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이라는 단어가 사형선고이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암이라는 병이 통제 가능한 질병으로 변화되고 있지만 그래도 암이라는 단어가 주는 섬뜩함은 여전하다. 이 책은 암병동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겪는 감정과 행동을 통해 삶과 질병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파벨 니콜라예비치(루사노프)는 스탈린 정권의 고위직 당원이다. 그는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나 불순분자들을 밀고한 덕분에 높은 지위와 혜택을 얻었다. 그의 삶은 경제적으로도 풍요롭다. 그저 고민거리라고 한다면 모스크바에 유행하는 인테리어 스타일에 어떻게 하면 뒤처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그의 목에 커다란 혹이 생겨나면서 그의 운명도 변화를 맞는다. 그는 병의 치료를 위해 암병동에 입원을 하지만 입원하는 날부터 모든 것이 불만스럽다. 그는 낡고 지저분한 병실 환경을 보고 기겁을 한다. 병실에 딸려 있는 화장실에는 환자들이 아무렇게나 흘려 놓은 오물과 소변으로 인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침상이 부족한 탓에 환자들은 제멋대로 복도나 계단에 누워 있다. 그는 불만에 찬 목소리로 특별 대우와 특실 배정을 요구하지만 모두 불가능한 일이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죽어 나가는 암병동에는 그저 침상이 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대기순서가 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루사노프는 결국 깨닫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호화로운 병원이 아니라 목에 혹처럼 달려 있는 종양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는 올레크는 유형수의 신분이다. 그는 전쟁에 참여했지만 친구와 주고받은 서신에서 스탈린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11년형을 선고받고 감옥과 수용소를 전전하였다. 그는 심각한 상태로 비에 젖은 장화를 신고 병원에 도착하지만 빈 병실이 없는 바람에 입원도 하지 못한다. 절망적인 심정으로 복도에 누워 자포자기하던 올레크는 친절한 의사의 도움으로 치료를 시작하게 되고 방사선 치료의 효과를 보면서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호르몬 치료를 받아야 하는 시점이 되면서 그는 갈등한다. 호르몬 치료라는 것은 결국 그가 가지고 있는 남성성을 없애고 여성의 호르몬을 주입하는 치료이다. 그 치료를 받게 되면 남자의 가슴도 여자의 그것처럼 커지게 되고 남성성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남자로서의 생산능력은 현격하게 저하되고 그에게는 리비도라고 하는 정신적인 남성성만 남게 되는 것이다. 책을 통해서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올레크는 호르몬 치료에 반발한다. 유형수로서 거주의 자유나 이동의 자유도 보장받지 못한 채 살아온 자신이 이제 남성성마저 잃은 채로 숨 쉬는 시간만 연장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그는 항변한다.
그에게도 자유에 대한 갈망은 존재한다. 그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휘날리며 여자 환자들이 입는 환자복 가운을 걸치고 병원 뜰을 산책한다. 그때마다 그는 펄럭이는 가운을 군인 혁대로 졸라매고 몰래 환자용 침대 아래에 숨겨 놓은 장화를 꺼내 신고 성큼성큼 걸어간다. 아무런 희망을 내비치지 않는 그에게도 남몰래 돌아가고 싶은 장소가 있으니 그곳은 바로 그가 오랫동안 유형수 생활을 했던 우시 테레크라는 곳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에게 자유가 주어졌을 때 다시 가고 싶은 곳은 바로 그가 살도록 강제받았던 유형지인 것이다. 비록 그는 강제적으로 그곳에 거주했지만 그곳에서 처음으로 친구라고 부를만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형성하고 자연을 느끼며 살았던 것이다. 그곳에서 삶이란 무엇인지 행복이란 무엇인지 희미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건강한 몸이 된 후에 그곳으로 돌아가리라는 꿈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술루빈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병실에 입원한 날부터 사람들과 대화를 주고받지도 않고 그저 앉아서 사람들을 물끄러미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는 인물이다. 커다란 눈을 가진 부엉이처럼 그의 시선은 한 곳에 꽂히면 움직이지 않고 그곳에 집요하게 머물며 결국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만들어 버린다. 그는 괄약근에 암이 전이되어서 괄약근을 잘라내고 옆구리에 똥주머니를 만드는 수술을 받아야 하는 신세이다.
술루빈은 한 때 대학교수였지만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추구하던 진실이 거짓이었다는 맹세에 기꺼이 가담하고 시대의 진실을 기록한 책들을 불태우고 교수직을 포기했다. 자신의 가족과 자식을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명예를 포기하고 자신의 신념을 미련 없이 내던졌다. 그러나 그 결과는 비참한 것이었다. 아내는 죽어 버렸고 아들과 딸은 멀리 떠나 버려서 남과 같은 관계가 되어 버렸다. 그는 자신을 자루에 비유했다.
" 나는 자루가 되었지. 그것도 낡고 형편없는 부품으로 가득 찬 자루 말이야. 그나마도 똥주머니를 차게 되었으니 이제 똥자루라고 해야 할까'
이것이 그의 슬픈 독백이다. 자식 때문에 본인의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고 미련 없이 던져 버렸지만 남은 것은 혼자라는 외로움과 암이라는 병마뿐이었다. 그에게는 희망이 없었다. 수술이 실패하면 죽을 것이고 수술이 성공하면 옆구리에 똥주머니를 찬 상태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혹여나 사람이 가까이 와서 앉기라도 하면 자신에게 고약한 냄새가 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움츠리는 삶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푸슈킨의 시가 인용된다.
"암울한 우리 시대에는 어디를 가든 인간은 폭군 아니면 배신자 그리고 죄수'
암울한 스탈린 정권 하에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결국 폭군, 배신자, 죄수밖에 없었다.
자신과 친밀하게 지내던 사람들을 감시하고 밀고함으로써 특권을 보장받았던 루사노프는 그 시대의 폭군이었다. 신념과 진실을 외면하고 불태웠던 술루빈은 배신자였고 정권에 불만을 품고 유형지에 유배되었던 올레크는 죄수였다. 그들은 모두 그 시대가 낳은 암울한 인간군상들이다.
그러나 폭군이든 배신자든 죄수 든 간에 결국 그들은 나름의 고통과 불행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약한 인간들이었다. 루사노프는 자신이 밀고했던 사람들이 복권되어서 언제 자신을 찾아올지 알 수 없다는 두려움에 떨면서 살고 있다. 술루빈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숭고한 이념을 다 부정했지만 아무것도 남지 않은 처절한 외로움과 지친 육신만 가지고 있다. 올레크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의 곁에는 가족도 친척도 남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시대가 낳은 불행을 온몸으로 떠안았다.
루사노프는 종양이 작아져서 퇴원을 한다. 그러나 그의 암은 특히나 전이가 빠르게 되는 위험한 암종이기 때문에 완치는 아니다.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는 차에 올라타고 신이 나서 병원을 빠져나간다. 그동안 암병동에서 지옥 같은 생활을 해 왔던 그는 암병동을 빠져나간다는 사실에 들떠서 잔뜩 흥분해 있다. 그는 암병동에 남은 불편하고 못마땅했던 사람들을 조롱하기라도 하듯 차의 경적을 마구 울리며 병원을 빠져나간다. 그러나 그의 병은 완치되지 못했으므로 그의 삶 또한 행복한 결말을 보장받지 못한다.
올레크도 병세가 어느 정도 호전되어서 퇴원을 하게 된다. 그는 병원을 나와서 그가 유형수 생활을 했던 '우시테레크'로 가는 기차에 오른다. 결국 갈 곳을 고민하던 그는 그의 유형지로 떠나기로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찬 기차는 천천히 출발하기 시작한다. 그 기차에서 가까스로 편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자리를 잡은 올레크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기차의 출발을 지켜본다. 통로 위에 매달아 놓은 그의 장화도 올레크의 마음처럼 서서히 흔들리고 기차는 그곳으로 올레크를 실어 나르기 위해 떠난다.
암병동은 스탈린 정권에서 각자의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암병동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나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나 암이라는 병 앞에서 얼마나 공평한 고통을 느끼는지를 보여준다. 즉 죽음의 예고 앞에서 인간에게 물질적 풍요로움이나 강한 신념이나 가족이라는 가치 또한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모래성일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이 책은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시대가 낳은 비극 속에서 각자의 삶을 위해 도생해 온 인간의 나약함을 누구도 비판할 수 없다. 그 상황에 직접 던져지지 않았으므로 그 시대의 불안과 두려움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우리는 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가고 그들의 슬픔과 고뇌를 같이 느끼면서 그 시대가 남긴 비극적인 아픔을 대리 체험해 볼 뿐이다.
' 낡고 덜컹거리는 비좁은 기차를 타고 자신을 가둬 두었던 유형지로 떠나는 올레크의 삶이 그가 원했던 것처럼 아주 작은 것에서 소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삶이기를 바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