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전학을 하게 되었다. 전학 간 학교 교무실에서 전학 서류를 제출하고 우리는 반을 배정받았다. 5학년 2반이었다. 남편과 나는 아이를 데리고 교실이 있는 4층으로 올라갔다. 학교 건물은 새 건물이었다. 쉬는 시간이라 복도에는 아이들이 장난을 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들은 낯선 환경에 잔뜩 주눅이 들어 있었고 남편과 나 또한 아이가 새로운 환경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하느라 움츠러 있었다.
교실에서 선생님이 나왔다. 3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내가 이제까지 만났던 선생님 중에 가장 화려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스커트는 무릎 위로 훌쩍 올라가 있었고 굽이 높은 가죽 롱부츠를 신고 있었다. 롱부츠의 굽은 7센티나 9센티쯤 되어 보였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전체적으로 몸매가 완전히 드러나는 옷이었다. 물론 몸매는 놀랄 만큼 좋기는 했다. 그렇지만 학교에서 더군다나 선생님이 그런 옷을 입고 있는 것을 처음 본터라 나는 어리둥절하고 다소 놀라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어깨 아래까지 길게 내려오는, 강한 볼륨이 들어가 있는 파마머리였다. 흔히 미스코리아들이 하고 나오는 사자머리 같은 그런 스타일의 머리였다. 그렇게 길고 볼륨이 강한 머리를 풀어서 늘어뜨리고 있는 데다가 화장도 꽤나 강렬했으니 그녀의 전반적인 인상은 다소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눈에는 마스카라와 아이라인이 굵게 그려져 있고 입술에는 진한 붉은색 립스틱이 발려 있었다.
선생님은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로 아들의 이름을 물었다. 아들은 머뭇거리며 이름을 말했다. 목소리가 속으로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였다. 아들은 완전히 기가 죽어 있었다. 선생님은 아들이 앉을자리를 정해 주고 우리를 돌아보았다. 남편과 나는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를 했다. 그때 수업 시작종이 울리고 선생님은 간단한 인사를 한 후에 교실로 들어갔다.
수업이 시작하고 나서 교실을 들여다보니 아들은 어색한 몸짓으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은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칠판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우리는 둘 다 비슷하고 불안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제까지 만났던 선생님들은 대부분 평범한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 옷은 단정하거나 보수적이었고 가끔은 아주 촌스러운 느낌의 복고풍 옷을 입고 있는 선생님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만난 선생님은 파격적이었다. 무대의상을 입고 있다고 보아도 될 만큼 화려하고 대담한 스타일이었다.
아이를 전학시키게 되면 여러 가지 걱정거리가 많은 법이다. 새로운 학교는 어떤 분위기인지 아이들은 유순하고 친절한지 말이다. 그리고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어떤 담임선생님을 만나는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침에 학교로 오면서 담임선생님이 좋은 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의 첫인상은 그다지 호감 가는 인상이 아니었다. 남편과 나는 둘 다 속으로 망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요란한 의상에 목소리는 어딘가 갈라지는 느낌을 주는 이 선생님이 영 미덥지가 않았다. 중요한 순간마다 운이 따라주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담임 선생님 운수가 따라주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둘 다 혹여나 아이 앞에서는 그런 내색을 절대 보이지 말자는 다짐을 하였다. 아이가 선생님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면 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더욱 어려울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얼마 후에 학부모 총회 안내가 나왔다. 나는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휴가를 낼 수가 없었다. 대신에 남편이 참석하기로 했다. 남편은 예전부터 학부모 총회에 적극적으로 가는 편이었다. 아이가 사회성이 부족하고 잘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에 남편은 급식이나 녹색 봉사 같은 학교 봉사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를 하려고 했다. 학부모 총회가 있던 날, 퇴근을 하고 오니 남편이 달려와서 나를 반겼다. 뭔가 하고 싶은 얘기가 아주 많아 보였다.
" 오늘 학부모 총회 어땠는지 알아?"
남편의 얼굴에는 신기한 것을 보고 온 사람처럼 웃음기가 잔뜩 담겨 있었다.
" 어땠는데 그래?"
" 선생님이 의자 뺏기 게임을 하자는 거야. 오늘 교실에 온 학부모가 10명 정도 되었거든. 그중에 아빠는 나 혼자였고"
"그래서?"
이야기가 아주 흥미로웠다.
"한 명은 못 앉도록 의자를 한 개를 뺀 다음에 일어서서 다 같이 노래를 부르는 거야. 손뼉을 치면서. 그러다가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면 의자 쟁탈전을 벌이는 거지"
" 세상에. 학부모들이 그런 게임을 했다고?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
" 어색한 분위기에서 처음 보는 엄마들끼리 의자 뺏기 게임을 하라고 하니 다들 얼마나 긴장을 했겠어. 엄마들이 어찌나 열심히 게임을 하는지 볼만했어. 호루라기가 울리면 미친 듯이 의자에 앉으려고 난리가 났지. 그렇다고 내가 거기에서 엄마들을 밀치면서 맹렬하게 의자에 돌진할 수는 없잖아. "
" 그렇지. 그건 정말 아니지"
" 그래서 결국 내가 술래가 되었지. "
" 벌칙은 뭔데?"
" 벌칙은 특별한 건 아니었어. 게임이 끝나고 나서 다시 동그랗게 둘러앉았거든. 거기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서 아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는 거였어"
조금 특별하고 이상한 학부모 총회는 그렇게 진행이 되었다고 했다. 남편이 제일 먼저 일어나서 우리 아이에 대한 소개를 하고 학교에 바라는 것들을 얘기하고 나면 그다음 사람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고 했다. 그렇게 게임을 하고 한바탕 긴장이 풀어진 후에 다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진솔한 이야기들이 꽤 많이 나온 모양이었다. 어떤 엄마는 아이가 친구 문제로 학교를 전학하게 되었다는 아픈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였고 어떤 엄마는 아이에게 약간 폭력적인 성향이 있으니 도와달라는 이야기도 하였다고 했다.
" 그런데 확실한 거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인 것 같아. 따뜻하고 이야기도 잘 들어주고. 느낌이 좋더라고"
시간이 흐르면서 선생님이 좋은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승의 날이 되었을 때 아이는 자기 용돈을 모아서 선물을 준비하고 편지를 써서 가지고 갔던 모양이었다. 무슨 선물을 드렸냐고 했더니 동그란 통에 들어 있는 껌을 드렸다는 것이었다. 너무 약소한 선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제일 먼저 스쳤다. 선생님이 좋아하셨냐고 물었더니 아이는 선생님한테 칭찬을 받았다고 했다. 자기가 쓸 용돈을 아껴서 사 온 선물이기 때문에 정말 의미가 있다고 하면서 선생님은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했다.
(아들은 그때의 경험이 좋았는지 나중에 6학년 담임선생님한테도 같은 선물을 드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선생님이 무슨 껌을 선물로 주냐고 핀잔을 주는 바람에 상처를 받았다)
선생님은 강아지를 키우고 있었는데 중간에 강아지가 많이 아파서 3일 정도 휴가를 내고 학교에 나오지 못했다. 평소에 선생님이 강아지 사진을 공유하고 강아지의 일과를 아이들과 자주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 반 아이들은 강아지 주인 못지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강아지가 피자를 좋아해서 냄새만 맡아도 펄쩍펄쩍 뛴다는 얘기를 할 때는 아이의 표정에 행복감이 잔뜩 어려 있기도 하였다. 다행히 선생님의 강아지는 몇 가지 수술을 받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고 선생님도 학교로 돌아왔다.
아이는 지금도 5학년 때 이야기를 하면 즐거워한다. 선생님에 대한 기억과 강아지에 대한 기억이 함께 떠올라서 생각만 해도 얼굴에 설렘이 가득 묻어 나온다.
처음 선생님을 만난 후에 선입견을 가졌던 것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마음이 절로 든다. 아찔하게 높은 구두 굽과 미니스커트, 진한 색조 화장은 그녀의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었다. 그것이 그녀의 직업적인 역량에 아무런 걸림돌이나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는데도 그렇게 보이는 것에만 매몰되어서 그녀를 지레짐작하고 판단해 버렸다.
반대로 옷차람이 단정하고 반듯하다고 해서 좋은 선생님이라는 보장도 없을 것이다. 부러질 듯이 가느다란 하이힐을 신고 머리를 풀어헤치거나 혹은 레게머리를 하고 다닌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될 것인가. 그저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정해 준다면 그것만으로 좋은 선생님이 될 자질은 충분한 것이다.
남편은 그 날의 학부모 총회를 잊지 못할 것이다. 근엄한 학부모 총회에 참석해서 의자 뺏기 게임을 하고 돌아오다니. 선생님의 아이디어가 너무나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