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결혼도 명목상으로는 평온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집안에서 고성이 오고 가거나 그릇 같은 집기가 나뒹구는 일은 없었으니 말이다.
미선은 눈을 뜨면 대가족의 빨래를 하러 집 옆에 있는 도랑으로 갔다. 큰 딸아이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막내 손을 잡고 옆에 따라붙었다. 도랑가에 있는 돌멩이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으면 그래도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 된다. 바깥공기를 들이마시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하다 보면 숨통이 트였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는 것이다. 사람은 극한 상황에 처하면 아주 작은 것에 감동하고 힘을 얻기도 한다. 그녀는 얼음처럼 차가운 도랑물에 손을 넣고 잠시 숨을 돌리면서 모처럼 크게 심호흡을 해 본다. 날이 추운 날이면 손이 칼로 베는 듯이 얼어붙을 때도 있지만 오히려 그녀는 그러면서 정신을 번뜩 차리는 것이었다.
'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어떻게든 죽지 않고 살아야 이 아이들을 키울 것이고 나도 살 수 있을 것이다 '
미선은 빨래 방망이로 빨래를 내려치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아이들은 엄마 따라 밖에 나온 것이 신이 나서 저희들끼리 웃고 장난치느라 여념이 없다.
저쪽에서 시누이가 슬리퍼를 꿰어 신고 뛰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시누이는 숨이 넘어가는 모양새다. 어서 빨리 집으로 들어와 보라는 것이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빨래를 대충 커다란 소쿠리에 넣어서 집으로 달려갔다.
시어머니는 마루에 앉아서 부들부들 떨고 있다. 그녀의 손에는 편지 한 통이 들려 있다. 누가 보낸 편지인지 뭐라고 쓰여 있길래 시어머니가 저렇게까지 흥분해 있는지 그녀는 겁이 나기 시작한다. 시어머니는 당장 사돈을 만나러 가겠다고 한다. 그리고 말로만 엄포를 놓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방으로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것은 안 될 말이었다. 내일은 친정아버지의 생일이었다. 지금쯤이면 시골집은 한창 음식을 만드느라고 분주할 것이다. 아버지 생일이면 마당에 커다란 가마솥을 내놓고 닭을 삶고 전을 부쳤다. 아버지 생일은 매년 동네 사람들을 초대하고 음식을 나눠 먹는 동네 잔치를 겸한다. 미선도 내일이면 아이를 데리고 시골에 갈 참이었다. 그러니 오늘 같은 날, 흥겨운 잔치를 준비하고 있는 친정에 시어머니가 들이닥치는 것은 안 될 일이었다.
" 어머니, 잘못했어요"
미선은 무엇을 잘못했는지 본인도 알지 못한 채 계속 잘못했다는 말만 되뇌었다. 일단 서슬 퍼런 어머니를 진정시켜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진정할 사람이 아니다. 시어머니 유순씨는 본인이 결정한 일은 반드시 해 내고야 마는, 추진력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란 말이다. 더구나 그녀는 본인의 결정에 망설임이 없었다. 본인의 행동이 지나치지는 않는지 하는 고민 따위는 그녀의 행동강령에 애초부터 없었다.
그녀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집을 나섰다. 그녀의 한 손에는 편지가 들려 있는 상태였다. 그녀는 지나가던 택시를 붙잡고 사돈집 주소를 불렀다. 사돈집은 택시를 타고 20분이나 시골로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평소 같으면 그 멀리까지 택시를 타고 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유순은 지금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이다. 그녀에게는 지금 택시비가 얼마나 나올지 고민하는 것은 얼토당토않은 일이다. 오로지 그녀는 빠르게 그곳으로 가서 난리를 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부자라고 큰소리치는 사돈 앞에 택시를 타고 내리는 것으로 본인의 위용을 뽐내겠다는 계산도 들어 있었다.
그래서 정말로 유순은 택시를 타고 사돈집으로 들이닥쳤고 사돈집 마당에 위풍당당하게 도착했다. 사돈집은 내일 있을 생일잔치를 준비하느라 분주했다. 마당에는 솥을 내놓고 불을 피우고 있고 여자들 몇이 마당에 있는 수도에서 그릇과 냄비를 씻고 있었다. 유순은 곧장 집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마루에는 사돈 영감인 박씨가 누워서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만만치 않은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둘 다 만만치 않게 기가 센 사람들이다. 무슨 일로 기별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오셨습니까 박씨 영감 입에서 먼저 떨떠름한 인사말이 나왔다. 그는 부러 웃는 표정을 짓거나 거짓으로 반기는 체하지도 않았다. 박씨 영감은 본인은 딸을 평생토록 부려 먹고 거지처럼 시집을 보냈으면서도 막상 사부인에게는 불만이 가득했다. 본인이 딸을 푸대접한 것은 생각도 못하고 며느리를 함부로 부려 먹는 사부인에게 잔뜩 골이 났다는 걸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 보인다.
그렇다고 기가 죽을 시어머니인가. 절대 아니다. 유순의 얼굴에는 거만한 미소가 흘렀다.
" 딸년 교육 똑바로 시키시오"
유순의 입에서 나온 말은 거침이 없었다. 딸도 아니고 딸년이라니. 박씨 영감의 얼굴에는 그나마 남아 있던 온기가 일순 사라졌다. 유순은 손에 들고 있는 편지를 마구 흔들어 댔다. 편지의 내용이란 그런 것이었다. 부산에 살고 있는 미선의 동생인 미자가 보낸 편지였다. 미자는 결혼하고 시집살이로 힘들어하는 언니와 가끔 편지를 주고받았다. 미선이 고충을 털어놓을 사람은 그나마 만만한 동생 미자뿐이었다. 미선은 시어머니의 횡포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이제 마음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는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미자는 거기에 답을 했다. 편지에서 미자는 시어머니 흉을 봤다. 언니 시어머니는 어쩌면 그렇게 악독하고 냉혈한 같은지 모르겠다. 나는 언니 시어머니처럼 고약한 시어머니는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언니 그렇게 살다가는 사람이 제 명에 못 죽는다. 형부한테 잘 얘기를 해서 분가를 알아봐라 하는 내용이었다. 설마 감옥도 아니고 편지를 사전 검열할 것이라고 생각도 못 했기에 둘은 허심탄회하게 서로의 얘기를 주고받았고 유순에 대한 신랄한 평도 담겨 있었다.
유순은 귀신처럼 냄새를 맡고 그 편지를 미리 뜯어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편지에서 본인에 대한 얘기를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던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남의 편지를 그렇게 마음대로 뜯어봐도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는데 유순이 그런 문제로 양심의 가책을 느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다. 유순은 감히 시어머니 뒤에서 시시덕거리며 본인의 흉을 보고 있는 며느리에 대해서 자비로운 처분을 내릴 생각이 없었다. 유순은 심한 말을 있는 그대로 쏟아 냈다. 딸년 교육을 그 따위로 시켰으니 시집와서 하는 행실이 저 모양이라는 거침없는 말도 마구 튀어나왔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박씨 영감이 아니었다. 거지 같은 집에 시집보냈더니 죽도록 고생만 하고 그 집에 시집보낸 것을 땅을 치고 후회한다는 소리가 나왔다. 이제 막장까지 간 것이다. 둘은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할 말 못 할 말을 하고 싸우다가 결국 아무런 타협도 하지 못한 채 싸움을 끝냈다.
유순은 싸움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닌 싸움이었다. 그놈의 영감도 한 마디도 지지 않고 달려들었다. 키가 180은 족히 될법한 사돈 영감이 눈을 부라리고 달려 드니 은근 겁이 났던 것도 사실이다. 유순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 앞에서는 벙어리처럼 입을 쳐 닫고 있더니 동생하고 그런 편지를 주고받았겠다 이거지. 편지로 시어머니 흉을 보고 우리 집 망신을 시키면서 여우처럼 간교하게 뒤통수를 쳤다는 것이겠다. 한번 두고 보자"
유순은 앞으로 미선을 더욱 괴롭히리라 마음을 먹었다. 어차피 걸릴 게 없었다. 아들 정호는 미선에게 정이 없는 것이 분명한 노릇이고 사돈 영감은 앞에서 성질이나 버럭 낼 줄 알지 자기 딸이라고 데리고 갈 위인도 아니다. 출가외인이라고 딸 혼수 해서 보낸 거 보면 알 수 있지.
아니 그게 아니지 차라리 저것들을 쫓아내야겠다. 유순은 미선을 분가시키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그것은 분가라고 부르기 힘든 일이었다. 유순은 그저 미선을 쫓아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제까지 정호의 월급봉투는 모두 유순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미선의 수중에는 돈 10만 원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미선은 집을 나가도 당장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방 한 칸 구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나 유순은 이것저것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않고 미선을 내쫓기로 마음먹었다. 저 인간을 계속 보고 살다가는 내가 열이 뻗혀서 졸도를 하고 말 것이다. 얼굴만 봐도 울화통이 치밀고 뒤통수까지도 밉상스러운 며느리를 더 이상 보지 않고 살아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돈을 주거나 집을 구해 주려는 것은 아니다. 그저 눈앞에서 사라지기만을 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선은 돈 한 푼 없이 집을 구해야 했다. 어차피 이런 생지옥에서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미선은 어떻게든 돈을 구해서 집을 구해 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어디를 가더라도 여기보다는 나을 것이다. 숨은 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앉고 싶으면 앉을 수 있고 잠깐 눕고 싶으면 누울 수 있는 것이다. 배가 고프지 않으면 밥때를 조금 늦춰도 되는 것이다. 아이들끼리 떠들고 장난을 쳐도 내버려 둘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희망으로 미선은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