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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말피에서 레몬사탕을 사지 못했다.

by 느리게 걷기

인천공항으로 가는 도로는 아주 잘 닦여 있었다. 차들은 속도를 내며 그 도로를 신나게 질주하고 있었다. 공항 방면으로 가는 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차들은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 사람들의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까지 가득 싣고서 그 길을 달리는 것이다.


이제 공항에 도착해서 발권을 하고 라운지를 이용하거나 식사를 때우고 나면 탑승수속이 시작될 것이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기대하며 인천공항으로 가는 사람들은 여행에 대한 기대로 흥분되어 있다. 그 순간만큼은 기다란 발권 줄이나 탑승수속 줄에 서 있는 것이 힘든 일로 생각되지도 않을 것이며 지겨운 회사 업무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도로를 달리는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자유롭고 부풀어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 이른 새벽에 인천공항 쪽을 향해 달리는 차 한 대가 있다. 차 안에는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서 운전을 하고 오느라 피곤해 보이는 남편과 놓고 온 물건이 없는지 걱정하고 있는 아내가 있다. 그리고 뒷좌석에서 잠이 덜 깬 얼굴로 앉아 있는 중학생 아들과 초등학생 딸이 있었다. 가족들이 입고 있는 옷은 여행하기 편한 가벼운 셔츠나 반바지 같은 차림이고 차 안에는 다니엘 파우터의 Bad Day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회사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해외 가족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다. 옆 팀에 이 과장이 미국으로 떠났다느니 재무팀에 박차장이 유럽으로 가족동반 여행을 떠났다느니 하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왔고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하면서 다들 부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4인 가족이 다 같이 유럽 여행을 가려면 항공권에 숙박비에 비용이 만만치 않았으니 월급쟁이들에게 가족 동반 유럽여행은 오랜 로망이자 숙원사업이기도 했다. 마치 그것은 우리 가족이 이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고 이렇게 행복한 모습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혹은 자랑하는 그런 퍼포먼스 같은 것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 인천공항을 시원하게 달려가고 있는 자동차에 타고 있는 가족들은 이 비싼 해외여행을 막 시작하려는 찰나였다. 그러나 이 여행은 출발도 하기 전에 벌써 김 빠진 콜라 같은 맛을 풍기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는 폭풍 전야처럼 뭔가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내포하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 할런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그럴 것이 우리 뒷좌석에 앉아 있는 아들은 북한군도 무서워한다는 중학교 2학년이었으며 그 무시무시한 사춘기의 절정에서도 거의 상위 1퍼센트 이상을 기록할 만큼 타협이 불가한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만 해도 아들의 상태(?)가 이 정도로 심각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탈리아를 가고 싶다고 아들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노래를 불렀다. 로마와 베니스를 가 보고 싶다고 말하는 동그란 눈망울의 아들을 보면서 몇 년이 지나더라도 이 여행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렇게 계획된 여행이 드디어 현실이 되는 날이 온 것이었다. 그러나 여행 갈 시간이 다가올수록 아들의 질풍노도는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아들은 세상 모든 일에 무료하고 심드렁해졌으며 조금이라도 힘들거나 지루한 것을 견디기 힘들어했다. 그렇다고 해서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여행을 취소할 수도 없었다. 비행기 티켓은 마일리지로 이미 1년 전에 어렵게 예약해 놓은 것이었다. 어떻게 준비한 여행인데 이렇게 취소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그래도 해외에 나가면 아이도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일말의 희망을 안고 이 여행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여행은 시작부터 심하게 삐걱거리는 불안한 여행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공항 푸드코트에서 아들과 딸이 메뉴 선택과 음료수 주문 때문에 싸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 여행이 아주 힘겨운 여행이 될 거라는 것을 예감했다. 그저 싸움을 위한 싸움이 사춘기의 절정인 아들과 사춘기에 발을 들이밀려고 하는 딸 사이에서 계속되었고 나는 마음 같아서는 공항에서 그냥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진이 빠져 버린 우리는 10시간 가까이 비행을 마치고 로마에 도착했다. 그 날은 일단 숙소에서 쉬고 다음날 폼페이 남부 투어를 떠나기로 하였다. 다음 날 우리는 새벽 일찍 일어났다. 시차 덕분인지 새벽에 눈이 쉽게 떠졌고 우리는 트레미니 역 근처에서 투어 버스에 올랐다.


폼페이에 도착해 보니 그늘이 거의 없었다. 가이드는 며칠 전 비가 오는 바람에 무더위가 한풀 꺾였다고 우리에게 운이 좋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지만 우리는 연신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나는 챙겨 온 양산을 아들에게 내밀었다. 하지만 아들은 유럽 사람들은 아무도 양산을 쓰지 않는데 한국사람만 쓰고 있는 것 같다면서 나의 제안을 야멸차게 거절했다. 그리고 아들의 짜증이 슬금슬금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어른인 나와 남편은 폼페이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 재미있고 신기했지만 한창 게임에 빠져 있던 아들에게는 폼페이가 그저 허물어지다 만 유적지로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아들은 처음에는 가이드 말을 듣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나중에는 일행에서 뚝 떨어져서 혼자 어슬렁거리며 겨우 우리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아말피로 이동하고 나서 아들의 짜증은 극에 달했다. 덥고 목마르고 다리가 아프다는 말을 쉴 새 없이 반복하는 아들 때문에 나의 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레몬사탕을 한 봉지 사고 싶었다. 가이드가 이 곳에서 파는 레몬사탕이 아주 상큼하고 맛있는 데다가 가격도 저렴하니 꼭 사 보라고 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의 바로 뒤에는 질풍노도의 절정에 올라 있는 데다가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는 무시무시한 존재, 아들이 있었다. 이렇게 더운데 뭘 보러 온 건가요? 여행 코스가 정말 별로네요. 아들의 빈정거림이 그나마 존댓말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할 지경이었다. 그런 아들에게 엄마가 레몬사탕을 꼭 먹고 싶으니 길에서 잠깐만 기다려 주겠니라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보다 못한 가이드가 아들에게 제발 불평 좀 그만하라고 얘기하면서 아들의 상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아들은 처음 보는 가이드에게 화를 낼 수는 없으니 만만한 엄마에게 계속 진상짓을 부렸다. 아말피 식당에서 나온 화덕피자는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손도 대지 않았고 카페에서 큰 맘먹고 주문한 유자 아이스크림도 한 숟갈 먹고 안 먹는 바람에 내가 다 처리를 했다.


에휴, 이 놈의 팔자야 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이탈리아, 그것도 아름다운 아말피를 걸으며 이 지긋지긋한 잔소리와 빈정거림을 스테레오로 들어야 하다니. 해변으로 이어진 골목에는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가게 앞에는 나무로 만든 가판을 내어 놓고 레몬사탕이나 레몬 비누, 아니면 레몬 음료 같은 것을 팔고 있었다. 노란 색깔의 상큼한 그 기념품들을 만져보고 구경해 보고 싶었는데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나는 그저 눈으로만 슬쩍슬쩍 그 풍경들을 빠르게 담아 보면서 그저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빠르게 발을 놀려야 했다.


오은영 박사 정도의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두 손 두 발 다 들어버릴 정도의 중증 중2병에 걸린 아들을 대동하고 걷는 아말피 해안은 아름다운 도시가 아니라 그저 지긋지긋하게 끝나지 않는 골목과의 전쟁이었다.

어떻게 로마로 다시 돌아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그 날은 파김치가 되어 버렸다. 아들은 숙소로 돌아와서 에어컨을 켜 주니 오히려 편안해졌다. 에어컨 아래에서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며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더니 이제 남은 기간 동안 여행을 따라다니지 않겠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이제 그냥 하루 종일 숙소에 남아 있겠다는 것이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정말로 뚜껑이 열린다는 것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내가 만약 주전자였다면 내 뚜껑이 폭발하듯이 위로 튕하며 튀어 오르고 천장까지 올라가서 부딪혔을 것이다. 이게 어떻게 온 여행인데. 그리고 심지어 그토록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이탈리아 아닌가. 이 곳에 오기로 계획한 것도 모두 아들 때문이었다. 부모는 가끔 아이들의 희망을 자신의 것과 동일시하거나 혼동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들이 가고 싶다고 했던 이탈리아는 어느새 나의 워너비 여행지가 되어 버렸고 아들과 함께 이탈리아 도시를 여행하는 것은 행복한 꿈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계획을 다 수포로 만들어 버리고 숙소에 틀어 박혀 있겠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하루 뒤에는 바티칸 투어가 예약되어 있었다. 아름다은 그림과 조각들, 그리고 천지창조 같은 작품을 바로 눈 앞에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바로 눈 앞에 있는데 이걸 다 포기하고 숙소에 틀어 박혀 있겠다니. 게다가 그 투어 비용은 이미 한국에서 다 지불이 완료된 상태였다.

여기까지 와서 하루 종일 게임을 기어이 하겠다니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 화가 나서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었다. 내가 그렇게 감정을 삭히지 못하고 있으니 남편이 다가왔다.

" 아이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어떨까?"

나는 남편을 흘깃 올려다보았다. 나는 남편에게 화풀이라도 하는 심정으로 남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남편이 다시 말을 이었다

" 어차피 오늘 보니까 같이 계속 움직이면 서로 부딪히고 힘들 것 같아서 그래.

4명이 모두 행복할 수 없다면 3명이라도 행복하자는 마음으로 여행을 계속하는 게 어떨까? 그리고 숙소에 남아 있는 아들이 자기만의 시간이 행복하다면 4명이 모두 행복해지는 거잖아"

처음에는 그 말에 선뜻 동의할 수가 없었다. 아들을 어르고 달래고 설득해 보고 그것도 안 되면 협박을 해서라도 끌고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일단 나가서 이 도시를 걷고 즐기다 보면 아들의 생각도 변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의 태도는 완강했다. 그리고 사실 아들은 우리를 따라다닐 체력도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들은 밤새도록 게임을 하고 낮에는 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많이 걷는 여행은 체력적으로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우리 세 명이서 여행을 계속했다. 로마에서도 피렌체에서도 그리고 베니스에서도 말이다. 그나마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숙소를 옮길 때 기차를 탈 때 아들은 아주 짧은 여행의 기분을 느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스위스로 넘어갈 때 남편은 배로 이동하자고 제안했다. 원래 기차로 이동할 생각이었지만 남편이 경로를 바꾸자로 말했다. 아들이 그나마 숙소를 옮길 때는 군말 없이 잘 따라오니 슈피츠라는 곳에서 배를 타고 이동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 이동하는 동안 아들이 주변을 볼 수도 있고 그동안이라도 핸드폰을 보지 않을 거라는 거였다. 그래서 우리는 커다란 캐리어를 낑낑거리며 슈피츠에서 기차를 내렸다. 그림 같은 풍경이 계속 이어졌다. 빙하가 녹아서 내려온 물은 에메랄드 빛을 띠고 있었고 해안을 따라 오렌지 색깔의 지붕이 이어졌다. 얕은 해안에서는 다이빙을 하거나 수영을 하는 사람들이 간혹 눈에 띄었다.


핸드폰에 코를 처박고 있던 아들도 아름다운 풍경에 마음을 빼앗긴 모양이었다. 아들은 배 갑판에 나와서 호수를 바라보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며 앉아 있는 모습은 꽤나 멀쩡해 보여서 우리는 뿌듯해했다.

그렇게 시작부터 위태위태했던 유럽여행은 끝이 났다. 역시 보이는 것과 진실 사이의 간극은 꽤나 엄청나다. 가족 모두가 유럽으로 떠난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실상 그 여행은 그렇게 화기애애한 여행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로 간의 다른 생각과 엇갈린 기대를 확인하고 서로 실망을 주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래서 보이는 것만을 보고 그것을 평가하는 것은 사실은 아주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주었다. 새로 준비한 옷과 신발을 신고 발랄하게 떠났던 여행이지만 나는 지금도 아말피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빠르게 걷던 나의 모습이 어렴품이 그려져서 슬퍼진다. 그리고 기어코 레몬사탕은 맛도 보지 못했다.


4명이 행복할 수 없다면 3명이라도 행복해지는 게 어떻겠냐고 했던 남편의 제안이 없었더라면 그 여행은 정말 최악의 여행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 아이와 계속 싸우고 신경전을 벌이고 나중에는 나와 남편의 싸움으로 번지고 그렇게 다들 엉망인 상태로 우리는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3명이라도 행복하자고 했던 제안은 그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나는 로마와 피렌체와 베니스를 오롯이 즐기고 많은 사진도 남겼다.


다행히 아들에게도 그 여행 중에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있었다고 했다. 한 가지는 슈피츠에서 배를 타고 튠 호수를 건넜던 것이고 한 가지는 숙소에서 혼자 있도록 자신을 존중해 주었던 일이라고 했다.


인생에서 아이를 키우는 것은 가끔은 형벌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의도하거나 계획한 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고 자식은 나의 계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기 위해서 하늘이 내려보낸 심술궂은 존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죽을 것처럼 힘들고 내 마음을 내가 어쩌지 못할 때는 그냥 한 발 물러나는 순간이라고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적어도 죽을 수는 없으니까 어떻게든 무언가를 포기해 버리면 그래도 전체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덜 속상하니까 말이다.

심하게 몰아치는 파도 위에서 나뭇잎처럼 출렁이는 조각배를 타고서 그 배 위에 온갖 물건들을 다 움켜쥐고 있다면 결국 배는 침몰해 버릴 것이다. 배 위에 있는 술이나 돈이나 음식이나 옷가지나 그 무엇이라도 던져 버려야 배는 침몰하지 않고 그나마 생존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나의 상황이 꼭 그런 상황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그 여행에서 나는 아주 힘든 무언가를 내려놓고 양보했었다. 바티칸 성당에서 그리고 아름다운 베니스의 어느 뒷골목에서 나는 가슴 한 끝이 찌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에게 이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안타까웠기 때문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 웅장하고 아름다운 것을 우리만 보고 간다는 것이 슬프고 아쉬웠지만 그때 강제로 아이를 끌고 나왔다고 해서 아이가 그 감동을 느꼈을지는 역시 의문이다.


아주 많은 기대를 가지고 떠났을 때 그 기대와 희망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역시 어렵다. 그러나 내가 가진 모든 카드를 끝까지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에 남은 카드를 겨우 지켜낼 수 있었다. 아주 힘든 사춘기를 보낸 아이와 함께 했던 여행에서 내가 배운 것은 인내심과 내려놓음이었던 것 같다.

죽을 것처럼 고통스럽고 후회스럽고 최악의 여행이라고 생각했던 여행도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니 나에게 무언가를 남겼다. 그래서 그 여행은 최악의 여행은 아니었다. 아주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그래서 희미하게 미소 짓게 하는 그런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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