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함, 결핍과 슬픔의 합작품

# 피아노

by 느리게 걷기

독실하고 극성스러운 할머니 덕분이었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주말 불교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법당에 들어가기도 전에 무섭다고 울고 도망가느라 바빴는데 나는 할머니를 자주 따라다닌 덕분에 금세 적응을 했다. 매주 빠지지 않고 열성적으로 절에 다녔으니 스님이나 불교 학교 선생님한테 사랑도 많이 받았다.


어느 날 한 아줌마가 내 또래의 여자아이와 같이 들어왔다. 그 아줌마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파마머리를 하고 있었다. 검은색 니트에 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다리가 날씬하고 길쭉했다. 그녀는 절에 피아노를 기부한 분이었고 우리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감사의 박수를 힘껏 쳤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시선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그 여자아이였다. 코 옆에 주근깨가 도드라져 보이는 아이였다. 그 아이는 도수가 높아 보이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우리가 부르는 법가의 반주를 위한 연주였다. 학교에서 오르간은 봤지만 그렇게 매끈하고 검은 피아노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어디 별나라에서 온 것만 같은 고상하고 부티나는 엄마와 딸의 등장부터 심상치 않았는데 바로 피아노를 연주하다니 입이 딱 벌어졌다. 그 아이는 처음 본 악보를 받아 들고 피아노 위에 펼쳐 놓더니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피아노 위를 자유자재로 날아다녔다. 법당 안은 늘 그렇듯이 적당히 어두웠다. 그 안에 초등학교 아이들이 10명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 어여쁜 친구는 수줍은 듯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우리는 그 반주에 맞춰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법당 안이 어두웠기 때문일까. 밖에서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는 가느라단 햇살이 길게 법당 안을 비추고 있었고 그 친구는 무대 위에 오른 연주자처럼 보였다.


그때부터였을까.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내게 생기기 시작한 것은. 나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다. 정말 미치도록 배우고 싶었다. 그러나 안 될 일이었다. 불가능한 일이었고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학교에 갔다 오면 엄마는 푼돈이라도 벌기 위해서 밭으로 일을 나가 있었다. 다 떨어진 내복을 기워서 물려가며 입히는 형편에 피아노 학원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초등학생이지만 눈치가 빤했던 나는 우리 형편에 피아노를 배우러 다니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엄마에게 말을 꺼내봐야 한숨을 길게 내쉬고 슬픈 눈빛으로 나를 바라 보리라는 것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것은 피아노를 잘 치는 친구들을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생각이었는지 나도 내 맘을 모르겠다. 나는 그다지 친하지도 않은 친구들을 주말마다 따라다녔다. 당시에 피아노를 잘 치는 친구들은 한정되어 있었고 그녀들은 대체로 형편이 좋은, 부잣집 딸들이었다. 그 친구들 집을 따라가 보면 거실이 있고 (우리 집은 거실이 없었으니) 주방에는 식탁도 놓여 있었다. 그리고 바로 피아노가 있었다. 피아노는 대체로 거실 중간에 위용을 뽐내며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친구들에게 연주를 청하고 소파에 앉아서 연주를 들었다. 당시에 친구들이 연주하는 곡은 대체로 '엘리제를 위하여'나 '터키 행진곡'처럼 귀에 익은 곡이었다. 친구들은 신이 나서 연주를 했다. 자신의 집으로 찾아와서 꼼짝도 않고 꼿꼿하게 앉아서 자신의 연주를 2시간 가까이 들어주는 관람자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이었겠는가. 그래서 그렇게 이상하고 지루한 연주회-친하지도 않은 친구 집을 따라다니며 대리 만족하는-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나는 결단을 내리기로 마음먹었다. 수중에 가지고 있는 돈은 명절 때 모은 용돈뿐이었다. 그나마 우리 집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외삼촌이 항상 넉넉하게 용돈을 주는 덕분에 엄마에게 일부를 뺏기고도 몇만 원은 손에 쥘 수 있었다. 피아노 학원은 한 달에 3만 원인가 4만 원쯤 했다. 나는 피아노 학원 두 달치 정도의 돈을 모아서 학원에 등록을 했다. 바로 그 다리가 날씬하고 우아한 아줌마가 하는 피아노 학원이었다. 그녀는 동네에서 피아노 학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머리에도 아는 집에 가서 배우면 더 잘 가르쳐 줄 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굳이 그 학원에 등록을 하고 매일 피아노를 치러 다니기 시작했다. 정말 열심히 다녔다.


그때 내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라는 선생님의 말이었다. 나는 피아노 연습실에서 피아노를 치다가 선생님이 등 뒤에 다가오기만 해도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선생님 입에서 바로 그 말이 나올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커다란 방에 피아노 3대가 놓여 있어서 다른 아이들의 피아노 소리와 마구 섞이는 덕분에 내가 내는 피아노 소리가 온전하게 들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한 공간을 떠나기 싫었다. '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나는 가슴속으로 간절하게 빌면서 피아노를 두들겼다. 그러나 결국 그 순간은 오고야 만다. 그러면 나는 책을 접어서 가방에 넣고 피아노 뚜껑을 잘 덮은 다음에 실망한 표정을 애써 숨긴 채로 나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실망스러운지 밖으로 나오면 온 몸에 힘이 주욱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 골목을 터덜터덜 걸어 나오던 길은 언제나' 더 오래 연습하지 못했다는 아쉬움'과 ' 이 즐거운 시간이 곧 끝날 것'이라는 두려움의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길이었다.

선생님은 나의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단 두 달만 다닌다는 사실을 얘기했을 때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엄마와 통화를 해 보겠다고 했다.

정말로 그녀는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는 안방 경대 위에 놓여 있던 전화기를 받아 들었다. 엄마의 표정을 본 순간 나는 힘들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엄마는 피아노 학원 선생님의 설명과 설득을 인내심 있게 듣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결정을 내린 담담한 표정이었다. 엄마는 습관처럼 옆에 놓여 있던 가계부를 꺼내서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없던 돈이 가계부에서 튀어나올 리도 없는 것이고 엄마가 모르는 돈뭉치가 어디에 숨어 있을 리도 없었다. 결국 그렇게 성과 없이 통화는 끝이 났다.


먹고 살기가 막막한 시절에 피아노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나에게 피아노 학원을 등록해 주면 줄줄이 동생들도 보내 달라고 울고불고 떼를 쓸 것이 뻔한 일이니 애초에 싹을 자르는 것이 좋겠다고 엄마는 생각했던 것 같다. 냉정한 엄마의 표정을 맥없이 바라보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 다른 아이들은 피아노를 배우기 싫은데도 억지로 다니고 있는데, 내가 얼마나 잘하는지 엄마는 알지도 못하면서 어쩌면 저럴 수가 있을까? 피아노 학원 보낼 능력도 없으면서 왜 애들을 이렇게 줄줄이 낳은 거야. 바보 같은 엄마, 무능력한 엄마"

나는 애꿎은 종이에 연필로 마구 의미 없는 도형들을 그리며 엄마를 원망하고 비난했다. 그래도 화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혼자 분해서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결국 피아노는 나한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면서 분을 삭였다.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몇몇 또래 직원들끼리 피아노를 배워보자는 제안이 나왔다. 회사 건물 바로 앞에 상가 건물이 있고 2층에 피아노 학원이 있었다. 각자의 사정으로 피아노를 배우고 싶은 4명의 직원들이 동시에 등록을 했다. 그녀들은 길고 하얀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손가락은 굵고 거칠었다. 손등에는 핏줄도 튀어나와 있었다. 엄마를 닮아서 ' 일하지 않아도 일하고 살아온 사람의 그것'처럼 검고 굵은 나의 손, 왠지 하얀 피아노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는 일이 부끄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우리는 매일 점심시간을 아껴서 피아노 학원으로 달려갔다. 레슨은 일주일에 2번, 그리고 연습은 매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 한 달 만에 한 명이 그만뒀고 몇 달 후에 또 한 명이 그만두었다. 마지막까지 남은 나와 지연 씨는 꽤 오래 다녔지만 그녀도 1년이 넘어가자 흥미를 급격히 잃은 눈치였다. 할 수 없이 나만 남았다.

나는 4년인가 5년을 피아노 학원을 다녔다. 내가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등 뒤로 꼬마들이 나를 구경하러 왔다. 피아노 연습 방에는 조그만 투명창이 달려 있어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 그 작고 천진스러운 꼬마들이 보기에는 뽀글 머리 아줌마가 연습실에 틀어박혀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바이엘을 시작으로 김광민 곡이나 이루마 곡을 연주할 수 있는 수준까지 차츰 올라갔다. 김광민의 '학교 가는 길'이나 히사이시 조의 'Summer'를 연주할 때면 혼자 감격하거나 나에게 도취(?)되기도 했다.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나는 언제나 13살의 초등학생으로 돌아간다. 피아노를 마주하고 앉아서 피아노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고 피아노 의자를 당겨서 앉는다. 잠시 숨을 고르고 조심스럽게 건반을 누르기 시작하면 음악들이 다정한 속삭임처럼 나에게로 다가온다.


언제나 피아노를 칠 때마다 나는 나의 유년 시절의 기억과 그때의 감정을 고스란히 다시 느끼며 그곳으로 돌아간다. 간절함은 결핍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므로 결국 아픈 결핍이 더 큰 간절함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결핍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슬픔과 맞닿은 순간에야 비로소 그 간절함은 더욱 진지해지고 더욱 간절해진다.


결국 그토록 간절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포기하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아주 오래 걸려서 돌아왔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오늘도 나는 피아노 앞에 앉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맛집 입성 자격 조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