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고생스러운 비즈니스석 탑승기라니!
# 개고생
무언가 잘못되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8월의 인천공항이었다. 밖에는 끈적끈적한 습기를 머금은 열기와 사정없이 작렬하는 태양이 있었다. 그러나 인천공항에 들어서는 순간 기분 좋은 에어컨 바람이 나를 환대했다.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날이었다. 인천공항까지 오는 차에서 신나는 음악을 들으며 한껏 흥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뒤늦은 여름휴가였다. 목적지는 여행자들의 천국이라는 방콕이었다.
나를 더욱 설레게 만든 것은 바로 나의 좌석이 비즈니스석이라는 사실이었다. 몇 년 전에 우연히 비즈니스석을 타 본 적이 있었다. 좌석을 원하는 대로 눕히고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나는 소심한 성격 탓에 언제나 좌석 등받이를 눕히지 못하고 90도 각도로 이코노미석에 앉아 여행하는 사람이었다. 하지정맥 때문에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고 오랜 시간 있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비즈니스석을 타면 다리를 쭉 뻗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승무원의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샴페인을 홀짝일 수도 있는 것이다.
나에게 또 비즈니스석을 탈 기회가 찾아오다니. 게다가 이 티켓은 파격적인 가격으로 획득한 티켓이었다. 타이항공 방콕 왕복 비즈니스의 가격은 1인당 40만 원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타이항공 에러 페어(Error Fair)라고 불렀다. 나는 회사 점심시간에 네이버 카페에서 우연히 정보를 발견했다. 흥분하는 바람에 중간에 조금 버벅대기는 했지만 무사히 예약을 마쳤다. 덕분에 4인 가족이 성수기를 살짝 빗겨 난 8월에 비즈니스석을 타고 방콕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여세를 몰아서 방콕 시내와 강변으로 숙소를 나눠서 2군데 예약을 끝내고 몇 가지 투어 프로그램도 신청을 했다. 호텔까지 할인된 가격에 예약을 끝내니 ' 어쩐지 이번 여행은 처음부터 술술 풀리는 것이 예감이 좋다' 싶었다. 그놈의 몹쓸 예감, 언제나 예감은 맞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기다리고 기다리던 출발 날이었다. 평소에는 수화물 무게 때문에 짐을 최소화 했는데 이번만은 달랐다. 비즈니스석은 40kg까지 수화물을 실을 수 있었다. 갖고 가고 싶은 것들을 고민 없이 여행용 트렁크에 던져 넣었다. 수영복과 오리발, 튜브, 두툼한 책도 여러 권 챙겼다. 짐을 다 싸고 보니 커다란 대형 캐리어가 2개, 중형 캐리어가 2개, 작은 가방이 1개였다. 남편도 기분이 좋은지 무거운 공항 카트를 가볍게 끌며 뒤를 따라왔다.
티켓 발권은 아시아나 항공 직원들이 대행했다. 우리는 서두른 덕분에 일찍 도착했다. 공항에 도착하자 이미 여행이 시작된 것처럼 마음이 설레고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비즈니스석 티켓 창구 제일 앞에 줄을 섰다. 나는 4개의 여권과 예약 확인증을 내밀었다. 그때까지 나는 이상 징후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나는 당당하게 여권을 내밀고 티켓이 발권되기를 기다리며 여유롭게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 일 처리가 엄청 더디네'라는 생각이 들 때쯤 갑자기 내 앞에 있는 직원이 다른 직원에게 SOS를 요청했다. 세 명쯤 되는 직원들이 내 앞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뭐라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지만 분위기만으로도 뭔가 불안하고 불길한 일이 시작되고 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 해외 항공사 티켓이라서 확인하는 게 복잡한가?' 이런 생각을 하며 애써 불안한 예감을 떨쳐내려 했다. 이번에는 남자 직원이 나타났다. 한눈에 보기에도 직급이 높은 사람 같았다. 그 남자 직원도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뭔가를 확인했다. 그의 표정 역시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뭔가 골치 아픈 일을 떠맡게 된 사람의 얼굴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그런 표정이었다. ' 이런, 일이 귀찮아지게 생겼군' 하는 표정으로 그는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며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했다.
내가 예약을 할 때 이름과 성을 잘못 입력했다는 것, 그래서 티켓 발권이 불가능하다는 점, 지금 상황에서는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점, 기존 구매한 티켓은 환불을 받고 새로 티켓을 예약해야 한다는 점, 그가 뭐라고 설명을 계속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부터 말들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다. 웅웅 거리는 커다란 벌집 통에 머리를 집어넣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빙빙 돌면서 어지러웠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아 들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발권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생각해 보니 예약을 할 때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핫딜을 발견해서 마음은 급한데 곧 점심시간이 끝나고 회의를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양치질도 하지 못하고 인터넷 사이트를 열어서 정신없이 예약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 예약 사이트에는 First name, Middle name, Last name을 적도록 되어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거기에 내 이름 석자를 영어로 나란히 적은 것이다. 그 전에도 영어 사이트에서 예약을 해 본 적이 있었는데 처음 보는 Middle name에 본능적으로 대응했을 뿐이다. 그때는 워낙 가격이 좋다는 생각에 판단력을 어느 정도 상실했고 빨리 예약을 끝내고 회의를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조급하기도 했다.
어쨌든 나의 예약은 그런 식으로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 이름과 성을 거꾸로 적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저희가 처리를 해 드리기도 하는데 이번 경우는 저희도 방법이 없습니다. "
아시아나 항공 직원은 더할 나위 없이 친절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나의 이름은 '동길홍'으로 예약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는 도와줄 방법이 없어서 스스로도 안타깝다는 듯이 머리를 저었다. 그의 얼굴에는 나의 딱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조차 슬며시 나타났다.
내 뒤에 줄을 선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뒤로 밀려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이들은 지쳐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도 상황의 엄중함을 이해했는지 투덜대거나 짜증을 부리지 않았다. 나의 표정과 몸짓에서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남편의 상태는 더욱 심각했다. 남편은 온몸으로 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다.
사실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황당한 실수를 자주 저지르는 편이다.) 몇 년 전에는 일본 가는 비행기를 김포-오사카, 오사카-인천으로 발권한 적도 있었다. 여행 전 날 확인하지 않았으면 인천공항으로 가서 김포발 비행기를 기다리는 바보짓을 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무수한 전적이 있다. 남편은 ' 역시' 하는 표정으로 나를 비난하는 눈빛을 은근하고 집요하게 보내오고 있었다. 남편의 얼굴을 보니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에 진이 다 빠진 얼굴이었다. 눈 아래 다크서클까지 짙게 내려와 있어서 퀭해 보였다. 남편이 끌고 온 공항카트 위에 웅장하게(?) 쌓여 있는 우리의 캐리어들도 갈 곳을 잃고 줄 바깥쪽에 밀려 나와 있었다.
아시아나 직원은 지하에 내려가면 '탑 투어'라는 여행사가 있으니 그곳으로 가서 다른 비행기 표를 알아보라고 알려 주었다. 남편은 급히 지하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그러나 금방 다시 올라왔다. 여행사가 이미 문을 닫았더라는 것이다. 핸드폰을 열어 항공권 검색 사이트를 열었다. 그러나 당일 출발하는 좌석은 이미 매진이었다. 다음날 출발하는 좌석은 가까스로 검색이 되었지만 가격이 엄청났다. 내가 예약한 티켓은 환불도 안 되는 티켓인데 이것이야 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인 것인가. 공항에서 노숙을 해야 하는 것인가. 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남편의 표정은 점점 고약해져 갔다. 그는 자신이 아군이 아니라 적군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나와 100미터 이상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고 공항 카트를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었다. 차라리 화를 내거나 불만을 쏟아 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남편은 입을 굳게 다물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기분 나쁘고 공격적인 표정으로 말이다. 나는 티켓을 발권한 회사의 콜센터로 전화를 했다. 그런데 ARS는 ' 이제 영업이 끝났으니 내일 전화를 걸어주세요'라는 야속한 멘트만 남기고 매정하게 끊어졌다. 이젠 방법이 없었다.
나는 아시아나 유니폼을 입은 조금 전의 그 멋진 남자에게 다시 다가갔다. 나는 딱한 사정을 호소했다. ' 탑 투어라는 여행사는 문을 닫았고 오늘 출발하는 비행기 좌석은 없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가장 심각한 것은 저기 공항 카트를 붙잡고 있는 저 남자인데 얼굴 한 번 봐주지 않으시렵니까?' 아시아나 직원은 내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나의 적군이 눈을 부라리며 이 쪽을 흘겨보고 있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아시아나 직원도 느꼈는지 흠칫 놀라는 분위기였다. ' 방법이 정녕 없을까요. 이러다가 공항에서 이혼하고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 나는 최대한 불쌍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고개를 조금 숙이고 웅얼거리듯이 말을 하는 바람에 가느다란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겨우 비집고 나왔다. 불안하게 손을 맞잡았다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가 최대한 불쌍해 보이도록 노력을 했다. 물론 그때 심정 자체가 그랬기 때문에 연기라기보다는 그저 감정을 최대한 표출해 보이는 정도라고 하는 것이 정확하겠다.
아시아나 직원의 감정에도 동요가 일었다. 그는 고민하는 눈치였다. 무언가 방법이 없지는 않구나. 나의 가슴에도 일말의 희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다시 발권창구로 돌아갔다. 그는 4장의 비행기 티켓을 발권했다. 그리고 이름 순서를 빨간색으로 정정해서 다시 기록했다. 그리고 그 위에 알 수 없는 도장을 찍었다. 그는 설명했다. 이 티켓으로 인천에서 나갈 수는 있지만 만약에 돌아오는 공항에서 이 티켓을 문제 삼으면 어쩔 수 없이 그 공항의 조치를 따르겠다는 내용의 도장이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이상의 선처라는 것이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었다. 나는 너무 고마워서 그의 손을 붙잡고 마구 흔들고 싶을 지경이었다. 내가 너무 심하게 감격하자 그는 조금 부담스러워하는 듯했다. 멋쩍게 웃으며 즐거운 여행되라는 말을 끝으로 그는 사라졌다.
상황은 급변했다. 비행기 출발 시간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면세점 쇼핑은 불가능했다. 라운지를 이용할 시간도 없었다. 적군에서 아군으로 발 빠르게 태도를 전향한 남편은 미친 듯이 공항 카트를 밀며 탑승구를 찾기 시작했다. ' 어려울 때에 진정한 우정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는데 역시 우리의 우정은 허상이었구나' 혀를 끌끌 차며 나도 탑승구를 향해 뛰었다.
다행히 비행기에 무사히 올랐다. 꿈에 그리던(?) 비즈니스석으로 이동했다. 그토록 갈망하던 비즈니스석의 기내식이 제공되었다. 결론적으로 타이항공 기내식은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 승무원들의 서비스도 국내 항공사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옆 눈으로 흘깃 남편을 살펴보니 조금 전의 긴장이 풀어졌는지 편하게 몸을 좌석에 붙이고 영화를 보고 있었다. 맥주를 추가로 주문하며 비즈니스석의 여유를 뒤늦게라도 만끽하려는 듯했다.
그러나 문제는 나의 심리상태였다. 인천공항을 무사히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돌아올 때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돌아올 때 방콕 수완나품 공항에서 또 이 난리를 쳐야 하는 걸까. 그나마 방콕에서는 말도 안 통할 텐데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그렇다고 남편이 도와줄 리도 없다. 우리 집에서 그나마 영어로 소통이 되는 사람은 나뿐이다. 남편의 영어실력이야 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고 여차하면 다시 적군으로 돌변할 것이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티켓을 해결하지 못하면 방콕에서도 내내 지옥일 것이다. 결국 이 문제의 책임자는 나였다. 그런 나의 복잡한 심경을 알지 못하는 남편과 아이들은 비즈니스석에서 다리를 쭉 벋고 잠을 자기 시작했다.
책임자인 나는 방콕에 도착해서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앞에서는 태연하게 행동하고 가족들이 잠든 밤에 몰래 일어났다. 그리고 미국 사이트(주소도 기억나지 않는)로 메일을 보냈다. 오랜 긴장으로 몸은 만신창이였는데 이상하게 머리는 맑게 깨어 있었다. 이 곳을 무사히 (?) 떠나야 한다는 일념 덕분에 체력의 방전쯤은 거뜬히 넘길 수 있었다. 나는 해결 방법을 알고 싶다고 메일을 보냈고 그 회사는 바로 다음날 회신을 보냈다. 회신의 내용은 그런 것이었다. " 당신이 발권을 이미 했기 때문에 이름을 수정할 수 없습니다. 돌아오는 공항에서 지시하는 대로 따르십시오. 당신의 여행이 즐겁고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
이건 뭐, 긍정의 신호도 부정의 신호도 아닌 애매한 답장이었다. 주사위는 던져진 셈이었다. 나도 그쯤 되니 진이 빠졌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경이기도 했다. 나갈 때 안 보내주고 문제를 삼으면 그때 가서 생각하자 싶었다. 인천공항에서 3시간 가까이 종종거리며 그 마음고생을 했는데 방콕에서 내내 걱정거리를 머리에 이고 다닐 수는 없었다.
우리는 며칠 동안 방콕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알찬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떨리는 가슴을 안고 수완나품 공항으로 갔다. 그런데 수완나품 공항에서는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너무나 빠르게 발권을 하고 내 손에 4장의 티켓을 쥐어주었다. 내가 밤새 끙끙거리며 고민하고 메일을 보낼 필요도 없었던 것인가. 어안이 벙벙했다. 어쨌든 우리는 별다른 고난과 역경 없이 무사히 티켓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우리는 대망의 라운지로 갔다. 타이항공은 비즈니스석 고객을 대상으로 30분간의 무료 마사지 서비스가 있다. 우리는 그 서비스를 받기로 했다. 남편과 나는 각자 다른 방으로 가서 마사지를 받았다. 마사지는 목과 어깨를 풀어주는 마사지였다. 짧은 시간, 앉아서 받는 마사지였지만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맛사지사에게 받는 것이라 몸의 뭉친 곳곳을 풀어주는 시원함이 있었다. 마사지를 받고 나오니 남편도 거의 비슷한 시간에 끝났는지 나오고 있다. 그런데 남편의 얼굴에 어딘가 어색한 미소가 흐르고 있다. 마사지가 별로였냐는 내 질문에 남편은 마사지는 좋았다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왜 표정이 그러냐고 물으니 그는 망설이다가 대답을 했다.
" 마사지가 끝나고 나서 맛사지사가 팁을 달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돈이 없다고 했지"
" 무료 서비스인데 팁을 달라고 강요를 했다는 거야?"
" 그게 아니라 나중에 보니까 내가 잘못 들은 거야. 맛사지사가 Tea?라고 물었는데 내가 Tip이라고 듣고서
No, I have no money라고 대답을 한 거지. "
남편은 영어 알레르기가 있다. 마사지가 다 끝난 후에 맛사지사가 따뜻한 차를 권했는데 팁을 달라는 것으로 알고 화들짝 놀라서 정색을 하며 돈이 없다는 대답을 한 것이다. 태국 돈(바트)을 공항에서 동전까지 다 털어 버렸으니 당황하기는 했을 것이다. 맛사지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차를 들고 나타난 후에야 남편은 자신의 리스닝이 또다시 사고를 쳤다는 것을 인식한 모양이다. 부끄럽고 민망해하며 남편은 도망치듯이 마사지 라운지를 빠져나갔다. 나도 덩달아 민망해서 빠르게 라운지 밖으로 나갔다.
하긴 생각해 보면 남편의 영어실력을 타박할 상황이 아니다. 남편의 어설픈 영어 실력은 단지 본인에게 민망하고 부끄러운 기억을 남겼지만 나의 어설픈 영어실력은 대형 참사로 이어질 뻔했다. 그때 그 친절한 아시아나 직원이 없었더라면 공항에서 노숙을 했을지, 남편하고 싸우고 여행을 엎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김영하 작가는 최악의 여행은 기억나지 않는 여행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그것은 최악의 여행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잊을 수 없는 여행'으로 기억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