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를 넣은 배추전

# 똥손 인증

by 느리게 걷기

경상도에서는 명절이나 제사마다 꼭 배추전을 부친다.


커다란 배춧잎을 잘 씻는 것에서부터 배추전의 준비는 시작된다. 배춧잎을 잘 씻어서 물기를 빼놓은 다음에 부침가루 반죽을 시작한다. 이때 농도 조절이 중요하다. 너무 묽게 하면 생배추를 구운 것처럼 밍밍한 맛이 나게 되고 반죽이 너무 되직하면 배추전이 떡처럼 딱딱해진다. 적당한 반죽에 배춧잎을 푹 담근 다음에 반죽을 조금 털어 낸 후에 식용유를 넉넉하게 두른 프라이팬에 부쳐내면 된다. 이때 불의 세기는 강과 중간 사이 정도의 화력이 가장 좋다. 이제 배추전이 익기 시작하면 양념장 제조에 돌입해야 한다. 양념장은 진간장과 고춧가루를 주 재료로 하고 참기름을 살짝 넣은 후에 참깨를 뿌리면 완성된다. 나는 시어머니에게 배운 회심의 레시피대로 여기에 미원을 살짝 추가한다. 그러면 양념간장은 한층 깊은 맛을 풍기게 된다.


결혼하기 전, 우리 친가에서는 명절이나 제사 전에 절대 전을 먼저 먹는 법이 없었다. 할머니 말씀으로는 제사 지내기도 전에 음식을 먼저 맛보면 조상이 노해서 벌을 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사가 끝날 때까지 부침개나 튀김 맛을 볼 수 없었다. 프라이팬에 배추전이 노릇노릇하게 익어가기 시작하면 고소한 냄새가 집 안에 진동을 한다. 어린아이가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란 정말 힘든 노릇이었다. 가끔 엄마가 할머니 몰래 부침개를 입에 넣어 주기도 했지만 그러다 걸리면 할머니는 벼락 치는 소리로 엄마를 혼내곤 했다.

그렇게 배추전을 좋아하는 바람에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요리 중에 하나가 바로 배추전이다. 사실 요리라고 할 것도 없다. 겨울 배추는 달고 시원해서 웬만한 놈을 골라서 부침가루를 묻혀 부쳐내면 실패할 일이 없다.

오늘은 모처럼 배추전을 만들기로 했다. 토요일 오후에 집에서 부쳐내는 배추전은 집안 전체를 따뜻하게 달궈줄 것이다. 집 안에 맘 편히 들어앉아서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맡으며 배추전으로 젓가락을 가져가노라면 세상 근심이 다 의미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나는 배추전을 부칠 준비를 시작했다. 남편이 주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요즘 여성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는 것인지 유난히 주방일에 관심이 많다.

" 어제 먹다 남은 맥주 있지?"

남편은 갑자기 맥주를 찾는다. 김이 다 빠진 맥주를 왜 찾느냐고 물었다.

" 맥주를 넣고 튀김이나 부침을 하게 되면 그렇게 바삭바삭하대. 일식집이나 유명 셰프들이 사용하는 방법이야"

" 아, 그래서 일식집에서 먹는 튀김은 그렇게 바삭한 건가?"

내가 물어보자 남편은 으쓱해진 표정이다.

" 그렇지. 그냥 물로 반죽을 해서는 그런 맛이 표현이 안 되는 거야. "

" 당신은 어디에서 그런 정보를 얻는 거야? 나는 생각도 못했는데. 하마터면 아까운 맥주를 다 버릴 뻔했네"

내가 존경의 눈초리로 남편을 바라보자 남편은 한층 기분이 좋아진 표정이다.

남편은 부침가루가 들어 있는 커다란 그릇에 맥주를 거침없이 부었다. 반죽은 평소에 물로 했던 것과는 색깔 자체가 달랐다. 짙은 호밀 색깔을 풍기고 발효된 음식에서 나는 냄새도 나기 시작했다.

" 역시 비법을 쓰니까 다르네. 냄새부터가 확 다르잖아"

남편은 떠날 생각을 않고 옆에서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반죽에서는 은은한 막걸리 냄새 같은 것이 났다. 나는 신이 나서 부침개를 굽기 시작했다. 배춧잎을 두 장씩 프라이팬에 올려놓고 한쪽 면이 어느 정도 익으면 뒤집었다. 평소에 연한 노란색의 배추전과 다르게 유난히 짙은 색의 배추전이 완성되었다. 나는 평소보다 많은 양을 만들었다. 아이들도 고소한 배추전을 좋아할 거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렇게 배추전을 7장쯤 부쳤을까. 나는 비법 조미료를 첨가한 양념장까지 완성해서 식탁으로 날랐다.

가족들은 모두 기대에 차서 식탁에 둘러앉았다. 일단 딸과 내가 먼저 맛을 보았다. ' 음, 바삭바삭하고 식감이 좋은데' 정말 맥주를 넣은 배추전은 평소보다 바삭바삭한 식감이 분명 있었다. 그런데 끝 맛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끝 맛은 막걸리 맛이었다. 그것도 살짝 나는 것이 아니었다. 막걸리를 한 모금 쭈욱 들이켜고 난 후에 입에 남는 막걸리의 잔향 같은 그런 묵직한 느낌이 입안을 맴돌았다.


딸은 배추전을 입에 넣고 열심히 씹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 혹시 여기에 이스트 넣으셨어요?"

나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딸에게 특별한 비법을 위해서 맥주를 넣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남편을 슬며시 흘겨보았다. 남편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것은 아주 구수하고 특별한 풍미를 풍기는 배추전이라고 남편은 평가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맛보는 배추전이 살짝 가벼운 느낌이었다면 이 배추전은 뭔가 알 수 없는 깊은 맛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러니 자신의 비법 레시피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깊은 맛을 가지고 있으면 먹어야 할 것 아닌가. 남편은 배추전을 맛보더니 젓가락도 대지 않았다. 그렇게 깊은 맛이 나는 배추전을 왜 이렇게 안 먹느냐는 말에 남편은 대답했다.

" 다른 반찬들이 너무 맛있어서 그렇지. 배추전이 있다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네."

이 남자, 역시 잘 빠져나간다.


오늘 알았다. 검증되지 않은 비법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특히 나 같은 요리 똥손에게는 특히나 말이다.


이제 앞으로 나의 배추전은 그냥 얌전히 물과 부침가루만을 섞어서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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