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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기웅 Dec 05. 2019

아들, 엄마 머리 좀 감겨줄래?

10살의 나는 엄마가 길에서 사과 파는 것이 부끄러웠다.

이른 아침에 엄마가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의 머리를 감겨 달라 하셨다. 나는 내가 꿈을 꾼 줄 알았다. 엄마는 다시 나를 깨웠다.

- 엄마 머리 좀 감겨 줄래

잠이 덜 깨 갑작스럽게 짜증이 났다.

- 갑자기 왜 머리를 감겨 달래

- 엄마 허리가 너무 아파서 굽힐 수가 없다

- 알았어


엄마는 철근처럼 강한 사람이었고 부러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봄에는 나물을 캐고 가을에는 사과를 팔아 나를 키우셨다. 산과 밭에 나가는 것이 엄마의 일이자 취미였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엄마는 시내 길가에서 사과 장사를 했다. 더러는 경동시장에서 사과를 파는 일도 있었다. 시골 교회 목사였던 아버지는 돈과 인연이 없는 분이었다. 사람은 거절을 잘할 줄 알아야 하는데, 아버지는 이 사실을 교인에게 보증을 서주고 나서야 깨달았다. 집 안 곳곳에 빨간 압류 딱지가 붙었을 때는 아마 절감했으리라. 엄마는 그 모진 현실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당신은 외할머니가 남겨준 작은 과수원으로 우리 가족을 먹여 살렸다. 엄마는 '억척스럽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때 10살이었다.

추수가 끝나고 매서운 겨울이 다가오면 엄마는 길에서 사과를 팔았다. 길바닥에 플라스틱 박스 두 개를 엎어놓고 그 위에 널따란 나무판자를 깐다. 작은 소쿠리에 사과 너댓개를 담아 판자 위에 올려둔다. 손이 거친 아줌마가 외친다.

- 사과 맛있습니다. 둘러보세요. 맛만 보고 가세요.

당장 길에서 사과를 팔지 않으면, 아들 급식비 낼 돈이 없다는 사실은 겨울 동장군보다 시리고 매몰찼다.


그날도 평소처럼 엄마는 길에서 사과를 팔고 나는 옆에 앉아 있었다. 거리 끄트막에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내가 좋아하던 같은 반 여자아이였다. 그녀가 자기 부모님과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이대로 가다가 분명 마주치겠다 싶어 엄마에게 아무 말이나 둘러대고 그 자리를 도망 나왔다. 나는 먼발치에 숨어서 그녀의 부모가 사과 사는 것을 지켜보았다. 단란한 가족이 엄마에게 돈을 주자 엄마는 사과가 담긴 봉지를 건네주었다. 엄마는 그 가족이 뒷모습을 보일 때까지 넙죽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 가족이 멀리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슬그머니 엄마 곁에 갔다. 그리고 아무것도 못 본 양 엄마 옆에 앉았다. 10살치고는 꽤 자연스러운 연기였지만 엄마는 내가 왜 허겁지겁 달아났는지 알고 계셨다. 거리에 사람이 뜸해질 때쯤 엄마가 나에게 물었다.

- 엄마가 사과 파는 게 부끄럽나.

나는 그때 왜 고개를 끄덕였을까. 그때 나를 보는 엄마의 눈은 참 컸다.

- 미안하데이. 이제 집에 드가자.


집에 가는 길에 엄마가 우는 것을 난생처음 보았다. 엄마는 앞만 보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양 볼엔 눈물이 흐르고 입술은 연신 씰룩거렸다. 엄마는 내게 한 번도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드라마를 보고 운 적도 없고, 부부 싸움을 하고 나서 아버지가 문을 박차고 나갈 때도 자식들 앞에서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당신 말로는 줄줄이 딸만 낳았다는 이유로 시어머니가 찬물로 머리를 감겨줄 때도 그리 슬프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 엄마를 내가 울게 만들었다.


10살의 나는 엄마가 길에서 사과를 파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것이 한없이 창피했다. 우리 엄마가 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이 부끄러웠다. 우리 엄마도 다른 엄마처럼 화장하고 코트 입고 다니면 좋으련만, 교양 있는 서울말로 나긋하게 말해주면 좋겠는데. 누구네 엄마는 길에서 사과를 사고 우리 엄마는 푼돈을 받는 것이 남부끄러웠다. 그 푼돈으로 보일러를 데우고 아침밥을 먹고 옷을 입는 것이 보잘것없어 보였다. 겨우 거머쥔 것이 한없이 비참하고 초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부끄러운 것은 살려고 분투하던 엄마를 부끄러워했던 아들놈이었다.


이후에도 엄마는 겨울 내내 사과 가판대를 차렸다. 누나가 병원에 취직할 즈음까지, 엄마는 여러 해 동안 길에서 겨울을 났다. 건강과 형편을 맞바꾸는 것은 언제나 비참하고 처참하다. 그런데 해를 넘어갈수록 역설적이게도 나는 엄마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겼다. 엄마가 고생하는 것을 생각하면 끊임없이 불쌍하고 고통스럽지만, 엄마는 얼마든지 버틸 것처럼 보였다. 당신 스스로도 그렇게 행동했다.

나는 엄마가 늙을 줄 몰랐다. '늙었다'는 말은 우리 엄마 말고 다른 할머니들한테 쓰는 말인 줄 알았다. 해를 넘길수록 당신 몸이 말썽을 부리는 일이 잦아졌고 60이 되어서는 허리, 무릎 어디 한 군데 빠지는 곳 없이 증세가 심해졌다. 이제 내가 엄마 머리를 감겨 주어야 할 정도로 엄마가 약해졌다는 것이 서글펐다. 철근 같던 우리 엄마가 한 줄기 고사리처럼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슬픔이 왈칵 일었다. 당신은 금방이라도 꺾일 마른 갈대 같았다. 엄마는 겨우 고개만 숙이고 있었고, 나는 샤워기 주둥이를 이리저리 옮기며 엄마의 머리를 감겨주었다. 머리칼은 매우 얇고 숱이 적어 비어있는 곳이 여러 군데 보였다. 머리칼이 바스라질 것 같아 손에 힘을 주는 것이 망설여졌다. 늙고 낡은 엄마를 보는 순간 눈물이 그렁하게 맺혔다. 샤워기가 엄마의 머리칼을 적시고 있어 엄마가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이 다행이었다. 엄마의 머리를 감겨주고 나서, 나는 우리 엄마가 이제 아픔에 끙끙대며 사는 60대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엄마의 머리칼은 선풍기 바람에 힘없이 휘날리고 있었다.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 없는 딱딱한 아들인 것이 참 미안하면서도 그 말이 입 밖으로 잘 나오지 않는다. 그 말이 나올라치면 목에서 걸린다. 괜한 쑥스러움에 다른 말을 툭 내뱉었다.

- 엄마, 아침 일찍 병원 가봐야 돼


이런 이야기를 글로 적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기분이 묘하다. 다만 엄마에 대한 기억을 글로 남길 수 있는 것은 울적한 축복이다.




작가의 말 (:D)


   교내 공모전에서 덜컥 입상한 글입니다. 상금을 받는다는 사실이 무지 기쁘면서도 왠지 가족에 대한 기억을 팔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래도 상금으로 엄마에게 무언가를 해드리면 죄책감이 조금은 사라지겠죠?

   가끔 먼 미래의 저녁 풍경을 상상하곤 합니다. "만약 내 자식이 피자가 먹고 싶다고 할 때, 고민 없이 피자헛을 사줄 수 있는 아빠가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합니다. '돈'에 있어서는 그 정도의 능력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저도 끊임없이 발버둥쳐야겠지요. 가진 걸 나눌 줄 아는 어른이 되면 또 얼마나 기쁠까요. 저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그렇게 될 것입니다.

   제 작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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