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 전라도 서사시
저자 인터뷰를 준비 중이었으나, 사정 때문에 조금 연기합니다.
<그라시재라>를 소개하면서 조정 시인을 취재한 광주일보 기사를 소개합니다.
www.kwangju.co.kr/article.php?aid=1656328200740379007&search=%B1%D7%B6%F3%BD%C3%C0%E7%B6%F3
편집자가 묻고 편집자가 답하는 인터뷰는 어떨까요?
코디정: 디자이너 님의 솜씨 덕분이죠. 원래는 제가 혼자 표지까지 디자인을 다 하려고 했어요. 지금껏 이소노미아에서 발행한 책 7권을 연이어 제가 디자인했거든요. 그런데 이 책은 아무래도 제가 해서는 안 될 것 같았어요. 격이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책에 멋진 옷을 입히고 싶었어요. 제가 시장에 팔 옷은 그럭저럭 만들어요. 하지만 런웨이에 어울리는 옷은 못 만듭니다. 다행히 출간까지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어요. 그때 김선미 북디자이너에게 의뢰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했고요. 제가 디자이너 세계에 대해 그다지 견문이 넓지는 않습니다만, 지금껏(또 앞으로도) 공동작업을 한 디자이너 중에서 가장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는 디자이너가 바로 그분이거든요. 머릿속에서 구상하는 것을 디자인으로 구현할 수 있는 북디자이너입니다. 이분이 저희와 작업한 책 세 권은 이러합니다. 실제로 보면 더 멋집니다. 편집자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한 다음 독자가 감탄하는 책을 만들어 냅니다.
북디자인이라는 게 기다리기만 하면 짠 하고 나오는 건 아니고요. 편집자와 북디자이너가 정성껏 소통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아무리 탁월한 디자이너라고 해도 처음 시안 작업의 경우 편집자가 정의하고 있는 책의 느낌과 많이 다를 수 있거든요. 그걸 고쳐나가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제가 경험한 김선미 북디자이너의 특징은 첫 시안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디자이너에게 첫 시안은 버리는 카드였어요. 제 반응이 관찰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편집자가 시안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주시하는 게 그분의 디자인 방식 같아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편집자의 바람을 제대로 파악한 다음 최종안을 제시합니다. 그 최종안에 저는 항상 감탄했고요. 이 글을 읽은 후 이분에게 북디자인을 의뢰하시고자 한다면 stedy5655@naver.com. 인스타계정은 @haruhana5655.
코디정: 편집에 관해서는 자신이 있었어요. 제가 편집을 잘하기 때문이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가 거의 끝난 상태였거든요. 편집하기 전에 시편들을 몇 번이고 읽어보는데, 등단시인은 달라도 다르구나, 괜히 나이를 먹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저는 그저, 이 책을 어떻게 하면 빛나게 할 수 있을까만 숙고하면 됩니다. 시편들의 배치와 장의 구별과 한 권의 책으로서의 전체적인 윤곽을 생각해 보고, 제 의견을 저자에게 밝혔어요. 저자도 편집자의 생각을 많이도 경청해 주셨고요. 작업하는 내내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보람의 연속이었어요. 어떻게 하면 책을 빛낼 것만을 생각하니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편집 외의 것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거절했어요. 아무래도 내가 이런 작업을 하는 건 분에 맞지 않는다고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 시인에게 이롭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 시문학은 매우 여린 문학입니다. 한 권 한 권의 시집은 잘 읽히지도 잘 팔리지도 않아요. 서책으로서 힘이 없어요. 그래서 시집 한 권 한 권이 서로 의지하면서 작은 힘을 모아 문학세계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창비, 문학과지성사, 문학동네, 민음사 등의 대형출판사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시문학의 생태계는 과거에도 시집을 만들었고 지금도 펴내며 앞으로도 만들어갈 출판사가 좌우하고 있는 셈이지요. 저희는 달랑 이 책 한 권입니다. 힘을 보태줄 다른 시집이 없습니다. 이소노미아 출판사는 무급 사장과 무급 편집장이 일하는 작고 영세한 출판사거든요. 그저 희망을 좇아 책을 만드는데 저희가 시집에 힘을 보태기는커녕 시집이 저희에게 힘을 나눠줘야 하는 상황이라고 보면.... 죄송스럽고 지금도 걱정이에요.
코디정: 글쎄요. 책으로서의 완성도는 51% 정도라고 생각해요. 여전히 불안해요. 오탈자는 없는지, 내가 또 무슨 중대한 실수를 한 것은 없는지 등등 편집자라면 누구나 지니는 숙명적인 근심이 있습니다. 독자를 위해 책 뒤에 편집후기며, 서남방언사전을 붙이기도 했는데, 그걸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도 들고요.
서남방언사전에는 500개 이상의 전라도 사투리가 예문과 함께 실려 있어요. 하지만 성실함을 더 발휘해서 700개 이상 혹은 1000개 이상 수록할 수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이 시집에는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보다 훨씬 많은 전라남도 방언이 수록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그걸 서남방언사전에 모두 싣지는 못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서울놈인 저는... 사투리를 아느냐 모르냐의 문제는, 발음과 억양의 문제가 아니라, 어휘 자체의 문제였다는 걸... 몰랐어요. 이 정도로 어휘가 다를지는 상상도 못했거든요. 공부하고 이해하는 데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썼습니다. 그 바람에 더 잘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한 기분이 들어요. 언젠가 개정판을 낼 기회가 있다면 80% 이상, 90% 이상 편집자가 만족하는 책으로 더 개선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개정판을 내는 것은 편집자의 의욕만으로는 택도 없는 얘기거든요. 독자들의 도움과 응원이 필요한 문제입니다. 저자의 시편 하나하나에 대해서는 그냥 다 만족합니다. 그건 편집자의 영역은 아니기도 하고요. 저 또한 독자이기도 해서 독자의 관점으로 시인의 시편을 읽습니다.
코디정: (웃음) 백 점입니다. 제가 많이 배웠어요. 시들을 읽고 충격받기도 했고요. 사투리의 문턱만 넘으면(그러므로 여러분, 가름끈을 이용해서 뒤에 있는 방언사전을 참고하면서 읽으세요!!), 그냥 술술 읽혀요. 시공간을 넘나들어요. 웃다가 웁니다. 한국 여성의 존재방식을 여성의 언어로 이토록 실감나게 보여주니 마치 한국 페미니즘 문학의 정수를 체험하는 기분도 들었어요. 내용을 떠나 언어 그 자체의 아름다움도 가득하고요. 무중력 상태에서 비상하는 자유로운 언어가 시가 돼서 막 날아다녀요. 아무튼 제 상상력을 엄청나게 자극해 준 책이었어요. 그러니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는 백 점 만점입니다.
코디정: 네. 아무래도 만족감과 책임감의 차이 같아요. 독자는 만족이냐 아니냐로 책을 보시겠지만, 편집자는 책임질 수 있느냐 없느냐의 운명적인 짐을 내려놓을 수가 없으니까요...
코디정: 아, 이거 어려워요.. 한 편을 뽑으라 하면 못하겠어요. 세 편을 뽑고 싶어요.
이 시에는 전라도 여성이 많이 나옵니다. 그중에 저자의 가족이 있습니다. 3대에 걸친 여성이지요. 할머니, 엄마, 소녀입니다. 열 살 소녀가 지금의 시인이고요. 할머니와 소녀는 첫 번째 시편 <달 같은 할머니>에 아름답게 등장합니다. 하지만 엄마는 독자가 알 수 없어요. 그러나 편집자인 저는 알지요. 너무나 아름다운 서정시였어요. 4부에 등장하는 <물에 비친 찔레꽃>이라는 시입니다. 이 시를 읊는 화자가 소녀의 엄마입니다. 아마도 이 시집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막내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물에 비친 찔레꽃
나는 꽃 중에 찔레꽃이 질로 좋아라
우리 친정 앞 또랑 너매 찔레 덤불이
오월이먼 꽃이 만발해가꼬
거울가튼 물에 흑하니 비친단 말이요
으치께 이삔가 물 흔들리깜시
빨래허든 손 놓고 앙거서
꽃기림자를 한정없이 보고 있었당께라
그것으로 작문 써서 소학교 때 상도 받었어라
인자 봉께 화순떡 자네 딸이 군내 백일장 장원 헌 거시 어매 탁애서 글구만
다음으로 2부에 등장하는 <엄니, 탕 소리 나면 뒤 좀 돌아봐주소>라는 제목의 시예요. 이건 읽을 때마다 눈물이 나요. 뭐라 형언하기 힘든 무참함이 있어요. 이걸 어떻게 시인의 감정을 배제한 채 시로 표현했는지 기적처럼 느껴져요.
(전략)
나는 그것도 아니어라 성님 우리 복자가 사상이 머신지도 모르는 년인디 즈그 시숙이 산에 갔다고 그 염병할 놈들이 끄꼬 갑디다 즈그 시아부지허고 서방은 그 먼저 시월에 학살 당했소안 근디 멋났다고 그 죄 없는 것까지 잡으러 왔능가 몰라라 사람 못 잡어묵어서 환장헌 것들이재
그적에는 사람이 짐생이나 한가지였응께 동네서 한테 커난 동무헌테 손꾸락총 놔서 끄서가는 일을 생각이나 해봤능가
낭중에 유제 사람들이 급디다 복자 학살 당헌 전날에 갱찰들이 토벌 갔다가 나수 죽었다여 긍게 눈이 뒤집어져가꼬 티 있는 집 사람들을 끄서 냈다요
그랬것재
우리 복자가 개물뚱 밭에 퇴깽이 새끼만치로 웅크리고 서있고 나는 오메 어째야쓰꼬 발만 동동 굴렀재 갱찰들이 쩌리 내래가라고 총대를 내둘러서 막 돌아선디 가이내가 내 등거리에 대고 당부허드란 말이요
머시라등가
엄니 엄니 총소리 탕 나먼 나 한번만 돌아봐주소 그랍디다 글고는 열 걸음을 안 내래와서 총소리가 나는디 오메 무섭고 아무 생각도 안 나고 시상에 그라고 무서우까 벌벌 떰서 복자야 복자야 이름만 욈서 내려왔어라 뒤를 못 돌아봤단 말이오 그것이 마지막으로 즈그 어매라고 나 거튼 년을 어매라고 당부헌 말인디 못 돌아봤어라
이 사람아 그라지 말어 일상 묵던 맘으로 살 수가 없던 시절이여 오메 회진떡 자네 차말로 애가 녹았겄네
그랑께 성님 내가 죽어도 낯 들고 그 애기를 못 만낼 거시요 엄니 총소리 탕 나먼 나 한 번만 돌아봐주소 소리가 인자는 총소리보다 더 무서와라 성님 그라고도 내가 이 목구녀게 밥 밀어 넣고 사요
그런데 이 시집의 빛나는 장점은 아픔과 고통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지 않아요. 한국 여성들이 그 아픔과 고통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그 존재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서로 의지하면서, 여성이 여성의 힘이 되어 주면서, 그러면서도 남자들과 달리 옛것을 고집하지 않고 시대의 변화를 유연하게 좇아가면서, 특유의 전라도 여성의 유머로 시대를 바꿔가는 방식입니다. 그 유머는 흡사 거인의 유머였어요. 4부의 <딸 이름을 돈 주고 지어?>라는 시를 제일 좋아합니다. 그래요, 여성에게는 시대에 걸맞은 이름이 필요합니다. 엄청 재미있는 시이고, 웃음을 참기 힘든 시인 것 같지만, 저한테는 웅변처럼 들렸어요. 장문의 시인데, 한 구절만 소개합니다.
긍께 이 사람아 딸이라고 우섭게 이름 지어주먼 쓰꺼싱가 모레가 장날잉께 영감님 장보러 나서거든 메느리 본대서 청하소 우리 손지딸 착허고 커서 부자 될 이름 한나 지어 오시쑈허고 말이여
코디정: 책이 출간된지 일주일이 됐습니다. 그사이 벌써 엄청난 평가를 받았어요. "진짜 대박, 어떻게 이런 시가 나올 수 있죠?", "첫 줄에 확- 무너졌어요", "간만에 시집 읽다 눈물이 왈칵.",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 주는 책", "한국 시단에 경사가 났다.", "내가 본 시집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투리 말맛에 얹혀 시공간 이동을 할 수 있다.",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라도말" 등등의 멋진 서평을 목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위에 많이 추천해 주세요.
http://www.yes24.com/Product/Goods/110133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