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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Nov 18. 2020

남이 타주는 커피가 더 맛있나요?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 영화를 보고 생각하다!

" 어떤 영화 보고 싶으세요" 팀 막내가 묻는다. 그리고는 지금 상영하고 있는 영화 목록을 주욱 나열한다.

잠깐 생각해 본다.  " 아무거나 상관없어. " 사실 그렇다. 회사 체육대회란 얼마나 지겹고 재미없는지 사실 이런 행사가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원래 회사 체육대회는 여러 팀이 다 같이 인근의 산을 오르는 행사였다. 그러나 나지막한 산에서도 사고는 나기 마련이고 가끔은 술 취한 남자 직원들 간에 싸움도 벌어졌다. 그래서 회사는 특단의 대책으로 팀 단위 행사를 권장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영화 보고 뷔페에서 밥 먹고 헤어진다.  


영화관에 도착하고 보니 코로나 덕분에 좌석은 거리두기 형태로 앉게 되어 있다. 작년에 우리 팀원들은 한 줄로 나란히 앉았다. 앉고 보니 옆자리가 팀장이었다. 들어오는 순서대로 자연스럽게 앉았는데 들어올 때 별생각 없이 밀고 들어오다 보니 그렇게 낙점된 것이다. 그 날 본 영화가 무엇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영화관 옆 좌석끼리 그렇게 가깝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쉴 새 없이 팝콘을 아구작 거리며 쩝쩝거리는 팀장의 소리를 들으며 2시간여를 앉아 있는 것은 고통이었다.

이번에는 다행히 다들 떨어져 앉았다. 평일 오전에 영화관은 상영관을 통째로 전세 낸 것처럼 텅텅 비어있다. 우리를 제외하고 드문드문 앉아 있는 사람들은 서너 명에 불과했다.


오늘의 영화는 '삼진 그룹 영어 토익반'이라는 레트로 영화였다. 여상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고졸사원으로 취업한 여직원들의 고군분투를 그린 이야기다. 고졸사원이 출근을 하면 사무실은 전쟁터처럼 처참하다. 사무실에서 흡연이 가능했던 시절이었으니 사무실 책상 위에는 담배꽁초들이 가득 쌓인 재떨이가 놓여 있고 전날 먹은 컵라면과 쓰레기가 어지럽다. 그것을 청소하는 것으로 그녀들의 일과는 시작된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중요하고 하루도 빠트릴 수 없는 일은 바로 커피를 타는 것이다. 그녀들은 팀에 있는 직원들 모두를 위해서 (그들의 취향까지 빠짐없이 반영하여) 커피를 타기 시작한다. 유니폼을 입은 여러 명의 고졸사원들이 한꺼번에 커피를 타고 있는 모습은 지금에야 우스꽝스럽게 비치지만 당시에는 너무도 당연한 풍경이었을 것이다.


이제 여직원이 커피를 타서 날라다 주는 것은 보기 힘든 일이 되어 버렸다. 더구나 여직원이 남자 직원이나 상사에게 커피를 갖다 주는 일은 더욱 어색하고 이상한 풍경일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장면에서 나는 불편함을 느꼈다. 우리 사회가 비약적으로 발전해 왔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도 그런 비민주적인 행태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분노?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나와 한 칸 거리두기를 하고 앉아 있는 이 차장이 혹시 민망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렇다. 이 차장은 지금도 스스로 자발적으로 커피 타기를 하고 있다. 그녀는 우리 팀에서 가장 연장자다. 게다가 우리 사무실은 작년에 에스프레소 커피 머신이 설치되었다. 누구나 간편하게 커피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구축이 된 것이다. 이제 컵을 갖다 놓고 버튼만 누르면 커피가 추출되어서 나온다. 꽤 비싼 기계를 들여서인지 커피맛도 상당한 수준이다. 진하게 먹고 싶을 때는 두 개의 컵이 그려진 버튼을 누르면 되고 연하게 먹고 싶을 때는 한 개의 컵이 그려진 버튼을 선택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그런 멋진 기계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차장은 하루에 2번, 커피를 내린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그녀의 커피 내리는 작업은 시작된다. 그녀는 얼마나 정성스럽게 그 작업을 수행하는지 가끔은 전문 바리스타의 포스를 풍긴다. 드립은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다. 그녀는 인내심 있게 두 잔의 커피를 내려서 직접 서빙까지 한다. 그리고 점심식사 후에도 똑같은 작업을 한다. 그녀는 사무실에 들어와서 2잔의 커피 드립을 하고 서빙까지 훌륭하게(?) 완수한다.


 그런 모습이 싫었다. 처음에는 괜찮다고 사양하던 상무님이 어느 순간부터 당연한 듯이 커피를 기다리고 앉아 있는 것도 어이없었다. 팀장은 더 코메디다. 이 차장이 상무님에게만 매일 커피를 갖다 주다가 어느 날부터 팀장님 것까지 두 잔을 내리니까 고맙고 황송해서 어쩔 줄 모른다. 이 차장이 팀장 책상에 커피를 살짝 내려놓으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짜내서(?) "감사합니다!"하고 미소를 짓는다.


그럴 때마다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쳤다. 이 차장은 왜 굳이 커피 셔틀을 자처하는 걸까?  이 차장이 휴가를 가면 혹여라도 다른 직원이 그 역할을 할 거라 기대할까 싶어 그런 날은 아예 커피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다. 그런 날 보면 상무님이나 팀장님 둘 다 커피를 스스로 잘 알아서 찾아 먹는다. 그러나 그들도 그런 '대접받는 기분'이 싫지는 않은 것이다. 점심식사 후 노곤한 상태에서 누군가 금방 내린 따뜻한 커피를 대령하는데 굳이 인상을 쓸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한동안 그런 일련의 과정이 못마땅해서 혼자 속을 끓였다. 시대에 역행하는 태도라며 분개했다. 여직원 망신을 다 시킨다는 생각에 한심했다. 회사에 왔으면 일을 하고 성과로 인정받아야지 여기에서 또 사적인 감정을 이용해서 정치라도 할 셈이냐는 생각에 분노도 일었다.


그런데 함께 보고 있는 영화 초반부에 떡하니 커피셔틀을 하는 장면이 풍자적으로 나왔으니 나는 내심 이 차장의 기분이 불편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어쩌면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서 더 이상은 커피 셔틀을 하지 않으려나 기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언제나 예상은 빗나가는 법이다. 그다음 날에도 이 차장은 출근하자마자 유유히 핸드드립을 시작했다. 썰렁한 사무실에는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져가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면 회사에서 힘든 일의 대부분은 사람에 관련된 것이다. 일이 많아서 힘든 것보다 사람이 싫어서 힘든 것이 더욱 사람을 지치고 피곤하게 만든다. 더구나 나와 성향이나 성격이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 '이해할 수 없다' 하고 머리를 흔들 때가 사실은 제일 힘든 순간이다. 그런 불편하고 불쾌한 생각은 쉽게 떠나지도 않고 종일 따라다닌다. 정말 피로하고 의미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쉽게 초연해지지 않는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리라.


이 영화는 유나라는 인물의 대사로 끝을 맺는다. 유나는 강하고 인정 없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정 많고 따뜻한 매력적인 인물이다. 유나는 그녀에게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고 시샘하는 조 대리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난다. 그리고 그녀는 조 대리에게 외친다.  


" 나 좀 그만 보고 너를 봐, 니 인생이나 신경 써"


그렇다. 나는 그 장면이, 그 대사가 좋았다. 그냥 시원하고 통쾌했다. 나는 그 대사가 마치 나에게 툭 던져주는 메시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따지고 보면 결국 이 차장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매일 커피를 내리고 날라다 주고 하는 일련의 행동도 그녀가 나름 선택한 처세술인 것이다. 누구도 요구하지 않은 귀찮은 임무를 스스로에게 부여하면서 받는 스트레스나(만약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후배들 보기 민망한 비굴함도 그녀의 몫이다.


그런 그녀 때문에 분해서 속을 끓일 필요가 뭐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세상에는 기분 좋은 일들이 더 많고 직장에도 좋은 사람들이 더 많은데 그런 생각들로 나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굳이 있을까.


그래서 나는 그녀를 미워하고 억울해하는 대신에 나에게 조금 더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의 행동을 그만 주시하고 그냥 나를 생각하기로 말이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평가하고 비난하는데 들이는 소모적인 시간을 털어 버리기로 말이다.


당장 쉽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렇게 조금 더 가벼워지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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