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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Nov 19. 2020

가을, 길 위의 그리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언제나 가을이다.

가을 소풍을 다녀오는 길에 코스모스 군락을 만난 적이 있다. 그때는 지금처럼 봄이나 여름에 코스모스가 피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코스모스는 반드시 가을에만 피는 꽃이었고 코스모스가 무리 지어 피어 있다는 것은 가을이 아주 가까운 곳에 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였다.  


건조하고 시원한 공기, 하늘 위로 낮게 드리워진 구름의 장막, 그리고 옅은 분홍색과 흰색이 뒤섞인 코스모스가 마구 흔들리며 만들어내는 향연, 길게 포물선을 그리며 쓸쓸히 흔들리는 억새풀,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음울한 가을의 오후였다. 가을은 그렇게 눈물 나는 계절이었고 아름답고 쓸쓸한 무언가를 남기고 사라졌다. 그것이 외로움이었는지 그리움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그의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는 20대 후반으로 보였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나이가 많을지도 모른다. 그는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선천적으로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그의 걷는 모습은 위태로웠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나의 시선은 조금 오래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러나 혹시라도 나의 시선을 그가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서둘러 눈길을 거두었다.

그의 키는 165 정도였고 얼굴은 어두운 표정이었다. 그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그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지고 팔과 다리도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는 양손에 목발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목발을 짚지 않고 손에 든 채로 걸었다.  

그것은 힘겹고 기이해 보이는 광경이었다. 그의 커다란 목발은 양쪽 손에 들린 채로 허공에 마구 휘둘리고 있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마치 그가 목발을 휘두르며 공격을 하려는 사람처럼 보일만큼 부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나는 그 남자를 스쳐 지나간 후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 저 사람 왜 목발을 휘두르면서 걸어가는 거야?"

남편은 모르겠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 저 사람 걷는 연습을 하고 있는 거잖아. "


, 그 사람은 걷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지 못했다. 그가 왜 목발을 짚지 않고 들고 가는지를. 그는 목발을 양손에 들고 휘청휘청 위태롭게 걸어서 사라졌다. 나는 그 후로도 그가 걷기 연습을 하는 것을 몇 번 더 보았다. 언제나 같은 장소에서 그는 일정한 속도로 걸었다. 그의 얼굴에는 특별한 감정이 실리지 않아서 그의 기분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대체로 그는 지쳐 보였고 가끔은 힘에 부친 듯 거친 숨소리를 내기도 했다.


도서관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넓은 인도를 따라서 걸었다. 길에는 가지런한 보도블록이 깔려 있고 길 양 옆으로는 커다란 나무 아래 낙엽들이 제법 많이 떨어져 있다. 낙엽은 얼마 전까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인도를 가득 덮고 있었는데 갑자기 내린 비 덕분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러나 길은 여전히 아름답다. 흐린 잿빛과 불타오르는 빨간 빛깔과 샛노란 빛깔들이 마구 뒤섞여서 채색된 한 편의 풍경화처럼 멋스럽다.


 오늘도 그는 그 길에 있었다. 그러나 오늘은 혼자가 아니다. 그의 옆에는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사람이 함께 있었다. 그녀는 얇은 보라색 패딩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50대 중반을 넘긴 그녀의 머리는 염색할 시기를 놓친 흰머리들이 무성했다. 둘은 나란히 걸었다. 오늘도 그는 목발을 들고(휘두르며) 걷고 있다. 그가 걷다가 잠깐 멈추면 그의 어머니도 멈춰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느린 속도로 걸었다. 나도 그 뒤를 따라서 천천히 걸었다. 급할 것이 없는 날이었고 계절을 느끼고 싶은 날이었으니.

길은 아직 미끄러웠다. 비에 젖은 낙엽들이 파르르 떨며 인도 위에 누워 있었다.


이 비가 그치면 계절은 가을보다 겨울에 가까워질 것이다. 우리 곁에 언제 가을이 있었던가 아득해질 만큼 가을은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공기는 차갑게 얼어붙고 그리움을 자아내던 풍경은 을씨년스럽게 변할 것이다.

 

그렇게 계절은 왔다가 사라지는 법이다. 내가 온전히 그것을 느끼기도 전에 말이다.  

좋은 것은, 소중한 것은 늘 그렇게 왔다가 가 버린다. 아쉬움을 남기고.


그의 지친 어머니와 나의 지친 어머니 모두에게 이 계절이 아름다운 의미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에게도 이 계절이 아름다운 음영을 길게 드리우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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