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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디정 Sep 07. 2019

수태고지

16호 | 흥미로운 역사이야기

수태고지(受胎告知, ANNUNCIATION)


수태고지는 대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찾아와 성령이 임하여 처녀의 몸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잉태할 것을 알려주며 마리아가 이를 받아들이는 사건을 말합니다. 성모영보라고도 합니다. 누가복음 1장 26절~38절의 내용이며 기독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 | 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 |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임신하지 못한다고 알려진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 |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르네상스 시절인 15~16세기에 특히 많이 그려졌습니다. 몇몇 수태고지 그림을 여기 소개합니다. 가장 유명한 그림으로는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1441)의 수태고지입니다. 1434년 그림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말합니다.


아베 그라티아 플레나(AVE GRA(TIA) PLENA)


마리아가 말합니다.


에체 앙칠라 도미니(ECCE ANCILLA DNI)


한글로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어서 오너라, 은총을 받은 이여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93x37cm의 나무 위의 유채였으나 19세기 러시아에서 캔버스로 옮겨졌습니다(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이보다 따뜻하게 표현된 가브리엘 천사는 아마 없을 것입니다.



안젤리코의 프레스코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얀 반 에이크는 비교적 작은 유화입니다만, 이것은 프레스코 벽화입니다.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95-1455)의 이름의 뜻은 <천사와 같은 수도사>입니다. 실제 이름은 귀도 디 페에로(Guido di Piero)입니다.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는 1438-47년 동안 제작되었고 230x321cm의 프레스코 벽화입니다(Convent of San Marco, Florence). 여기에서는 '성령을 전하는 전령'을 상징하는 비둘기가 없습니다.


다음은 프라 필리포 리피(Fra Fillippo Lippi, 1406-1469)의 수태고지입니다.

얀 반 에이크의 수태고지보다 9년 정도 늦게 그려진 것이고 훨씬 큽니다, 나무 위에 유화입니다(203 x 186 cm, Alte Pinakothek, Munich). 좀 분위기가 딱딱하군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도 수태고지를 그렸습니다. 1472~1475년 사이에 그려졌으며 이게 정말 다빈치가 그린 것인지 오랫동안 논란이 많았답니다. 여러 아티스트의 콜라보 작업으로 이루어졌으나 레오나르도가 완성했다고 합니다. 78x219cm의 나무 위의 유화입니다(Uffizi, Florence). 성모 마리아의 위세가 대단하고 대천사 가브리엘은 전령 같은 느낌입니다.


라파엘로도 동참하였습니다. 라파엘로(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1520)의 수태고지입니다. 1502-1504년 그림입니다. 27x50cm의 캔버스 위의 템페라 유화입니다. 바티칸시티에 소장되어 있습니다(Vatican Pinacoteca, room VIII). 라파엘로의 그림은 언제나 서사가 있습니다. 무대 위 배우 같습니다.


티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1488-1576)의 수태고지입니다. 1535년 그림입니다(Oil on canvas, 166 x 266 cm, Scuola Grande di San Rocco, Venice). 꽃과 비둘기와 성사라는 전형적인 오브젝트가 있습니다. 대천사 가브리엘이 수태고지를 할 때 메추라기가 반쯤 열린 상자에 과일을 담으려 합니다. 가장 현대적인 얼굴의 마리아입니다.


엘 그레코의 특유한 화법은 수태고지에서도 드러납니다.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수태고지입니다. 1595-1600년 그림입니다. 91×66.5 캔버스 위의 오일입니다(Museum of Fine Arts, Budapest).


다음으로는 매혹적인 이단,  

카라바조(Michelangel Merisi, “Caravaggio”, 1571-1610)의 수태고지입니다. 이 그림은 아주 많이 손상돼서 복원되었다고 하고, 카라바조의 화법은 천사 가브리엘 부분이라고 합니다. 천사는 실제 공간에서 그림 안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줌으로써 그림과 이 그림을 보는 사람 사이를 없애는 기법은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이라 합니다. 1608-09. 285x205cm의 캔버스 유체입니다(Musée des Beaux-Arts de Nancy, Nancy, France).


미술사에서 르네상스가 얼마나 대단했는지는 14세기 초의 수태고지 성화(the Church of St Climent in Ohrid, Macedonia)를 비교 감상하면 알 것 같습니다. 중세의 수태고지는 이처럼 무표정합니다.


한편, 언제부터인가 천재 화가들이 수태고지를 그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17세기 이후이지요. 대체 유럽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17세 이후 명망있는 화가들이 수태고지를 그리지 않게 되었을까요?


찾아보았지요. 바로 나오는군요. 30년전쟁이었습니다. 1618년부터 1648년까지 유럽 전역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로마 카톨릭을 지지하는 나라들과 개신교를 지지하는 나라들 사이에서 벌어진 기독교전쟁입니다.


800만 명이 죽었답니다.
아, 종교. 아, 기독교.
얼마나 끔찍했겠습니까.


종교적인 열망도 급격히 줄어들었겠지요. 베스트팔렌조약으로 드디어 구교와 신교가 타협했습니다. 평화가 찾아왔지요. 그담은 과학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종교적인 열망과 신앙의 환상을 지속할 에너지를 잃은 셈입니다. 화가들의 관심은 이제 살아있는 것으로 옮겨갔습니다. 인물화, 정물화,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답니다.


그래도 <수태고지>가 갖는 매혹적인 환상을 담은 작품은 잊히지 않고 이렇게 무사히 후대까지 전승되어 왔다는 사실에 안도합니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더라도, 종교적인 환상이 사라진 인류의 역사를 상상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아베 그라티아 플레나(AVE GRA(TIA) PLENA)

- 에체 앙칠라 도미니(ECCE ANCILLA D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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