕 웃고 나서는 이제 딸이라고 함부로 이름 지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다행히 내립니다. 그 시절에 한참 앞서간 할머니들입니다.


예쁜 신식 할머니들은 이제 영화도 봅니다. 칠십 리 바깥에서도 보일 만큼 화면이 크다고 해서 칠십리 시네마라고 한다네요. 공회당에서 하는 영화에는 눈물 나는 스토리도 있고, 스펙타클한 전쟁 장면도 나오고, 잘생기고 아름다운 배우도 등장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별수일까요. 이들의 삶이 한 편의 영화이기도 하고, 영화보다 진득한 시가 되는데요. 쇠퇴한 양반집으로 전답을 들고 시집왔지만, 영화를 상영하고 반상의 구분이 없어진 날까지 눈치를 보는 삶이 있습니다. 동네에 누구는 도지사가 되어 나타난 배다른 형제를 첩의 자식이라고 하여 알은체도 안 한다고 합니다. 이제 여자도 배워야 한다며 딸을 전주로 유학을 보내기도 합니다. 가랍집에 주저앉은 영화 하는 총각이 만든 이야기보다도 더 실한 이야기가 <그라시재라>에는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무엇보다 재미있습니다. 코끝이 찡하기도 하거니와 가끔은 웃음보가 터집니다. 그래서 그들도 거기, 월출산 아래에 사는 게 좋았겠죠. 이렇게 말한 걸 보니 확실합니다. “그래도 나는 사는 것이 좋네”, “아먼 잘 살아사재 죽어블먼 어짜도 저짜도 못한디 그 고비 냉겠응께 존 시상도 봐사재”


*****


<그라시재라>를 따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향 말을 꽤 진득하게 쓰고 있기도 합니다. 사투리를 대체로 잊은 줄 알았는데, 몸속 어딘가를 떠돌고 있던 모양이지요. 기침처럼 나도 모르게 나오고, 기억처럼 꽤 오래 떠나지 않습니다. 이 말을 제가 누구에게 배운 걸까요. 그야 물론 할머니입니다. 할머니 손에서 유년을 보냈으니 제 몸 깊숙한 전라도 서남쪽 말의 원형은 당신의 것이겠지요. 조정 시인은 <그라시재라>의 언어를 속에서 들리는 대로 썼다고 합니다. 몸속의 언어를 끄집어낸 작업은 때로는 토악질처럼 고약하고 때로는 사자후처럼 시원했을 듯합니다. 시인은 그 괴로움과 후련함에 줄 하나를 달고 실로 팽팽하게 당겼습니다. 그것을 언어의 힘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힘이 있는 언어는 곧 시가 됩니다. 그래서 <그라시재라>의 사투리는 사투리가 아닙니다. 시입니다.


할머니, 이제 와 하등 쓸모없는 말이지만, 할머니의 말을 조금이라도 들을 수 있다면 그걸 시로 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많이 늦었습니다. 늦었지만 그래도 다행입니다. 조정 시인이 <그라시재라>에서 시로 이미 썼으니 말이지요. <그라시재라>의 발문을 감히 맡은 핑계로 할머니께 시집을 소개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할머니의 말을 시로 옮기는 데에는 늦었으나, 대신 편지라도 썼으니 이 또한 다행입니다. 다행의 연속이라니 행운이 많습니다. 전라도 서남에서 태어난 것도 행운이고 할머니의 손자인 것도 행운이고 <그라시재라>의 말을 어렴풋이 알아듣는 것도 행운입니다. 그리하여 더욱 다행입니다.


전라도 말로 발문을 쓰진 못했습니다. 서울에 와 듣는 전라도 말은 듣기 무척 고약합니다. 거의 엉터리일 뿐더러 지역과 계급을 나누고 차별하는 용도로 쓰이는 게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서울에 와 직장을 다니며 제 말을 버리려 애썼습니다. 딸꾹질 같은 억양이야 숨길 수 없더라도, 내처 물을 마시며 다스리는 딸꾹질처럼 그마저 없애려 했습니다. 이 글도 그렇게 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없어지는 말은 없어지는 대로 두고, 단일하고 거대한 말의 세계로 진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라시재라>는 꼭 그러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네가 왜 그러는지 안다고도 말합니다. 등허리를 토닥여줍니다. 그래서 <그라시재라>는 다정한 할머니 같습니다. 둥그런 달 같습니다. 예쁜 사람들과 같습니다. 고향 같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나고 웃음이 납니다. 그 말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이 살아 있어 저도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긍께요 함마니, 거그서 솔하니 지내지라? 나는 인자 밸적시런 일 업신께 걱정 말랑께요. 어딘지 가찹지는 않을 거지만 할아씨랑 이약이약 계시면 난중에라도 뵐 날이 있겄지라. 그라시재라. 암만 그라재요.


전라도 서남에서 살다 가신, 할머니께.

경기도 파주에서 손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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