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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Nov 16. 2020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다

로딩 독이란 무엇인가?


 나는 도도하게 흐르는 시대의 변화 위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2020년의 대한민국에는 바야흐로 갑질 문화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각계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직장은 또 어떤가. 직장 내에서 자행되는 상사의 갑질을 '힘 희롱'으로 정의하고 그것을 근절하기 위한 계도나 교육도 이뤄지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에도 상하관계에서 오는 위력이나 갑질 문화가 사라지고 사람만이 중심이 되는 문화가 자리를 잡는 것인가 섣부른 희망을 가져 보기도 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는 말이다.


  건물 개관 행사를 준비하는 전담반에 합류되었다. 이번 행사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바로 VIP들에 대한 의전이었다. 유례없이 크게 열리는 행사를 맞아서 장관과 국회의원, 각 기관 수장들이 참석하게 되었다.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서 확인해야 할 사항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들이 층별로 이동할 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도록 층 별로 엘리베이터 맨을 배치해야 한다. 그리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응대를 하기 위해서 그들의 등장을 감지하기 위한 직원들이 대로변까지 무전기를 들고 배치되었다. 어떤 직원은 커다란 피켓을 들고 대로변에 서 있는 역할도 맡았다. 이거야 말로 내비게이션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고 무언가. 요즘 같은 시대에 내비게이션만 틀어 놓으면 알아서 올 텐데 오버도 보통 오버가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거의 007 작전을 방불케 한다.  


우선 홍보실을 통해서 VIP들의 서열을 확인해야 했다. (서열은 엄청나게 중요하다). 테이프 세리머니, 티타임, 동영상 관람을 할 때 그들의 좌석 배치는 다 정해진 규칙이 있다. 대충 아무 데나 앉으라고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VIP들이 온다고 했다가 못 온다고 했다가 또 며칠 뒤에는 참석하겠다고 결정을 계속 번복하는 것이다. 이 아저씨들이 그 정도로 바쁜 것인지 짜증이 밀려온다.  

  

  하여간 그것이 문제다. VIP들이 불참한다고 하면 또 그 대행이 참석을 하게 된다. 그러면 서열이 꼬인다. 또 홍보실로 메일을 보내서 이 사람들의 서열을 재차 확인해야 한다. 정말 미칠 노릇이다. 그렇게 이 사람들의 서열을 기록해 놓은 커다란 전지는 너덜너덜해졌고 내 마음도 너덜너덜해졌다.

 

   그런데 비단 VIP들의 서열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차도 서열이 있다. 그들이 행사를 마치고 일제히 퇴장할 때 차들은 서열에 맞게 현관 앞에 도열해 있어야 한다. 이 사람들이 타고 올 차량 번호를 확인하고 서열에 맞는 주차구역을 지정해야 한다. 어디 그뿐인가. 이 차량들이 나올 때 서열 순으로 나올 수 있도록 전두 지휘를 해야 한다. 혹여라도 서열 1번 차량이 못 빠져나왔다고 상상해 보라. 서열 1번이 현관 앞에서 사정없이 불어 닥치는 거친 바람에 숱도 얼마 되지 않는 머리카락을 날리며 서열 2, 3번을 배웅하는 사태가 발생한다면 이 행사는 그냥 망한 행사다.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VIP들을 위한 고가의 선장품을 준비하고 떡도 VIP용과 일반용으로 따로 준비를 했다. 어디 그뿐인가. VIP 대기실은 건물 가장 좋은 위치에 세팅이 되었다. 그곳에는 고급 수제 쿠키와 초콜릿, 스낵류가 비치되고 커피도 비치하기로 했다. 그리고 VIP들에게 커피를 따라 주는 도우미도 배치가 되었다. 역시 170이 훌쩍 넘고 몸에 꽉 끼는 원피스를 입고 있는 미녀가 등장을 한다. ' 아니 VIP들은 커피도 직접 못 따르는 거야? ' 내 마음의 소리는 불만으로 배배 꼬인다. 그리고 왜 이런 행사장에 미녀 도우미가 배치되어야 하는지도 이해 불가다.

 15년 전쯤에 노르웨이에서 비행기를 탄 적이 있는데 40대 중후반의 풍채 좋은 아줌마들이 몸빼 비슷한 옷을 입고 기내 서비스를 도와준 적이 있었다. 그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단 말이다.


하여간 불과 10명 정도 VIP의 30분간의 티타임을 위한 준비는 참으로 지난했다. 회사 마크가 새겨진 고급 떡 세트와 최상의 커피를 주문했고 쿠키와 초콜릿도 종류별로 구비해 놓았다. VIP들이 커피를 마시려고 일어나면 도우미가 번개처럼 일어나서 커피를 따라 주는 시뮬레이션도 진행되었다. 거기까지는 큰 불만이 없었다. ' 세상이란 게 원래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려니 내가 모르는 그런 세계가 존재하나 보다'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VIP들의 운전기사를 위한 공간을 확보하면서 발생했다. 1층에 마땅한 공간이 없었다. 팀장들은 로딩 독에 운전기사 휴게실을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로딩 독이 무엇인지 몰랐다. 고급스러운 단어인 걸로 보아서 뭔가 전문적인 공간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로딩 독은 ' 트럭이나 기차에서 짐을 싣고 내리기 편하도록 건물에 설치한 구역'이란다. 그러니까 로딩 독이란 화물을 내리기 편하도록 턱을 높게 해서 만들어 놓은 건물 입구를 말한다. 어떻게 보면 그냥 건물 외부다. 그 로딩 독 입구에 셔터를 내려서 공간을 만들고(?) 그곳을 휴게실로 만들자는 것이 팀장의 생각이다. 거기에 정수기와 테이블을 갖다 놓고 휴게실을 만들기로 했다.


 그런데 마지막 점검을 하기 위해 들어간 내 눈에 로딩 독은 너무 서글펐다. 게다가 그 날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는 바람에 내부는 썰렁했다. 하얀색 테이블이 두 개 놓여 있고 그 위에는 생수병과 커피 믹스, 백설기 떡이 놓여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하얀색 테이블이었다. 그 테이블은 표면이 울퉁불퉁한 소재로 되어 있어서 찌든 때가 잘 닦이지 않았다. 물티슈로 몇 번을 박박 문질러도 얼룩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VIP 대기실을 금방 보고 온 탓에 눈이 너무 높아진 것일까. 내가 보기에 운전기사 휴게공간은 너무 삭막하고 성의가 없어 보였다. 계속 운전기사 휴게실을 어슬렁거리며 테이블을 닦고 있는 나에게 팀장은 마뜩잖은 티를 낸다. 이 정도면 훌륭해도 너무 훌륭하니 여기에서 이러지 말고 빨리 VIP 대기실 체크나 하라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로딩 독을 나왔다. 어릴 때부터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배웠다. 그런데 세상은 사람 위에 사람이 있는 정도가 아니다. 그 사람의 직급과 자리에 따라 대접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결국 VIP도 그들의 운전기사도 우리의 손님일진대~내가 아직 너무 세상을 모르는 것인가.


  행사가 끝날 때까지 씁쓸하면서 마음이 쓰였다.  VIP들의 운전기사가 로딩 독에서 혹시나 춥지는 않았을까, 괜히 기분이 나빠지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행사는 어쨌든 잘 끝났다. VIP 차량은 서열 순서대로 현관 밖에 도열해 있다가 VIP들을 태우고 장엄하게 사라졌다. 그런 광경도 처음 봤다. 그토록 부르짖던 의전은 잘 끝났다. 원래 의전의 뜻은 정해진 격식에 따라 치르는 행사를 의미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의전은 너무 심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저 사람을 진심으로 배려하고 참석한 사람들이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는 행사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봤다.


"일보다 의전이 더 힘든 시대는 제발 좀 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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