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과장 김 과장님!

# 내가 김 과장님을 그리워하다니

by 느리게 걷기


" 김 과장님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갑자기 김 과장님에 대한 궁금증이 머리를 들었다. 그리고 나는 나 스스로에게 놀라버렸다.

' 설마 지금 내가 김 과장님을 그리워하고 있는 거야?'


김 과장님은 예전 근무하던 조직에서 꽤 오랫동안 나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과장님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과장 직함을 달고 있어서 김 과장이 이름처럼 되어 버린 만년과장, 그가 바로 김 과장이었다. 둥그스름하고 커다란 얼굴, 심한 탈모, 유난히 짧은 목에 몸 여기저기 군살이 붙어 있는 전형적인 아저씨 체형, 서울에서 30년 가까이 살면서도 미처 털어내지 못한 심한 경상도 사투리, 이 정도가 김 과장님에 대한 설명이 되겠다.


김 과장님은 좋게 말하면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고 나쁘게 말하면 무능력한 사람이었다. 출근길 만원 지하철을 피하기 위해 이른 아침에 출근해서 남들보다 일찍 일을 시작하지만 그렇다고 업무 능력이 뛰어나거나 성과가 좋지 않았다. 그는 이해력이 떨어지는 편이라서 업무를 이해하고 결과물을 내기까지 다른 사람들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그의 의자에는 회사에서 지급해 준 회사 점퍼가 걸려 있었다. 그 점퍼는 겨울용으로 두텁게 제작된 점퍼였다. 그 점퍼는 겨울 동안 김 과장님 몸을 감싸고 있다가 겨울이 지나면 내내 의자에 걸려 있었다. 사무실에서 만들어지는 각종 먼지, 가끔 직원들이 먹는 간식 냄새, 슬리퍼에 묻어 들어오는 흙먼지 같은 것들이 켜켜이 쌓여서 그 점퍼에서는 쿰쿰한 냄새가 났다. 사무실에 출근하면 언제나 그 냄새가 주변을 은근히 맴돌았고 나는 그 냄새가 싫었다. 한 번은 모른척하고 믹스 커피를 그 점퍼에 쏟아 버릴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다. 그러면 점퍼를 집에 가져가서 세탁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랬다가 김 과장님이 그 점퍼를 대충 물에 헹구고 그냥 말리면 이제 고약한 냄새에 커피까지 한 겹을 더해서 더욱 고약해질 거라는 생각에 그 시도를 행동에 옮기지는 않았다.


내가 이사를 할 일이 생겼을 때 김 과장님은 적극적으로 추천해 주고 싶은 업체 사장이 있다고 하면서 전화번호까지 건네줬다. 지역 어르신들을 돕는 좋은 사장님이라고 꼭 이 업체를 통해서 이사를 하라고 그는 몇 번을 강조했다. 그때 나는 몰랐다. 이삿짐 업체 사장님이 너무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이삿짐 업체에 필요한 중요 덕목은 빠른 일처리, 친절, 흠집 없는 물건 이동, 깔끔한 뒤처리 같은 것이었는데 나는 그때 김 과장님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 다른 요소들은 묻거나 따지지 않았다.


어쨌든 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조용한 김 과장님이 그토록 강력하게 권유를 하니 나도 그 업체를 믿고 계약을 했다. 그리고 이사 당일, 아파트 복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용달차가 여러 대 와 있었다. 나는 설마 그 용달차가 나의 이삿짐을 날라 주는 임무를 부여받고 도착한 차들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용달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일제히 같은 방향으로 움직여 우리 집 앞에 도착한 것을 확인한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몇십 년 전에는 나도 용달이사를 했다. 원룸처럼 물건이 없는 집들은 지금도 용달 이사를 이용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집은 냉장고에 세탁기에 피아노에 옷장에 짐들이 많았다. 나는 그 전에도 탑차로 이사를 했고 이번에도 당연히 탑차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적잖이 당황했다.


내가 집에서 쓸고 닦으며 사용하던 세간살이들이 밖으로 나와서 훤히 그 알몸을 드러낸 채로 도로를 달려야 하다니. 나는 뒷목을 잡고 쓰러지고 싶었다. 흥분한 나와 달리 남편은 침착했다. 비상 상황에서는 남자가 여자보다 더 이성적인 모양이다. 남편은 찬찬히 상황을 파악했다.

' 어차피 이사 가는 곳이 여기에서 3k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니까 일단 짐을 옮기는 게 중요하잖아. 그리고 지금 어떻게 다시 업체를 알아보겠어? 일단 이사를 하자"

그렇게 4대의 용달차에 우리 짐을 나눠 싣고 차는 출발했다. 가만히 보니 이 사람들은 전문적인 이삿짐센터 직원들도 아닌 것 같았다. 포장 이사에 비해서 비용을 10만 원 가까이 세이브하기는 했지만(역시 싼 게 비지떡이다) 그래도 마뜩잖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들은 포장이사처럼 냉장고 정리나 싱크대 수납 같은 일은 도와주지도 않고 돌아갔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그 와중에 깨지거나 부서진 물건이 없었고 분실된 물건도 없었다. 그리고 김 과장님 말씀처럼 용달차 사장님은 만면에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좋은 사람'이기는 했다.


다음날 출근하자마자 김 과장님에게 따졌다. 용달차가 와서 나의 짐들을 날랐다는 사실과 나의 짐들이 훤히 다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이사를 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 사람 좋은 김 과장님은 내가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처럼 그 기분 좋은 미소를 벙글벙글 지으며 대답했다.

" 이사 잘했으면 되었지요. 그리고 이삿짐 용달에 싣고 가도 아무도 안 봅니다. 그게 뭐 재미있다고 사람들이 구경을 한대요? 아무도 신경 안으니까 그런 거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요"

그랬다. 나는 그에게 항의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나는 샐쭉해졌다. 역시 김 과장님의 세계관과 나의 세계관은 다르다는 결론으로 나는 입을 닫아버렸다. 연신 벙긋거리며 웃음을 잔뜩 머금고 바라보는 그 얼굴에 대고 불만을 제기해 봐야 아무런 소득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김 과장님은 가끔 주머니에 과자나 사탕 같은 걸 가지고 다녔다. 그리고는 오후 3시나 4시쯤 한가할 때가 되면 그걸 꺼내서 내밀었다. 그럴 때면 언제나 싱글벙글 웃으며 " 많이 바빠요? 쉬면서 해요. "하고 말을 걸어왔다. 그가 말을 꺼낼 때면 언제나 눈썹이 먼저 웃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 얼굴이 실룩이다가 입까지 웃기 시작했다. 그가 내민 것은 작은 사탕이나 초콜릿 같은 것들이었다. 당이 떨어지면 안 된다고 언제나 주머니에 초콜릿을 챙겨 갖고 다니던 김 과장님은 가끔 그렇게 나의 당이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물어보고 챙겨주었다.

어느 날은 아침부터 기분이 좋은지 시종일관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소리가 거슬려서 그가 조용히 해 주기를 바랐지만 입으로 그 말을 내뱉지는 못했다. 그런데 기분이 엄청 좋아 보이는 이 아저씨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 우리 친하게 친구처럼 지낼까요?"라고 말을 거는 것이다.


나는 기겁을 했다. 그때 나는 37살이었고 김 과장님은 47살쯤 되었다. 나의 눈에 김 과장님은 늙수그레한 늙고 재미없는 아저씨였다. 정수리 부근에는 머리가 많이 빠져서 휑한 상태이고 회사에 오면 유니폼처럼 회사 점퍼를 걸쳐 입고 앉아 있는 모습, 그리고 가끔 오후에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눈을 거물거리며 자꾸만 머리를 꾸벅거리는 이 늙은 만년 과장님과 친구라니, 나는 몹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랐다. 실제로 김 과장님과 내가 10살쯤 차이가 났지만 생각하는 것은 한 백만 년쯤 차이가 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래서 친구처럼 재미있게 지내자는 말을 듣고 나서 나는 김 과장님하고 한동안 말도 섞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기필코 자리를 바꾸든지 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분한 마음을 달랬다.


김 과장님은 만년 과장으로 몇 년을 근무하고 결국 집 근처 근무지로 발령 신청을 해서 떠났다. 건강이 안 좋아서 장거리 출퇴근을 더 이상 버틸 수도 없거니와 이제 차장으로 승진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오늘 사무실은 숨이 막힐 정도로 적막했다. 사무실은 하나의 연극무대였고 직원들은 연기에 몰두했다. 평가 시즌이 다가오면서 연기는 더욱 정교해졌다. 바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책상 위에 높게 쌓여 있는 서류 뭉치들, 걸려 온 전화를 빨리 끊지 않고 평소보다 유난히 친절하게 이어지는 들뜬 목소리들, 이 모든 것들이 한 편의 드라마였고 직원 개개인은 모두 직장이라는 무대 위에서 영악한 연출자가 되어 있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생각보다 고과가 좋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심통난 마음을 감추기 위한 섬세한 표정 연기도 압권이었다. 명암은 함께 존재하는 법이다. 고과를 잘 받은 직원들은 행여라도 자신의 목소리에 그런 설렘과 기분이 묻어날까 두려워 행동을 조심하고 고과를 잘 받지 못한 직원들은 입 밖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귀찮고 성가신 생각에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무실에 흐르는 침묵이 고요하다 못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벽에 걸린 벽시계의 시침 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또렷하게 들려온다.


너무 삭막해져 버린 분위기 때문일까. 오늘 갑자기 김 과장님이 떠올랐다. 샤프하게 빠른 일처리를 하지는 못하지만 늘 그 자리에서 자신의 일을 묵묵하게 하던 모습, 사람 좋게 웃으며 직원들에게 경상도 사투리로 안부를 건네던 그런 모습들 말이다. 가끔은 그렇게 욕심 없는, 따뜻한 사람이 전쟁터 같은 사무실에 섞여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김 과장님은 지금도 주머니에 사탕을 가득 넣고 사무실 복도를 어슬렁거리고 있을까.

오늘 갑자기 그가 그리운 생각이 든다. 세상에 욕심내지 않고 조금 바보처럼 살아가는 그런 마음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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