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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Feb 22. 2021

형님과 동서의 관계 심리학


 어느 날 시어머니가 폭탄선언을 했다. 그것은 정말 폭탄처럼 위력이 있는, 놀라운 선언이었다. 

" 이제 더 이상 제사 안 지내련다. 그렇게 알아라"

처음에는 장난이나 농담이려니 했다. 어머니가 40년이 훌쩍 넘도록 제사를 지내왔으니 이골이 나서 저렇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시는 건가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시가는 아주 보수적인 경북에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 나의 둘째 출산 예정일이 겹치는 바람에 명절에 내려가지 않았다가 난리가 난 적도 있었다. 제사가 끝나고 나서 술을 한 잔 걸친 시아버지는 전화를 해서 역정을 냈다. 만삭이라도 제사 지내러 내려왔어야 하지 않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유별나게 제사를 사랑하는 집안에서 더 이상 제사를 안 지내겠다니 덥석 믿기 힘들었다. 결혼하고 15년 정도 제사를 꼬박꼬박 지내면서 이제 제사 시스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어느 정도 익숙해지려고 하는 나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동서, 우리는 둘 다 어리둥절하면서 이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했다.

 사태를 파악하고 보니 제사를 그만 지내겠다는 엄청난 결단 뒤에는 바로 시숙모님의 존재가 있었다. 시숙모님은 뭐랄까. 여장부 같은 사람이었다. 숙모님은 키가 크고 골격이 아주 탄탄해서 배구 선수 같은 느낌을 주는 체형에다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3명의 자녀를 키우고 야간대학까지 졸업한 열혈 여성이었다. 그리고 숙모님은 정이 넘치고 손도 크고 가족이나 친척들과의 관계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숙모님은 올 때마다 지역 특산품이나 귀한 꿀 같은 걸 항상 챙겨와서 어머니께 드렸다. 

 그러나 그렇게 정이 많고 성격이 걸걸한 대신에 억척스럽게 살아왔기 때문인지 시숙모님의 말투에는 묘한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강한 억양과 상대방을 가르치려는 듯한 말투였다. 

" 아니야. 그게 아니야."라든가 "그렇지. 내가 말하는 게 바로 그거야" 그런 식이었다.

 가끔 숙모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노라면 나 또한 뭔가 알 수 없는 반항적인 심리가 솟아 나오곤 했다. 숙모님은 나와 동서에게도 가르침을 주고 싶어 했는데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 시부모한테 잘해. 딸이 없잖아. 그러니까 딸이다 생각하고 더 잘해야 돼"

가끔 명절에 내려가면 시어머니 스트레스가 아니라 시숙모님 스트레스가 더 심하다 싶을 정도였다. 그런데 숙모님이 나와 동서만 가르치고 싶어 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숙모님은 남편과 시동생도 가르치고 싶어 했다. 주제는 주로 등산의 효능과 운동의 필요성 그런 것이었다. 그럴 때도 그냥 운동하라는 권유만 하면 좋을 텐데 숙모님이 전국에 올라가 본 산에 대한 품평회가 쭈욱 이어지고 숙모님의 남다른 운동신경이나 건강상태에 대한 자랑이 이어지고 그러다 보면 나중에 듣는 사람은 살짝 지쳐서 그저 텔레비전을 보는 척하면서 시선을 피하게 되었다.

시숙모님은 명절 제사에 대해서도 가르침을 주고 싶어 했다. 오징어가 너무 작다거나 오징어를 몇 마리 더 사 와야 한다거나 고기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그런 잔소리를 하고는 했다. 시어머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손 위 형님인데 아래 동서가 어딘가 지적하고 가르치는 듯한 말투를 사용하니 감정이 상했을 것이다. 게다가 시어머니는 어려운 형편 때문에 중학교를 중퇴하였는데 그것이 언제나 어머니에게는 심한 컴플렉스였다. 숙모님이 야간대학을 나온데다가 대기업에서 정년퇴직을 하다 보니 어머니는 숙모님에게 열등감을 많이 느꼈다. 그런 어머니 입장에서는 숙모님의 지적이 눈꼴시게 느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알지 못하는 복잡 미묘한 문제들도 있었던 모양이었다. 시어머니가 숙모님께 큰돈을 빌렸는데 약속한 날짜에 갚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면서 시간이 흘러갔다. 숙모님은 독촉도 하지 못하고 속을 끓였을 것이고 그렇게 불편한 상황에서 갈등이  어이 없이 터져 버렸다. 

  그 날은 아침부터 제사 준비에 분주했다.  시어머니는 막 시금치나물을 무치고 있었다. 커다란 냄비에 굵은 소금을 넣고 팔팔 끓인 후 시금치를 데쳐서 찬물에 헹구고 물기를 꼭 짜서 막 무치려 하고 있었다. 시어머니가 시금치에 간을 하고 나서 시금치나물을 한 가닥 올려서 간을 보려고 하는데 숙모님이 시어머니의 손등을 탁 내리쳤다

" 제사 지내기 전에 간 보는 거 아니라요"

시어머니는 아마 무안했을 것이다. 그 날은 별 일 없이 시간이 흘러갔고 평소처럼 제사를 지내고 다들 헤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시어머니는 점점 더 기분이 불쾌해지고 화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기분 나쁜 행동이라고 생각하고 부글부글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제 잊고 있던 사소한 일들까지 하나씩 일제히 일어나서 시어머니 감정에 기름을 부었다

 ' 그래, 작년에도 와서 오징어가 적다고 잔소리를 했지. 재작년에 왔을 때도 나를 보며 기분 나쁜 표정으로 흘금거렸지"

결국 다음 제사 때 폭탄이 터지듯이 최악의 상황이 발생했다.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그리고 시숙부님과 시숙모 이렇게 넷은 서로 의견 조율을 하지 못하고 섭섭한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에는 얼굴을 붉히고 서로 상처 주는 말을 마구 투척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이런 상황을 현실에서 처음 목격하게 되니 놀라서 가슴이 마구 뛰었다. 결국 제사는 엉망이 되어 버리고 다들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시어머니는 드디어 제사 종식 선언을 한 것이다. 40년 넘게 제사를 지냈으니 이제 그만 지낼 때가 되었다고 당당하게 말씀하셨다.

 나와 동서는 뭐랄까. 처음에는 믿기 힘들었다. 서울에서 회사 생활하면서 나름 커리어우먼으로 생활하다가 어찌 된 영문인지 시골만 가면 단박에 부엌데기로 전락하는 나의 신세가 하루아침에 소공녀처럼 바뀔 수 있다는 걸 믿기 어려웠다. 항상 제사나 명절 때면 남자들은 무슨 이상한 병에 걸린 사람들처럼 방에서 자고 또 잤다. 동서와 나는 시어머니와 시숙모님의 전두 지휘 아래 마치 요리 경연 대회에라도 나온 것처럼 결연한 자세로 전을 만들고 뒤집고 난리를 피웠다. 경상도 배추 전만 20장, 부추전이 10장, 오징어 10마리, 동그랑 땡 100여 개를 부치던 그 난리굿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되었다.

숙모님께 감사해야 할지 어찌해야 할지 사태 파악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 이후 숙모님을 볼 수 없었다. 숙모님이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러 찾아 왔지만 어머니가 만나주지 않았다. 그렇게 목소리가 크고 기세가 당당한 숙모님이 문 밖에서 고개를 숙이고 용서해 달라고 비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결국 마음을 열지 않았다. 

  숙모님은 오징어 튀김의 달인이셨는데 숙모님의 그 오징어 튀김을 이제 맛볼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해 보면 결혼하고 15년 가까이 매번 제사와 명절 때마다 숙모님과 같이 연대하여 음식 준비를 했는데 이제 그 조직이 해체되었다는 것이, 그리고 이제 어쩌면 거의 볼 일이 없어졌다는 것이 슬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시끄러운 잡음과 난리가 지난 후에 정말 제사는 완전히 없어졌다. 이제 더 이상 제사 음식을 준비하지도 않고 제수 거리를 사러 갈 필요도 없어졌다. 한편으로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에만 해도 제사를 안 지내면 큰일이 날 것 같았는데 제사가 없어지고 나서 생각보다 이상한 일이 생기지도 않았고 이제는 오히려 제사를 지냈던 기억이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우리에게 효도하라고 큰 소리를 치던 숙모님과 나의 관계야 긴 세월이 아니었으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시어머니와 숙모님의 관계는 40년 넘게 이어온 관계인데 그렇게 단호하게 잘라내 버리다니 참 냉정하다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에 시어머니를 뵈러 갔는데 얼굴이 좋지 않았다. 사실 숙모님과 어머니가 안 좋은 일들만 있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둘은 여행도 다니고 가끔은 자매처럼 허물없이 지내기도 했었다. 그랬는데 이제 이 지경이 되었으니 감정이 이상하고 복잡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어머니는 숙모님을 점점 더 원망하고 이제는 그 감정에 완전히 매몰되어 버렸다. 숙모님에 대한 원망스러운 마음을 마치 곰국을 끓이듯이 계속 가슴속에 되새김질하다 보니 완전히 지치고 갑자기 훌쩍 늙어 버렸다.

 사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에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간다. 한 번 보고 지나칠 사람이라면 상관없지만 두고 두고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가장 힘들고 가장 지치는 사람은 바로 자기 스스로가 되어 버린다. 끊임없이 숙모님을 미워하고 원망하면서 본인의 감정을 정당화하려는 것조차도 결국은 자신을 고갈시키는 일이다. 나는 어머니의 지친 얼굴과 어두운 낯빛을 보면서 그런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가까우면서도 가장 멀고 힘든 사이, 그게 바로 동서 간의 사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 예의를 갖추고 배려하면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오래도록 감정이 상하지 않고 서로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해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결국 나 자신을 상하게 하고 그 상처는 아주 오래도록 아물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보다 미워하는 일에 더욱 신중해야 할런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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