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그녀의 결혼과 삶 # 9

by 느리게 걷기

조직 검사 결과 암입니다.


1980년대에 '암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당신은 곧 죽을 것입니다'와 같은 의미였다. 그만큼 암은 무서운 병이고 돈이 많이 드는 질병이었다. 그래서 암이라는 판정을 받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질병과 싸워보려는 의지를 불태울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주변을 정리하면서 무기력하게 죽음을 기다렸다.



박씨 영감이 처음 암 선고를 받았을 때 그는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특별한 징후도 없었다. 그저 등이 자주 아프고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병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의 병명은 췌장암이었고 병원에서는 그에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암시를 주었다.


그에게는 평생 쓰고도 다 못쓸 만큼 돈이 많았다. 최근에는 복숭아 농사까지 풍작이었다. 매년 큰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에 박씨 재산은 해가 갈수록 덩치를 불려 갈 것이다. 그런데 그 많은 돈과 넓은 땅덩어리를 두고 세상을 떠나야 하다니. 그는 병원에 누워서도 의사들을 믿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렇게 멀쩡한데 곧 죽기라도 하는 것처럼 겁을 주냐고 버럭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박씨는 천성이 부지런한 농사꾼이었다. 그렇게 넓은 밭과 과수원 농사를 지으면서도 앓아눕거나 게으름을 부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워낙 술을 좋아했기 때문에 식사 때마다 꼭 소주로 반주를 했다. 그것이 박씨에게는 힘든 농사일을 척척 해내는 나름의 비법이었고 인생의 낙이었다. 그는 평소에는 퉁명스럽고 화를 버럭 내는 게 습관이 되어 버린 고약한 노인네였지만 술을 마시면 제법 여유를 부렸다. 그럴 때는 평소 같지 않게 농담도 하고 텔레비전을 보며 커다란 소리로 호탕하게 웃기도 했다. 돈이 많고 농사도 대체로 잘 되는 편이고 아들은 서울에서 번듯한 대기업에 다니고 있으니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팔자였다.



그랬던 박씨도 환자복을 입고 병원 침대에 누워 있으니 영락없는 병약한 노인네에 지나지 않았다. 미선이 죽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갈 때마다 박씨는 좋아지고 있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박씨의 안색은 하루가 다르게 안 좋아졌다. 암은 전이가 되었고 몸무게는 무서운 기세로 빠졌다. 시골에서 힘든 농사일에 단련이 되어, 보기 좋았던 그의 탄탄한 몸은 뼈에 가죽만 남은 것 같은 기괴한 몰골로 변해 갔다.


그런데도 박씨는 침대에 누워서 서울에 있는 아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박씨는 서울에 있는 아들이 자신을 보러 오기 위해 장거리 운전을 하는 것을 걱정하고 그것이 아들의 몸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가끔은 자주 오지 못하는 아들한테 서운한 속내를 보이다가도 미선이 박씨를 위로하려고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말을 바꿨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딸에게 감히 아들에 대한 섭섭한 감정을 털어놓고 싶지는 않는 듯했다.



그는 어쩌다 아들과 며느리가 병문안을 오면 눈에 띄게 활기를 찾았다. 박씨는 특히 며느리가 서울에서 가지고 온 파인애플 통조림을 자랑하고 싶어 했다. 미선이 가끔 만들어오는 흰죽이나 잣죽에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었지만 파인애플 통조림은 며느리가 가지고 온 물건이라 그런지 유난히 좋아했다.


" 이게 서울에서 아주 인기가 좋은 비싼 물건이다. 너도 갖고 가서 애들하고 맛 한번 봐라"

박씨는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파인애플 통조림 하나를 미선에게 가지고 가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좋아하던, 귀한 서울 음식을 몇 번 맛보지도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렇게 세상 무서울 것 없던 박씨도 죽음 앞에서는 그저 나약한 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 해 가을 수확을 마치고 죽고 싶어 했지만 결국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그가 죽기 전에 아직 추수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농작물을 걱정하며 떠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제대로 눈도 감지 못하고 세상과 아쉽게 이별했다.


박씨 영감이 세상을 뜰 때 그의 옆을 지킨 것은 미선이었다. 그가 갑자기 위독해지는 바람에 아들이 도착할 때까지 그는 숨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볼품없는 딸이 그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출가외인이니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라고 귀에 딱지가 않도록 냉정하게 선을 그었던 그 자식이 늦은 밤, 아버지 곁에서 임종을 지켰다. 그것은 아버지가 원하던 마지막은 아니었을 테지만 그 상황에 함께 할 수 있는 자식은 미선이 뿐이었다.


박씨는 결국 그렇게 떠났다. 아무런 미련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딸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지만 본인은 그다지 상처 받지 않고, 살고 싶은 대로 원 없이 살다가 떠났으니 말이다. 어차피 그가 평생 일궈놓은 땅 덩어리는 아들 앞으로 돌려놓은 후였다.


그렇게 그는 딸들에게는 회환을 주고 아들에게는 절절한 그리움을 남기고 떠났다.


딸들은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슬픈 사실보다 본인들의 가슴에 쌓인 한스러움 때문에 더 많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


사진출처:https://www.vision.org/is-there-life-after-death-4974

이전 08화차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