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하기를 바라는 마음

직장에서 만난 사람들

by 느리게 걷기

이토록 강렬하게 망하기를 바란 적이 있었던가? 나는 그녀의 발표가 망하기를, 그것도 폭삭 망하기를 바라고 있다. 1시간 뒤면 그녀의 발표가 시작된다. 나는 그녀가 망하는 장면을 유유히 지켜볼 것이다.


K는 내성적이고 말수가 없는 편이다. 그녀는 4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 차장으로 승진을 하지 못한 만년 과장이다. 그녀는 눈이 작고 두꺼운 안경을 끼고 있다. 그녀는 항상 어딘가로 숨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고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나는 가끔 복도에서 감정이 실리지 않은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과 마주쳤다.


그녀와 나는 파티션을 사이로 마주 보고 앉아 있다. 가끔 그녀가 한숨 쉬는 소리나 혼자서 투덜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우리 자리는 가깝다. (그녀는 불평 섞인 말을 중얼거리는 습관이 있다) 하지만 그녀와 나는 말을 주고받지는 않는다. 그녀가 말을 먼저 거는 타입도 아니거니와 나도 몇 번 말을 걸었다가 반응이 없는 시큰둥한 그녀의 태도에 실망해서 굳이 친해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침이 되면 아무런 인사도 없이 사무실로 쑥 들어와서 자기 자리에 앉아 있다가 퇴근할 때가 되면 역시 인사도 없이 사무실을 빠져나간다. 한 마디로 그녀는 호감이 가지 않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전화를 했다. 그것도 12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밤에 말이다. 나는 몸살기가 있어서 일찍부터 잠자리에 들어 있었다. 끙끙 앓다가 겨우 잠이 들었는데 핸드폰 소리에 눈을 떴다. 그녀였다. 늦은 시간에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다. 나는 마치 그녀가 불 꺼진 나의 방에 침입해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 아직 안 자고 있죠? 도움이 필요해서 전화를 했어요. "

그랬다. 그녀는 성과 발표회에 대표로 나가게 되어서 내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겨우 잠에 빠졌다가 강제로 그 잠에서 빠져나온 기분은 고약했다. 나는 몸이 너무 안 좋으니 내일 회사에서 이야기를 했으면 한다고 정중하게 전화를 끊었다.


생각할수록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우선 그녀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발표를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몇 년 전에 우연히 그녀의 발표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녀는 시종일관 화면 쪽으로 방향을 완전히 틀어서 뒷모습만 보인채 책을 읽듯이 어색하게 발표를 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또다시 발표를 하다니. 이게 무슨 일인가. 또한 그녀가 이 시간에 나에게 전화를 걸어온 것도 자연스럽지 않은 일이었다. 우리는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몇 년 동안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대면 대면한 사이란 말이다. 나는 다시 잠을 청했지만 한번 달아난 잠에 다시 빠져 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다음날 자세한 상황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그녀는 계속 승진에서 밀리고 있는 것이 존재감 부족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녀는 이번 발표회에서 멋지게 발표를 하고 임원들에게 눈도장을 찍어서 승진후보로 올라가겠다는 전략을 구상했다. 그녀가 무서울 정도로 적극적이어서 그녀의 팀장은 그녀에게 발표를 맡겼다. 물론 그녀의 팀장은 다소 떨떠름해했다. 그녀의 발표 실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모두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평소 회사에서 교육 업무를 담당하던 나는 얼떨결에 그녀를 도와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요즘 발표는 성과 위주보다는 콘셉트와 스토리가 중요하다. 똑같은 음식도 어떤 그릇에 담는가에 따라서 달라 보이는 것처럼 똑같은 내용도 재미있는 스토리와 감동이 있는 구성이 필요하다. 아이디어 회의에 들어가 보니 그녀는 아이디어를 내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계속 나에게 뭔가를 달라고 했다.

" 나는 뭔가 떠오르지가 않네요. 혹시 좋은 아이디어 없어요? 좋은 거 있으면 좀 줘봐요"

그녀는 마치 내가 좋은 아이디어를 책상 서랍에 비밀스럽게 넣어 놓고 공유하지 않는 것처럼 섭섭해했다. 일단 굵직한 스토리라인을 잡는 것은 당연히 그녀가 해야 할 일이었다. 책임감 없이 큰 일을 덜컥 맡은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많은 사람들 앞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려면 그에 걸맞는 숨은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그 노력은 업무를 추진했던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고 가장 고민해야 하는 부분이다. 발표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그녀의 태도가 실망스러웠다.

그러다가 나의 인내심에 한계가 온 것은 거의 준비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였다. 그 날 나는 중요한 보고를 준비하느라 점심도 먹지 못하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순간이었다. 그때 그녀의 전화가 왔다. 그녀는 발표 원고를 작성 중인데 자꾸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리고 도와주는 김에 차라리 '자기'가 다 작성해 주는 건 어떻냐고 물었다. 그랬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나를 '자기'라고 불렀다. 그녀와 나는 그전까지 전혀 친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가 나를 '자기'라고 부를 때마다 뭔가 근질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자기'라고 부르지 말라고 지적하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 날 나는 그녀의 말에 대꾸를 해 주기도 힘들만큼 지쳐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미안하다고 오후에 시간을 내서 다시 봐 드리겠다고 대답을 했다.


나의 인내심이 고작 이 정도였나 싶었다. 나의 신경은 마치 얇은 막에 쌓여 있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그녀가 조금만 더 나의 인내심을 시험한다면 나의 날카로운 신경이 얇은 막을 뚫고 마음대로 삐져나올 것 같았다. 그러면 그동안 겨우 억제하고 있던 나의 평정심은 사정없이 깨져 버리고 나는 그녀에게 버럭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질러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점점 그녀가 싫어졌다. 이제 파티션 너머로 그녀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는 순간도 싫었다. 근래 들어 갑자기 나에게 친한 척을 하는 그녀의 행동이 불편했다. 그녀도 필요에 의해 애쓰고 있겠지만 노력으로 어떤 사람과 갑자기 친밀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지금 나는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오만해져 버린 건 아닐까? 그녀의 어렵고 막막한 마음을 너무 몰라주는 건 아닐까?' 나는 회사에서 몹시 친절한 편이다. 성격상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고 무슨 일이든 도와줘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그런데 이제 그녀를 진심으로 도와주려는 마음보다 그녀의 일에서 발을 빼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다.


그 후에도 그녀는 잊을만하면 나에게 카톡을 보냈다.

" 지금 많이 바빠? 혹시 사람들이 웃음을 빵 터뜨릴 정도로 재미있는 멘트 있어?" 라거나

" 지금 바빠? 끝을 감동적으로 끝내고 싶은데 어떤 말을 하면 좋을까?" 이런 식이었다.

그녀는 2년 동안 나와 주고받은 말보다도 그 발표를 준비하던 한 달 동안 나에게 더 자주 연락을 했다. 이제 나는 카톡에 그녀의 이름만 떠도 가슴이 벌렁거릴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발표가 시작되었다. 망해라! 이런 유치한 악마의 속삭임이 나의 내면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잘했다. 예상보다 잘했고 실수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내 긴장한 표정으로 있었는데 발표가 끝나자 긴장이 풀렸는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그리고 그녀는 연단에서 조심스럽게 내려왔는데 멀리서도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끝났다는 안도감과 자기 스스로에 대한 만족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나는 뭔가 맥이 빠진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공식적인 행사에서 망하기를 바란 나의 마음이 얼마나 유치했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무도 모르게 혼자 민망해져 버렸다.


그녀의 발표가 끝나자 새로운 걱정이 생겼다. 혹시 그녀가 나에게 밥을 사려고 하면 어떻게 거절할까 하는 것이었다. 회사에서 꿀 같은 점심시간에 그녀와 밥을 먹고 싶지 않았다. 무미건조한 표정의 그녀와 밥을 먹으면 체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분 나쁘지 않게 거절하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 몇 가지 생각을 해 뒀다


그러나 그 고민은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밥을 먹자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예전의 그녀로 돌아갔다. 그녀는 내게 말을 걸지 않고, 나를 보고 웃거나 아는 체하지 않는다. 그녀의 호의를 어떻게 거절할지 걱정했던 것은 역시나 나의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녀가 호감 가지 않는 사람이라는 나의 예감은 슬프게도 적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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