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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Aug 19. 2020

내려놓는다는 것

나에게 아이란 무엇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방배동으로 가는 길에는 줄곧 비가 내렸다. 인터넷 합격후기를 뒤져서 찾아낸 실기학원을 찾아가는 길이다.

문예창작과, 영화과, 영상디자인학과에 많은 합격생을 배출했다는 학원이다. 비는 심술궂을 정도로 쏟아진다.

평소에도 막히는 길인데 오늘은 1km를 가는데도 간신히 힘겹게 나아가고 있는 느낌이다.


뒤에 앉은 아이는 엄마가 잘못 알려 준 미술학원 정보 때문에 한 달을 허비했다고 불만스러운 목소리를 쏟아 낸다. 1시간 20분가량의 시간 동안 설전이 벌어지고 그 설전이 더 강도를 높이지 않도록 단어 하나, 말투 하나에 온 신경을 쏟아서 말을 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주 미묘한 말 한마디에도 소모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그렇게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이런 곳에 학원이 있을까?' 하는 곳에 4층짜리 건물이 나타났다.


학원은 3층에 위치해 있었다. 입구에는 학생들 신발이 꽤나 많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놓여 있다.

꽤 인기 있는 학원인가? 대중교통으로 다닐 수 있는 곳인가? 이런 생각들을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대기실에서 상담을 기다리는 동안 안에 있는 책들을 훑어본다.

'김영하의 두 사람, 플라톤의 국가, 세계 건축사, 오만과 망상', 이 정도는 읽어야 한다고 책들이 말을 걸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 좋은 책들이 많다고 이야기하니 아이는 40대나 읽을 법한 책이라고 시큰둥하게 대꾸를 한다. 책 읽는 걸 딱히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스토리를 만들어서 밥벌이를 해야 하는 직업을 선택하냐고 묻고 싶지만 밖으로 내뱉지 못하니 그저 속으로만 의미 없는 말을 되뇌어봤다.   


20분간의 모의수업을 끝낸  아이는 그저 천진난만하게 즐거워하며 상담실로 들어선다. 그러나 원장의 상담이 진행될수록 아이의 표정은 어두워지고 나 역시 말을 잃고 자꾸만 무거운 한숨을  내뱉는다.

현재의 성적으로는 원하는 학과나 대학 입시는 꿈꾸기 힘들다는 냉정한 현실을 마주하고 차마 꿈꾸기도 민망한 불가능한 목표를 부여받은 채 학원 건물을 나왔다.


차마 밖으로 뱉지 못한 수많은 말들이 속에서 외쳐댄다.

"꿈꾸려면 그 꿈을 위해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니?"

"너에게 주어진 그 귀한 시간을 이렇게 허비했는데 이게 바로 너의 현실이야" 



내려놓았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는데 결국 상처를 슬쩍 덮어 놓고 그 상처가 보이지 않으니

아프지 않다고 괜찮다고 했던 것뿐이다. 보이지 않은 그 상처가 더 곪아서 더 쓰리고 아픈데도

나는 그저 괜찮다고만 했던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상황에서 행복하다고

행복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저 괜찮다고 하는 것은

괜찮은 게 아니다.


오늘 같은 폭우도 멀리서 바라보는 빗방울과

우산 끝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서로 다르다.

멀리서 볼 때보다 내 발 앞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더 크고 아프다. 



진짜 내려놓으려면 오늘 같은 날에 고개를 푹 숙이고 웃음기를 잃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아이에게 괜찮다고 이게 전부가 아니라고

저녁으로 뭐 먹고 싶냐고 네가 좋아하는 삼겹살이나 먹으러 가자고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내려놓았다고 말하면서 내려놓지 못한 나의 발걸음은 이렇게나 무겁고 힘없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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