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 가능성이 100프로에서 30프로가 되었다.
# 숫자로 된 가능성은 결국 허상이다.
면담은 모두 세 차례였다.
첫 번째는 일 년 간의 실적에 대한 평가를 하는 시간이었다. 팀장은 사무실 옆에 있는 회의실로 오라고 했다.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지 미리 노트에 몇 가지를 적어 놓았는데 갑자기 찾으려고 하니 보이지 않았다. 나는 허겁지겁 노트와 볼펜만 챙겼다. 마음이 급해서 들고 있던 컵을 엎지를 뻔하면서 나는 팀장을 따라갔다. 팀장은 기다란 원탁 테이블 제일 끝에 앉았다. 조금 거리를 두고 나도 앉았다. 팀장은 올 한 해 가장 잘 한 일과 아쉬운 일, 그리고 내년도 주요 계획을 설명하라고 하였다. 나의 간단한 브리핑이 이어지는 동안 그는 생각에 잠긴 듯이 눈을 감고 내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열었다.
" 올해 OOO 실적이 좋습니다. 다 알고 있어요. 올해 실적으로 따지면 아마 조직에서 최고죠"
웬일로 팀장의 입에서 이렇게 긍정적인 언어들이 쏟아지는 건지 어리둥절했다. 원래 긍정적이거나 따뜻한 언어를 입에 올리는 사람이 아니다. 일 년 동안 개고생을 시켰다는 사실에 갑자기 양심의 가책이라도 받은 건가.
그는 올해 내가 승진할 가능성이 100프로라고 말했다. 이렇게 고과 면담을 긍정적으로 끝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승진할 가능성이 100프로라니 확실하다는 얘기구나. 그런 말을 들으면 감사하다는 감정부터 느껴야 할 텐데 솔직히 감사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사람을 부려 먹고 어린애 혼내듯이 마구 혼을 내고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붙였으니 당연한 거 아닌가. 비상식적이고 고압적이고 굴욕적인 상황을 참고 버티면서 일해 왔으니 당연한 결과물이다. 그런 생각들이 먼저 떠올랐던 것 같다.
두 번째 면담에서 팀장은 말을 바꿨다. 승진할 가능성은 80프로 정도 될 것 같다고 그는 말했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잠자코 있자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70에서 80 정도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라고 다시 말을 바꿨다. 그때부터였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세 번째 면담이었다. 이번에는 팀 고과 평가가 끝나고 기관 전체 고과 조정이 한창 이뤄질 때였다. 이번에도 같은 회의실이었다. 일단 그의 표정이 이전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나는 바로 눈치챘다. 그는 무언가 꺼내기 힘든 얘기를 꺼내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는 쉽게 미안해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내가 들어와서 자리에 앉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어떻게 얘기를 꺼내야 할지 약간 망설이는 눈치더니 이내 마음을 정한 것처럼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 아, 이번에 승진할 가능성은 30프로 정도로 봐야 할 것 같은데"
" 가능성이 점점 낮아지네요?"
나는 따지는 듯한 어투로 팀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팀장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나보다 훨씬 노련한 사람이다. 닳고 닳아서 이런 직원의 항의쯤은 눈도 깜짝하지 않을 위인이다. 그는 또다시 뜸을 들이며 적당한 말을 찾으려는 듯이 손가락 두 개로 책상을 가볍게 두들겼다.
" 이번에 우리 기관 평가가 좋지 않아서 승진자 TO가 많이 줄어들 것 같아서 그래요. "
그는 자기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이 나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해지는 상황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화제를 돌렸다.
" 저번에 지시한 '21년 전망 보고서는 잘 되어 가고 있나? "
인사 평가가 진행되는 일주일, 감정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내렸다. 어떤 날은 30프로라는 가능성이 꽤 높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 어떤 날은 30프로라는 게 무슨 가능성이냐고 혼자 비관적인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이런저런 상황을 깊이 생각해 보면 그래도 결과는 늘 유리한 쪽으로 해석이 되었다. 이를테면 관리자들은 원래 상황을 보수적으로 설명하는 법이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니까 그렇게 설명하는 것일 뿐, 실제로 상황은 긍정적으로 전개되고 있을 것이라고 나는 기대를 품었다.
중간에 상무가 전화를 걸어와서 내가 가지고 있는 사내 자격증 내역에 대해서 물었을 때 나의 기대는 한껏 부풀었다. 도대체 왜 일부러 전화까지 걸어와서 그런 걸 확인한단 말인가. 나의 실적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 그렇게 수고스러운 전화를 걸어온 게 틀림없다는 희망 섞인 추측으로 안도했다. 이제 상무님까지 나를 승진시키려고 알아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으로 새삼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회사에서 감동이라니 그것도 직책자에게서 감동을 바라다니, 누울 자리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속담을 망각하고 또 어이없는 곳에 가망 없는 기대를 품었던 것이다.
승진자 명단이 발표되었다. 명단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위에서부터 한 명씩 차례로 확인하며 내려갔다. 낯익은 이름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결국 나의 이름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처음부터 꼼꼼하게 확인을 했지만 역시나였다.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후에 걸려 들어오는 전화들이었다. 도대체 왜 승진을 못 한 거냐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는 전화들이었다. 그중에 가장 황당한 전화는 승진을 축하한다며 들뜬 목소리로 걸려온 한 후배의 전화였다. 내가 이번에 승진을 못했다고 대답하자 나보다 더 당황한 후배는 어떤 말로 상황을 수습할지 몰라서 허둥대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사실 나의 승진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만큼 몇 년간 누구보다 고생을 했다. 사실 승진을 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비인간적이고 굴욕적인 상황을 계속 감내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을 정도였다. 정신이 돌아오자 이제는 승진한 사람들을 천천히 다시 확인했다. 몇몇 이해가 가지 않는 이름들이 있었다. 전화만 하면 싸우려고 덤비는 다혈질의 A, 발표만 하려고 하면 말을 심하게 더듬어서 주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B, 자기 업무 외에는 1의 관심도 가지지 않는 C, 그들이 당당하게 승진자 명단에 섞여 있었다.
일단 승진한 사람들에게 축하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승진에서 탈락한 나의 씁쓸함과 별개로 그들의 승진은 오늘 단 하루, 아니 며칠간은 그들을 행복하고 달뜨게 만들 것이다. 그들 중에는 정말 승진할 만하다고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실력자들이나 좋은 동료들도 있었다. 그들의 기분 좋은 소식은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고 나니 어느덧 퇴근할 시간이 되었다.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고 하느라 몰랐는데 퇴근하고 다시 차에 홀로 앉으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이 점점 나빠지기 시작하더니 온갖 비이성적인 생각들이 불쑥불쑥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 내가 상무님께 커피를 안 갖다 바쳐서 그런 건가?(커피를 열심히 갖다 바친 이 차장은 작년에 승진을 했다.) 저번 휴가 때 노느라고 정신 팔려서 상무님 급한 전화를 못 받았는데 그 일로 찍힌 건가? 우리 팀장님 때문에 나까지 미운털 박혔나?( 상무님과 팀장님의 사이가 날로 위태위태하다) 아니면 나를 잡아 놓은 물고기라고 생각해서 순위에서 배제시켰나? '
모르겠다. 이상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결론은 점점 이상한 쪽으로 나기 시작했다. 아주 사소한 일화나 아주 사소한 표정들까지 다 기억 속에서 소환되어 엄청 큰 사건으로 각색되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마치 회사에서의 나는 작은 표정과 말 한마디, 몸짓조차도 철저하게 계산해서 움직여야 하는 꼭두각시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답도 없는 문제를 종일 붙들고 있으니 나중에는 머리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모처럼 포장해 온 방어회와 연어 초밥이 오늘따라 눈치도 없이 입에서 살살 녹았다.
그래, 모르겠다. 답도 없는 문제고 내가 답을 알아낼 수도 없는 문제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나라는 사람이 아니던가. 따지고 보면 나에게는 여러 개의 방이 있다. '가족'이라는 방도 있고 '꿈'이라는 방도 있고 '친구'라는 방도 있고 '작가'라는 방도 있다. 회사는 많은 방들 중 하나일 뿐이다.
최근에는 회사라는 방에 공을 들였다. 열심히 하면 인정받고 승진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를 했다. 나의 다른 방에 먼지가 폴폴 날리도록 회사라는 방에 애정을 쏟았다. 휴가도 반납하고, 책 읽을 시간도 포기해 가면서, 회사가 나의 생에 열렬한 의미라도 되는 것처럼 그 방에 정성을 들였다. 그랬는데 그렇게 애를 쓰고 공을 들인 방이 오늘은 온통 깜깜해져 버린 기분이다. 생각지도 못한 어둠 속에 앉아 있으려니 막막하기도 하고 갑자기 세상의 무게가 무겁게 내려오는 것 같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것을 이해하고 수수께끼를 풀어 보려고 하면 여지없이 나는 나가떨어지는 것이다. 그 이상하고 비합리적인 세상의 법칙에 난폭하게 메다 꽂히면서 말이다.
그러나 아직도 나에게는 남아 있는 방들이 많이 있다. 한 개의 방에 불이 꺼졌다고 해서 집 전체가 어둠에 잠기지 않는다. 승진을 못했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 전체가 무릎을 꿇고 슬픔에 오래도록 잠겨 있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제 나의 다른 방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조용하고 설레는 마음을 안고. 나의 다른 방으로 말이다.
어쩌면 승진보다 더 중요하고 의미 있는 나의 잊혀진 방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