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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Nov 17. 2020

대하 300km 수송 작전

  이번 회식에 빠질 생각 말라고 이대리님이 말했다. 그것도 그냥 회식이 아니다. 버스를 통째로 전세를 내서 직원들 20~30명을 한꺼번에 식당까지 실어 나르는 회식이란다.


  가기 싫었다. 어떻게 빠질까 궁리를 했는데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이제 겨우 입사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신참이었다. 선배들과 하늘 같은 부장님까지 참석하는 회식에 빠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퇴근 시간에 맞춰서 전세 버스가 회사 앞에 도착했다. 무슨 회식을 이렇게 요란하게 하는가? (그때는 이런 이벤트를 종종 기획하던 시절이었다.) 가는 곳은 서해안 남당리라는 곳이다. 제철 대하를 먹으러 가는 회식이었다. 나는 그전까지 대하를 보지도 먹어보지도 못했다. 내가 사는 곳이 내륙에서도 한참 들어가 있는 내륙이니 그런 해산물을 먹어볼 기회가 없는 것이 당연했다. 커다란 새우를 먹는다는 것이 왠지 징그럽게 느껴졌다. 

나는 ' 대하를 못 먹어요'라고 말했다. 그런 핑계를 대고 회식을 빠져볼 참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옆에서 아우성이다. 결국 떠밀리듯이 전세버스에 올랐다


직원들은 대부분 30대~40대 아저씨들이고 간간히 30대 후반의 여자 선배들이 섞여 있다. 그때 나는 20대 중반이었으니 그 모임이 재미있을 턱이 없다. 게다가 그 날따라 나는 직장과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럽고 불편한 옷을 입고 있어서 더 가기 싫었다. 지긋지긋한 백수생활이 끝나고 통장에 월급이 들어오자마자 백화점으로 달려가서 산 옷이다. 나와는 처지가 다른 부잣집 친구들이 따라와서 골라준 옷이다. (한 명은 아버지가 사장님이고 한 명은 엄마가 한식 요리전문가였다.) 그 친구들은 이제 이 정도 옷을 입어야 한다며 백화점에서도 비싼 브랜드로 끌고 가서 한 벌 짜리 바지 정장과 실크 스카프를 골라 줬다. 사실 가격표를 본 순간 심하게 심장 박동이 요동을 쳤다. 그러나 신이 나서 옷을 골라주고 뿌듯해하는 친구들을 실망시킬 수 없었다. 결국  6개월 무이자 할부로 그 옷은 내 것이 되었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그 옷이 당키나 했었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내 월급도 그런 고가의 옷을 살만큼 넉넉하지 않았다. 또한 내가 발령받은 곳은 변변한 서점 하나 없는 군 단위 작은 소도시였다. 그곳에서 그 비싼 옷은 어울리지도 않았고 굳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샀으니 입어야 한다. 나는 주말이면 그 고급스러운 카키색 정장과 그레이톤의 실크 스카프를 휘날리며 돌아다녔다. 게다가 그 옷은 조금 작았다. 항상 옷을 살 때마다 살이 곧 빠질 거라는 근거 없는 기대감 때문에 조금 작은 사이즈를 고르기 때문이다. 


하여간 그 옷을 입고 대하구이 식당으로 들어섰다. 대하는 식당 테이블 위에 있는 커다란 프라이팬에 소금을 깔고 구워서 먹는 방식이었다. 특히 오늘 우리를 위한 대하는 자연산 대하라고 사장님은 자부심이 가득한 얼굴로 설명을 덧붙였다. 처음 대하를 보았을 때는 어딘가 징그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하는 다리가 많고 기다란 수염이 달린 데다 까만 눈이 앙증맞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대하가 익으면서 먹음직스러운 빨간색으로 변하기 시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대하의 살은 쫄깃한 식감을 자랑하고 바싹 구운 머리는 과자처럼 입안에서 부서졌다. 나는 허리에 있는 후크까지 살짝 풀고 본격적으로 대하를 먹기 시작했다. (아가씨다운 수줍음 따위는 없었다. )


 그런데 대하를 먹고 나니 새로운 욕심이 생겼다. 바로 가족들에게 대하를 먹게 해 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의 직장에서 집까지는 약 300km, 그러나 문제는 거리가 아니었다. 바로 직장에서 집까지 가기 위해서 겪어야 하는 험난한 경로였다.


직장에서 기차역까지는 일단 택시를 타야 한다. 그다음에 장항선에 올라 천안까지 간 다음 내려서 경부선을 갈아 타고 김천역까지 와야 한다. 김천역에 내리면 또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김천역에서 버스터미널까지 가는 길도 만만치 않다. 일단 역에서 이어지는 육교를 올라간 후에 굴다리처럼 생긴 꽤 기다란 길을 걸어가면 버스 터미널이 나온다. 거기에서 버스를 타고 또 1시간 30분 가까이 가야 고향집이 있는 도시에 도착할 수 있다. 빠르게 움직이더라도 대략 4시간 30분에서 5시간 정도 걸리는 여정이었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성인 6명이 먹을 양을 달라고 하니 아이스박스가 제법 크다. 장거리 이동을 위해서 사장님은 얼음도 넉넉히 넣어 주었다. 들어보니 돌덩어리다. 이제 겨우 출발이다. 기차에서는 혹시나 얼음이 녹을까 객실과 객실 사이에 아이스박스를 내려놓고 서 있었다. 그래도 기차는 갈아타는 구간이 길지 않아서 용케 잘 버텼다. 문제는 버스였다. 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니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막 출발하려고 한다. 2시간에 한 대씩 있는 버스다.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뛰었다. 그리고 겨우 그 버스를 잡아 탔다. 11월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등에는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 날 입은 옷도 역시 그 비싼 카키색 고급 정장이었다. 오랜만에 고향에 가는 길이니 특별히 멋을 낸 옷이었다. 아이스박스를 흔들어 보니 다행히 얼음은 녹지 않았다. 그러나 버스에서는 히터가 너무 빵빵하게 나와서 얼음이 녹아 버릴까 걱정이 되었다. 버스 밖 짐칸에 실었으면 이런 고생을 안 했을 텐데 그것이 무슨 귀한 것이라고 신줏단지 모시듯이 옆에 꼭 끼고 버스에 오른 것이 문제였다. 그렇게 아이스박스를 사수하며 고향집에 겨우 도착했다. 평소에 맨몸으로 오기에도 지치는 코스였는데 돌덩어리 같은 아이스박스를 꿰차고 왔으니 이미 몸은 만신창이였다.


다행히 가족들은 내가 들고 온 물건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가게에 딸린 작은 방에 판이 벌어졌다. 돗자리를 깔고 커다란 전기 프라이팬에 불을 넣은 후 굵은소금을 깔았다. 300km를 잘 따라와 준 대하의 상태는 좋았다. 대하가 익어가면서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나는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가족들에게 시범을 보였다. 

" 대하가 완전히 익으면 등과 배 쪽에 있는 가느다란 내장을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머리는 그보다 더 바짝 익혀서 나중에 과자처럼 바삭바삭하게 즐기는 것이다." 가족들은 흡사 조선시대에 다른 나라에서 들여온 새로운 신문물을 접한 사람처럼 신기하고 즐거워했다. 우리는 다정하게 머리를 맞대고 앉아 단단한 대하 껍질에 손을 찔리기도 하면서 열심히 대하를 먹었다. 좁은 방에는 그렇게 대하 굽는 연기가 가득했고 고소한 냄새는 며칠 동안 빠지지 않아서 나중에는 비릿한 냄새로 바뀌었다.  



  그 날 멋 부리기 위해 굳이 불편한 정장과 구두를 선택한 덕분에 고생을 많이도 했다. 나중에는 발등이 퉁퉁 부어 올라 발을 절룩거리며 걸었던 기억이 난다. 11월의 저녁 공기는 꽤나 쌀쌀했다. 얇은 옷을 입은 탓에 코끝은 빨갛게 얼어오고 입에서 내뿜는 숨에도 입김이 묻어 나왔다. 내가 걷던 육교 위에는 그나마 인적이 없어서 흐릿한 가로등만이 나를 따라와 주었다. 


이제 300km 대하 공수 작전은 불가능할 것이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집 앞까지 배달해 줄 테니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대하가 맛있어지는 이 계절이 오면 어김없이 그 날의 기억이 소환된다. 

처음으로 먼 타향에서 홀로 생활하며 가슴에 품고 있던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고향에 대한 향수까지 한꺼번에 몰려와서 아른거린다.  


그래서 그 날의 대하는 특별히 맛있었던 모양이다. 그토록 고단한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300km 가까이 들고 왔으니 맛이 없을 리가 만무하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그리움과 애틋함을 모두 버무려서 공수해 온 특별한 음식이었다. 

처음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자식의 미안함과 자부심이 뒤섞인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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