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녀를 위로하는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이다지 슬프지 않았을 텐데
- 형님이댓쉐까? 형님두 들어갔됐쉐까?
- 님자두 들어갔댔나?
- 형님은, 뉘 집에?
- 나? 육서방네 집에. 님자는?
- 난, 왕서방네! 형님 얼마 받았소?
- 육서방네 그 깍쟁이놈, 배추 세 포기!
- 난 삼원 받았디
복녀는 자랑스러운 듯이 대답하였다.
배를 곯으면 체면 차리는 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도덕을 배운 집안에서 자란 주인공 복녀를 매춘으로 나가게 만든 것은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일을 하러 나선 이후로, 돈에 눈이 뜨이니까는 복녀에게 욕심이라는 것이 생긴다. 복녀는 제쳐두더라도, 그녀의 남편이라는 놈은 다른 남자가 제 아내와 정을 통하는 걸 가만히 눈감아준다. 아내가 돈이 된다.
어느 날 복녀는 감자밭에서 감자 한 바구니를 훔쳐 가지고 나오다가 주인 왕서방에게 들킨다. 왕서방은 화를 내긴커녕 도리어 돈 3원을 주며 그녀의 몸을 요구한다. 이후 왕서방과 복녀는 지속적인 비즈니스 관계를 맺는다. 그러다 왕서방이 색시를 새로 사자 복녀는 이를 시샘한다. 그녀는 새색시를 죽이겠다며 낫을 들고 활극을 벌이다 오히려 왕서방에게 죽임을 당한다. 시체가 된 복녀를 가운데 두고 남편, 왕서방, 한방의는 돈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는다. 그곳엔 죽은 복녀에 대한 애탄과 연민은 없고 돈 건네고 받는 소리만 들린다.
<감자>는 인간성이 결여된 사회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그곳은 제 몸을 팔 수밖에 없는 사회, 돈이 윤리가 되는 사회. 인간성이 매몰된 사회다. 세대에 걸쳐 오래 읽히는 글은 항상 시대를 관통하는 주제를 담는다. 나는 인간의 쓸모를 돈으로 환산하며 사는 사회에 산다. 그것이 얼마나 메마르고 건조한 것인지 모른다. 때로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
죽은 복녀를 위로하는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이 소설이 이다지 슬프지 않았을 텐데.
작가의 말 :)
번역서만 읽다 보면 문장의 이질감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번역이 서투르고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라, 문장들이 다른 나라의 말로 옮겨지는 데에서 생기는 괴리감 때문입니다. 제가 사용하는 언어로 쓰인 글이 궁금해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번역된 글은 식었다 데운 치킨 같습니다. 반면 원래 한글로 쓰인 글은 갓 튀겼을 때의 바삭함과 따뜻함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둘 다 맛있습니다.)
한국문학에는 한번 번역된 문장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말’의 정겨움과 재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노르스름’과 ’누르스름’의 미묘한 차이를 압니다. 한국인들은 국어의 그 고유한 맛을 감별해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문학은 많은 경우에 더욱 깊이 와 닿습니다.
제 작은 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