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by 느리게 걷기

때로 침묵은 곤혹스러움을 불러온다.

그 남자 직원은 마이크를 들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이크를 조심스럽게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 자세 그대로 그냥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일상적인 침묵의 범주로 간주해 버리기에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이 10초쯤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공간에 같이 있던 사람들에게 그 침묵의 시간은 훨씬 무겁고 길게 느껴졌다.

그 순간 가장 당황한 것은 당연히 강의를 하고 있던 '나'였다. 그에게 마이크를 건넨 사람도 나였다. 그러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당혹스러운 감정은 금세 강의실 전체로 번져갔다. 강의실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 남자 직원을 바라보았다. 더 이상 강의실에서 졸거나 딴짓을 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 시간은 ' 직장 내의 소통과 갈등 해결'이라는 주제로 진행되는 승진자 대상 교육이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은 강의 내용에 관심이 없었다. 2박 3일의 교육이 끝나는 마지막 날이기도 했다. 강의가 끝나면 바로 퇴소하기 위해서 아예 강의실에다 짐을 가져다 놓은 사람들도 있었다. 커다란 여행용 배낭이나 바퀴가 달린 캐리어가 강의실 뒤에 놓여 있었다.

그중에는 밤새 잠을 자지 않고 꼬박 밤을 새운 덕분에 졸려서 눈이 거물거물 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교육생들에게 술은 금지품목이지만 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술을 공수했을 것이고 교육기간 동안 급속하게 친해진 사람들끼리 술을 마시며 오랜만에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소통이니 갈등 해결이니 하는 교육에 그들이 관심을 가질 리 만무했다. 그냥 편하게 앉아서 졸다가 대충 강의가 끝났으면 하는 비슷한 바램들을 가지고 교육생들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중에서 이상하리만치 강의를 열심히 듣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자리는 중간쯤 되는 곳이었다. 얼굴은 둥글고 웃는 인상의 남자 직원이었다. 나이는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그는 청바지에 편한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의 약간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이마 위에 기분 좋게 늘어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착하고 순해 보이는 인상의 소유자였다.


그는 내 강의를 열심히 들었다. 내가 재미있는 사례를 소개했을 때 그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공감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수업시간 내내 집중하는 모습이었고 입가에 머금고 있는 미소 덕분에 응원을 받는 느낌도 들었다. 나에게도 당연히 그 직원에 대한 감사와 호감의 감정이 일어났다. 그래서 직원들의 발표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제일 먼저 마이크를 건네 준 것이다.


그런데 그는 마이크를 받아서 일어나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못 견딜 정도로 침묵이 길어지고 있다고 느꼈을 때 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 아, 무대공포증 같은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있다. 앉아서 잘 떠들고 이야기를 하다가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순간 얼음이 되어 버리는 사람들 말이다. 가끔 강의를 하러 다니다 보면 그런 직원들을 만나게 된다. 나는 이 직원이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에게 마이크를 건네주다니. 일단 그의 의사를 확인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나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나는 그의 마이크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주려고 했다. 그에게는 ' 생각할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하신 것 같네요'라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환기시킬 참이었다. 그런데 그의 곁으로 다가선 나는 더 당황하고 말았다.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나의 순발력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저 평범한 강의 중간이었다. 사내 과장 승진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상적인 '소통 갈등 해결' 강의실에서 마이크를 잡고 눈물을 흘리는 남자라니. 나도 당황하고 강의실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당황했다. 그 직원과 같은 조에 속하는 사람들은 더욱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내가 마이크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이 어떨지 물었을 때 그 남자 직원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듯이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마이크를 잡았다.

내가 그에게 던진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 너무 감사해서 잊을 수 없거나 너무 갈등이 심했기 때문에 잊을 수 없거나 그런 기억들이 있으면 공유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혹시 당신에게는 회사 생활을 하면서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나요?"

그 직원은 머뭇거리며 말을 시작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생각나는 팀장이 있다고 했다. 그는 몇 년 전 업무 감사를 받았다고 말을 꺼냈다. 회사에 입사해서 처음 감사라는 것을 받게 되면서 겁도 나고 많이 두려웠다고 그는 이야기했다. (보통 감사 업무를 하는 직원들은 불필요할 정도로 고압적이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 그는 이제까지 팀장의 지시에 따라 업무를 해오기도 했고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업무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까지 업무를 지시하던 당시의 팀장은 발을 빼고 모든 책임을 이 남자 직원에게 떠넘겼다는 것이다. 이 직원은 감사가 진행되는 동안 잠도 자지 못하고 밥도 먹지 못하면서 혼자 두려움에 떨며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감사는 별 문제 없이 끝났지만 그 시간은 그에게는 지옥이었다. 그러나 그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팀장에 대한 인간적인 배신감과 상처였다.


그는 천천히 말을 끝냈다. 잊고 있어서 이제 담담하다고 생각했는데 마이크를 잡고 그때 일을 떠올리는 순간 갑자기 감정이 북받쳐서 감정조절을 하지 못했다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에게 박수를 보냈다. 그는 한편으로는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다. 처음에 입을 떼지도 못할 만큼 그를 짓누르던 과거의 기억을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은 지금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시간 속에 안전하게 앉아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도 같았다.


그 직원의 그런 진실한 발언이 있고 나서 다른 직원들도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팀장님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던 일화도 나왔고 다른 직원들과의 갈등 때문에 근무지를 옮겼던 일화도 등장했다.


누군가 자신의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면 사람들의 방어심리도 급격하게 완화된다. 그가 공격자나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도 그저 상처 받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자신의 상처를 공유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날 무미건조하게 시작했던 강의는 많은 이야기와 생각의 여지를 남기고 끝나게 되었다.

그 날 마지막 멘트는 그런 것이었다.


"우리는 어느새 몸이 이토록 커져서 어른이 되었습니다. 이제 아이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키가 커졌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졌지요. 그러나 어른이 된다고 해서 상처에 무감각해지지 않습니다. 어른인 우리도 아이처럼 똑같이 상처 받고 소리 내서 울고 싶고 욕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저 우리는 상처를 피하거나 숨기는 요령을 조금 더 터득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소통을 잘하고 싶거나 갈등관리를 잘하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도 나와 똑같은, 예민하고 상처 받기 쉬운 사람입니다. 그것을 언제나 가슴에 가지고 누군가를 대하는 것이 바로 소통의 시작입니다. "


그 날 강의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내 주위를 맴돌았다.


그렇다. 우리는 언제나 아주 작은 말들과 표정과 암시만으로도 상처 받을 수 있는 동물이다.

그러니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그에게 상처 주지 않아야 한다.


노을이 처연한 빛으로 하늘을 온통 물들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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