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리게 걷기 Nov 21. 2020

맛집 입성 자격 조건

맛집 앞에 줄 서는 청춘

 오랜만의 지인 모임이었다.

장소는 요즘 핫하다는 서울숲 카페거리였다. 비가 그친 후 날씨는 역시나 변덕스럽다. 며칠 전까지 낮 기온이 17도를 웃돌았는데 오늘은 바람이 어찌나 차고 매서운지 발끝이 시렸다. 우리는 유명한 파스타 맛집으로 가기로 했다. 일행은 모두 4명이었다. 그 식당은 최근에 유명 여자 연예인이 자신만의 맛집이라고 소개를 한 곳이다. 게다가 퓨전 파스타라는 특이한 메뉴를 선보이고 있다고 하니 기대가 되었다.


 목적지 근처에 오니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줄을 서야 하는가 살펴보니 정말로 줄이었다. 식당이 오픈하기 전부터 기다리는 열성적인(?) 줄이었다. 식당은 저녁 6시부터 영업을 시작한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5시 30분이었으니 30분을 꼬박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한 젊은 커플을 제외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은 모두 여자다. '역시 이런 날씨에 파스타 집을 찾는 것은 여자란 말이지'. 새삼 고개를 끄덕여 본다.


가게 앞에는 아직 Closed라는 안내가 붙어 있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어서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다.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고 셰프 의상을 한 요리사 몇 명이 살짝 보인다. 그들은 분주하게 오픈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은 5명이었다. 뒤에는 4명이다. 이 정도면 식당이 오픈하면 바로 들어갈 수 있겠다는 계산이 나온다.


드디어 6시가 되었다. 블라인드가 올라가고 가게 내부가 훤히 들여다 보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가게가 작다. 작은 게 문제가 아니라 테이블이 모두 바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오픈형 주방 앞으로 의자가 8개 정도 있고 창가 쪽에 역시 바 형태로 의자가 5개 정도 있다. 줄을 선 사람을 어림해 보니 그래도 우리까지는 앉을 수 있을 것 같다.


매니저가 나왔다. 그는 갑자기 "OOO 씨"하고 이름을 불렀다. 우리 뒤에 있던 4명의 여자들이 우르르 앞으로 갔다. 예약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가장 먼저 들어갔다. 우리 앞에 서 있던 사람들도 순서대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 식당도 거리두기로 손님을 앉게 하는 모양이다. 이러다가 못 앉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슬며시 밀려온다.


그런데 우리 앞에 서 있던 여자분이 뭔가 다급해 보였다. 매니저에게 호소하는 내용을 들어 보니 일행이 아직 안 왔다는 것이다. 매니저는 일행이 다 같이 들어가지 않으면 다음 손님에게 순서를 양보해야 한다고 대답을 했다.

(너무 야박한 것 아닌가) 그리고 시계를 보더니 일단 6시 10분까지 기다려 보고 만약 그때까지 일행이 도착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순서를 양보해야 한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 여자분은 20대 초반의 젊은 아가씨다. 추운 날씨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체크 모직 재킷을 걸치고 있고 밑에는 짧은 치마를 입고 있다. 스타킹도 아주 얇은 것을 신고 있다. 롱 패딩에 중무장을 하고 모자까지 쓰고 있는데도 이렇게 추운데 그녀는 보기만 해도 춥다. 그녀는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손길이 다급한 걸로 봐서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일행에게 거는 전화이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엿들으려 한 것은 아닌데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다 들렸다.)

" 15분? " 그녀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 내가 지금 몇 분을 기다린 줄 알아? 30분 넘게 식당 앞에서 줄을 섰다고.

 그런데 6시 10분까지 일행이 안 오면 못 들어간대. 알아서 해"

그녀는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이쯤 되면 상황은 흥미진진해진다. 그녀의 일행은 아마 6시 15분쯤 도착할 수 있다고 한 것 같다. 그러면 그녀는 오랫동안 기다린 보람도 없이 우리에게 앞 순서를 양보하고 다시 뒤로 가야 한다. 오늘 핫플레이스를 방문하기 위해 잔뜩 멋을 부린 아가씨의 어깨에는 짜증과 불안, 초조함이 그대로 묻어 있다. 그녀는 몸을 조금이라도 덥게 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초조함을 달래기 위해서인지 제자리에서 계속 다리를 움직이며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리는 모양새가 애처롭기까지 하다.


뒤에 있는 우리는 그녀와 상반되게 사뭇 여유롭다. 의도치 않게 엿들은 전화통화를 통해서 그녀의 일행이 지금 꽤 먼 곳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벌써 6시 5분이 다 되었는데 무슨 수로 그 일행이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니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런데 반대편 도로에 누군가 달려오고 있다. 20대 초반의 단발머리 아가씨다. 그녀도 오늘 날씨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얇은 옷차림이다. 갈색 핸드메이드 코트를 입고 굽이 높은 앵클부츠를 신고 있다. 옆에는 작고 앙증맞은 겨자색 크로스백을 메고 있다.


그런데 그녀는 달리고 있다. 횡단보도 신호를 받으려는 눈치다. 신호등은 파란색이지만 금방이라도 빨간색으로 바뀔 듯이 불안하게 껌벅거리고 있다. 그녀가 과연 그 신호를 건널 수 있을까? 지켜보는 우리 모두는 어느새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다.

그녀는 달린다. 꽤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서 겅중겅중 잘도 달린다. 그리고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신호를 받았다. 그리고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식당은 2~300미터 정도 더 와야 하니까. 바로 앞에는 커다란 주유소가 있다. 그녀는 거리를 단축할 요령인지 그 주유소를 가로질러 달려오고 있다. 그녀가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6시 9분이었다. 대단한 달리기 실력이었다. 그녀는 식당 앞에 도착해서 거친 숨을 몰아 쉬었다. 그녀를 애타게 기다리던 그녀의 친구는 이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그녀를 보고 웃음을 지었다. 승리와 안도의 웃음이다. 매니저가 나와서 그 두 명의 숙녀를 식당 안으로 안내했다.


초원을 달리는 기린처럼 겅중겅중 바람을 가르며 달려오는 그 귀여운 아가씨를 보고 있노라니 나도 모르게 그녀를 응원하고 있었다. 넘어질까 애처로운 모습에 " 양보할 테니 천천히 오세요 "하고 소리치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 둘이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메뉴를 받아 들고 있다.


흥미진진한 경쟁이 싱겁게 끝나고 우리도 발길을 돌렸다. 역시 맛집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다. 특히나 일상조차 동경을 불러일으키는 연예인의 맛집이라니 인스타를 하는 젊은 청춘들이 얼마나 가고 싶어 할 것인가?


맛집을 가기 위해서는 많은 기다림과 인내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새삼 터득했다.


아니, 그뿐이 아니다. 가끔은 거기에 더해서 엄청난 달리기 실력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작가의 이전글 가을, 길 위의 그리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