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2학년 어느 주말이었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서 마음껏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를 건 친구는 정혜라는 친구였다. 최근에 꽤 친해져서 자주 농담을 하거나 장난을 치는 사이였는데 주말에 전화를 걸어온 건 처음이었다. 정혜는 시내 로터리 근처에 있는 태극당 제과점으로 나오라고 했다.
" 무슨 일인데?"
" 오면 얘기해 줄게. 빨리 나와. "
그 날 특별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그런데 전화를 끊으려던 정혜는 급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 참, 너 예쁘게 하고 나와. 알겠지?"
혹시 남자를 소개해 주려고 그러나. 그런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뭔가 상황이 적절하지 않았다. 소개를 해 주려고 했다면 며칠 전에 미리 얘기를 했을 텐데 이상하다 싶었다.
나는 궁금증을 안고 태극당으로 나갔다. 그런데 태극당에 도착해서 보니 나에게 이쁘게 하고 오라던 정혜가 정작 엄청 멋을 부리고 앉아 있었다. 정혜는 평소에 입지도 않는 스커트를 입고 있고 위에도 소매가 볼록하게 셔링이 잡혀 있는 그런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화장을 했는지 얼굴에는 분을 바른 것처럼 뭔가 허여멀건 얼룩이 잡혀 있고 입술도 칠한 것 같았다. 평소에 학교에서 보던 모습과 어딘가 다른, 어색한 모습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 무슨 일이야? 갑자기?"
그러자 정혜는 몸을 바짝 내 쪽으로 당기며 비밀을 털어놓는 것처럼 은밀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정혜는 군대에 있는 군인과 펜팔을 하고 있었다. 거의 1년 넘게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 군인이 휴가를 받아서 갑자기 찾아오겠다고 어젯밤에 연락을 했다는 것이다. 갑자기 만나려고 하니까 너무 떨리고 걱정이 되어서 밤새 잠을 설쳤는데 드디어 아침이 밝아 오고 고민을 거듭하다가 생각해 낸 것이 나더러 대신 그 남자를 만나 달라는 것이었다.
그 대목에서 나는 어이가 없었다. 소설이나 드라마에 보면 누군가를 만나야 할 때 자신이 나가지 않고 대리로 누군가를 보내는 그런 이야기들이 종종 등장한다. 보통 그런 경우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경우이다. 원래 나가려고 했던 사람이 몸이 불편한 사람이라서 그걸 숨기고 싶다거나 아니면 외모가 너무나 흉해서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내려고 하거나 그런 경우들 말이다.
사실 정혜에게 그 당시 문제라고 한다면 정혜가 많이 뚱뚱하다는 것이었다. 정혜는 키가 160 정도 되었고 몸무게는 아마 80킬로가 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짐작을 해 본다. 그러니까 정혜는 자기가 그렇게 뚱뚱하기 때문에 그 남자 앞에 나서기가 부끄럽고 싫다는 것이었다. 둘은 편지로 나름 설레는 감정을 공유해 왔었는데 자기를 직접 보면 군인 오빠가 분명히 실망을 하고 돌아갈 것 같아서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그러니 내가 자기 대신 정혜인 것처럼 행세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마 그 군인도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오래 있지는 못할 거고 1시간 정도 있다가 다시 부대로 복귀할 거라는 게 정혜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사실 나도 누군가를 대신해서 그 자리에 나갈 자격은 없었다. 참으로 인정하기 싫지만 나도 그 당시 정혜 못지않게 뚱뚱했기 때문이었다. 정혜가 160에 80킬로를 육박하는 몸무게라면 나는 165에 70킬로를 육박하는 몸무게였다. 그러니 정혜의 시선으로 보기에 내가 좀 날씬해 보일지 모르지만 일반적이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우리 둘을 본다면 사실 도찐개찐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었다.
그리고 정혜는 많이 뚱뚱하기는 하지만 아주 귀엽게 생긴 얼굴이었다. 눈과 코, 입이 오밀조밀하고 웃을 때 보면 양 볼에 보조개가 패이는 것이 귀여운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나는 그때 시력이 좋지 않아서 아주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있었고 그렇다고 남자들이 좋아할 외모도 아니었기 때문에 정혜를 대신한다는 것은 사실 아이러니였다.
우리는 서로 팽팽하게 대치했다. 아마 그때 우리를 가까이에서 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엄청 재미있어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 야, 네가 더 이뻐"
" 아니야. 네가 더 이뻐."
이러면서 서로 말씨름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정혜의 태도가 워낙 강경한 바람에 나는 결국 정혜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정혜는 나에게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미리 알려 주었다. 그러니까 그것은 주로 그 군인과 나눴던 편지의 내용이었는데 최근에 자기는 공부에 대한 고민을 얘기했고 그 군인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으니 군인 오빠가 오면 실수하지 말고 자기인 것처럼 잘 이야기를 이끌어 달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가 예행연습을 한창 하고 있는데 약속한 시간이 다가왔다. 정혜는 제과점 구석에 앉아 있을 테니 신경을 쓰지 말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대답을 하였고 시간이 다가오자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처럼 가슴이 심하게 두근거리고 긴장이 되었다.
그리고 태극당 문이 열리고 그 군인 오빠가 들어왔다. 그런데 아,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 군인 오빠는 아주 잘 생긴 남자였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를 하고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군인답지 않게 얼굴이 하얗고 선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나는 시커멓고 어딘가 거부감이 드는 군인을 상상하고 있었는데 예상치도 못한 잘 생긴 군인이 들어와서 머뭇거리며 내 이름을 묻자 완전히 얼어 버렸다. 나는 정혜라고 내 소개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군인 오빠는 몇 가지 빵을 주문했고 우리 둘은 빵과 우유를 놓고 마주 보고 앉았다. 군인 오빠는 다정하게 빵을 잘라 주면서 어서 먹으라고 했다. 그리고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공부하느라 힘들지는 않은지 그런 것들을 자상하게 물어보았다.
그때 나의 머릿속에는 다시 소설의 한 장면이 연상되었다. 책을 너무 많이 읽은 부작용이었는지도 모른다. 일단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전개되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우연한 장소에 여자와 남자는 나간다. 원래 만나기로 했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어떤 이유로 둘은 내키지 않는 걸음을 하고 그곳에서 대화를 나누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원래 만나야 할 사람보다 둘은 더 이야기가 잘 통하고 결국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 원래 나타났어야 할 사람은 뒤에서 혼자 후회하며 눈물을 흘리지만 이미 그의 존재는 잊히고 이제 남자와 여자 두 사람만이 남는 것이다.
나는 그런 상상을 해 봤다. 그런 상상을 하고 있으려니 내심 즐겁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뭔가 알 수 없는 그런 느낌이 가슴속에 서서히 퍼져갔다. 무언가 간지럽고 달콤하면서도 설레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제과점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정혜가 일어나더니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 나쁜 계집애가 자기가 사실은 정혜라고 폭탄선언을 하고 멋쩍게 웃었다.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하던 군인 오빠는 재미있다는 듯이 막 웃더니 괜찮다고 정혜에게 앉으라고 했다. 이제 나와 정혜의 자리는 바뀌었다. 정혜는 선심이라도 쓰는 듯이 자기 자리에 가서 남은 빵을 먹고 가라고 말했다.
정혜 자리에 가 보니 그래도 단팥빵 2개 하고 크로켓이 접시에 담겨 있었다.
정혜도 보는 눈이 있으니까 군인 오빠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혹 했던 걸까. 그래서 나와 군인 오빠가 어딘가 모르게 다정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니까 안 되겠다는 다급함에 발 빠른 판단을 한 거였을까.
" 이럴 거면 도대체 나를 왜 부른 거야? 나쁜 계집애"
나는 단팥빵을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크로켓도 사정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날 그렇게 나는 멀찌감치 앉아서 정혜와 군인 오빠의 다정한 데이트를 지켜보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주 짧은 순간 내 머릿속에서 연출했던 극적인 전개는 결국 나의 상상으로 허무하게 끝이 났다.
그렇다. 역시 남의 남자는 탐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