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

그녀의 결혼과 삶# 8

by 느리게 걷기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다. 그래서 사랑받지 못하면 쓸쓸한 슬픔의 감정을 쓸어 내려야 한다.


차별은 또 다른 문제다. 차별은 상처를 남긴다. 차별은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좌절되었다는 슬픔과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분노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그 감정은 미처 소화되지 못하고 위에 남아있는 음식처럼 불편하고 불쾌하게 오래도록 남아 있다. 종국에는 나라는 사람은 애초에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가하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거울 앞에 섰을 때 나의 외면은 예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음에도 내 속에 남아 있는 차별의 상처가 아직도 견고한 것을 발견하고 그 집요함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미선은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 친정으로 가는 길이다. 큰오빠가 내려왔다는 기별을 받았다. 미선은 오랜만에 오빠 얼굴도 보고 친정에 전해 줄 것도 있어서 서둘러 가고 있는 중이다. 미선의 손에는 과수원에서 배를 감쌀 때 쓰는 봉투가 가득 들려 있다. 미선은 틈 날 때마다 배를 감싸는 봉투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금 가지고 가는 것이다. 그걸로 배를 감싸면 당도도 높아지고 벌레도 잘 먹지 않기 때문이다. 미선은 시골 농사를 도와주고 가끔 쌀이나 과일을 얻어오고 있다. 아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기 때문에 과일이나 곡식을 얻어 오면 쏠쏠하게 도움이 되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시외버스로 30분을 들어가서 좁은 비포장 도로를 30분 이상 걸어야 한다. 미선에게는 눈감고도 갈 수 있는 길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매일 그 길을 걸어서 학교에 갔다. 가다 보면 커다란 산소가 몇 개나 있는 길을 지나야 한다. 어릴 때는 낮에도 그 앞을 지나는 게 겁이 났다. 그래서 산소가 보이는 언덕배기 근처에 오면 거기서부터는 뛰어서 집으로 갔다.


책보따리를 매고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던 미선은 이제 아이 엄마가 되어 아이 손을 잡고 그 길을 걸어가고 있다. 구불구불하고 돌멩이도 발에 차이는 길이다. 포장이 되어 있지 않으니 바람이라도 불면 흙먼지가 날린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편, 무서운 시어머니, 억울한 일들이 떠오른다. 그녀는 얼른 고개를 저어서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려고 애를 쓴다.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그녀는 우울한 생각을 애써 떨치고 힘차게 걸음을 재촉했다.



미선의 큰오빠는 집안의 자랑이었다. 오빠는 중학교 때부터 인근의 큰 도시로 유학을 가서 하숙 생활을 했다. 박씨네 딸들은 모두 중학교만 나왔지만 오빠는 서울에서 대학까지 나왔다. 그것도 이름만 대면 알만한 유명한 대학이었다. 큰오빠는 아버지 박씨의 삶의 의미이자 그의 전부였다. 박씨 영감은 딸들을 시집보낼 때는 이것저것 재느라 인색하기 그지없었지만 아들에게는 세상에 다시없는 부모였다.


박씨는 아들이 대기업에 입사하자마자 아들에게 자동차를 사줬다. 그리고 서울 중심가에 아파트도 장만해 주었다. 미선에게 준 전세금 100만 원은 그냥 준 돈이 아니라 엄연히 빌려준 돈이었지만 오빠에게 들어가는 돈은 그런 빌려준 돈이 아니었다. 그저 조건 없이 그냥 주는 돈이었다. 아버지 박씨는 그것으로도 모자라서 손자들을 위해 피아노처럼 큰돈이 들어가는 물건들을 사서 서울로 보냈다. 아들이 어떻게든 서울에서 자리를 잡고 누구보다 출세를 하는 것이 아버지 박씨의 소원이었다.


큰오빠인 창인은 이제 곧 서울로 올라가려고 짐을 챙기고 있는 중이다. 박씨 영감과 할머니는 아들 차에 짐을 싣느라 분주하다. 쌀 20kg, 사과 한 박스, 배 한 박스, 고구마 한 박스, 그 외에도 늙은 호박, 애호박, 대파, 참기름, 들기름이 빼곡하게 차 트렁크를 채우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실을 공간이 없는 것 같은데도 박씨는 조금이라도 더 실어 보려고 욕심을 부린다. 트렁크에 있는 짐을 이리저리 옮겨서 그 사이에 단감이 든 박스를 어떻게든 더 우겨서 넣어보려고 한다. 보아하니 아직도 현관 앞에 싣지 못한 짐이 더 있는 모양이다. 창인은 이제 충분하다고 다 먹지도 못한다고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아버지. 지금도 너무 많습니다. 아들이 말을 할 때마다 박씨 영감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싱글벙글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오빠가 떠나고 나자 이제 아버지가 뭐라도 챙겨주겠지 미선도 기대를 해 본다. 그렇다. 박씨 영감이 뭔가를 들고 나온다. 박씨 영감 손에는 두 개의 푸대 자루가 들려 있다. 하나에는 쌀이 들어 있고 다른 푸대 자루에는 사과가 들어 있다. 그런데 오빠 차에 실어 보낸 사과와는 다른 사과들이다. 크기는 주먹만큼 알이 굵은 놈들이지만 여기저기 썩은 데가 있는 사과들이다.


" 원래 썩은 사과가 맛있는 법이다. 너도 알지"

썩은 사과가 맛있는 것은 미선도 알고 있다. 새들도 어떻게 알고 꼭 달고 맛있는 사과만 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빠에게는 멀쩡한 사과만 실어 보내는 것을 보았으니 썩은 사과를 받는 손길에는 어쩔 수 없이 섭섭함이 묻어난다. 사람인데 어떻게 섭섭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빠는 좋은 회사에 다니고 있고 서울에 집도 있고 차까지 끌고 다니고 있으니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다. 거기에 비해 미선은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이다. 때로는 급하게 동네의 다른 집을 찾아가서 쌀을 빌려와야 할 때도 있다.


어릴 때부터 귀가 따갑도록 '출가외인'이라는 말을 듣고 살았다. 그래도 아버지는 속정이 남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아버지는 엄하고 무서워도 술이 취하면 노래를 부르고 딸 얼굴에 자기 얼굴을 부비면서 장난을 치기도 했다. 그래서 모진 시집살이를 하다가 쫓겨나다시피 분가를 하게 되었을 때도 마음 한 구석에 아버지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부질없는 희망이었음을 미선은 오늘 새삼 느낀다. 아버지에게 미선은 그저 일 잘하는 일꾼이었을 뿐이다. 게다가 이제 시집을 보냈으니 출가외인이 된 미선의 궁핍한 삶은 아버지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오빠에게 그렇게 바리바리 정성스럽게 좋은 과일과 곡물만 실어 보냈으면서도 미선의 눈치를 보지도 않는다. 아버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아들과 딸이 같을 수 있나. 나에게는 하늘 같은 아들이다.


박씨는 미선의 얼굴에 섭섭함이 묻어나는 것을 보면서도 미선의 섭섭함이 얼토당토않다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려 버린다.


미선은 썩은 사과를 들고 돌아갈 채비를 했다. 올 때만큼의 거리를 걸어야 했다. 미선에게 매달린 아이 손에 힘이 풀렸다. 아이는 피곤했는지 꾸벅꾸벅 졸며 그 길을 따라 걷고 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오래도록 그 길을 되돌아 가야 한다. 그래도 지친 아이와 미선 뒤로 기다란 그림자가 함께 따라와 주고 있었다.


과일이 익어가는 아름다운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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