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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Mar 18. 2021

잃어버린 시간(3회 중 1회)

# 소녀

  경희를 처음 보았을 때 장면이 그려진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어째서 그때의 기억이 이토록 선명한지 모르겠다. 그때 장면은 한 장의 그림처럼 한 장의 필름처럼 내 안 어딘가에 각인되었다. 그 아이의 서 있던 모습과 한쪽 발을 뒤로 빼고 수줍어하던 자세까지도 말이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었고 매주 어린이 불교 법회를 다니고 있었다. 불교 법회 장소는 대웅전 뒤에 있는 불교 유치원 건물이었다. 주말에는 유치원을 열지 않으니 그 건물을 빌려서 어린이 법회도 하고 교육도 하고 활동도 하는 식이었다. 

 경희는 엄마 손을 잡고 교실 뒤편에 있는 문으로 들어왔다. 우리를 가르치던 선생님이 경희와 경희 엄마를 앞 쪽으로 오도록 했다. 선생님은 먼저 경희 어머니를 소개했다. 

" 경희 어머니가 피아노를 기증해 주셨어요. 모두 감사의 박수를 보냅시다. " 

우리는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교실에는 10살에서 13살까지의 아이들이 섞여 있었고 모두 열 명쯤 되었다. 선생님은 잠시 후 경희를 소개했다. 

" 이 친구 이름은 경희예요. 4학년이고 피아노를 아주 잘 치니까 앞으로 반주를 맡을 거예요. 모두 사이좋게 지내요. "

 경희는 골덴으로 된 자주색 투피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양쪽으로 묶고 있었는데 안경을 끼고 있었다. 얼굴은 말괄량이 삐삐처럼 마르고 코 옆에는 주근깨가 보였다. 경희는 차콜색 양말을 신고 있었는데 양말은 무릎까지 가지런히 올라가 있었다. 그 아이의 발뒤꿈치는 날렵하고 어딘가 우아한 데가 있었다 

   바닥에 방석을 놓고 가부좌 자세로 앉아 있던 우리 중에 그런 옷차림을 한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우리는 골덴 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있거나 어딘가 어깨나 폼이 맞지 않는 어색한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고무줄이 늘어난 양말을 신고 있던 우리들은 갑자기 우리 옷차림새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경희는 인사가 끝나자 피아노 앞에 앉았다.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피아노 위에 놓여 있던 책을 펼쳤다. 그 아이 손에서 익숙한 반주가 흘러나왔고 우리는 그 반주에 맞춰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잘 치는 아이들은 주변에 있었지만 경희처럼 잘 치는 친구는 없었다. 경희는 처음 보는 악보도 당황하는 법이 없이 바로 연주를 시작했고 중간에 틀리거나 버벅거리는 법도 없었다. 그 연주란 게 상당히 훌륭한 수준이어서 피아노를 잘 모르는 우리 귀에도 경희가 뛰어난 연주자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경희가 들어온 지 한 달이 넘어가는데도 우리는 쉽게 그 아이와 친해지지 못했다. 경희는 어딘가 불편하고 어려운 데가 있었다. 말수도 많지 않고 먼저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러나 선생님은 경희를 아끼고 특히 사랑하는 것 같았다. 우리가 경희보다 훨씬 오래 선생님을 알아 왔는데도 선생님은 이제 오직 경희에게만 관심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선생님은 경희를 대할 때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자주 지었다. 가끔 스님이 교실에 들어오면 ' 이 아이가 경희입니다. ' 하고 경희만 따로 소개를 시켰다. 스님이 경희 쪽으로 고개를 돌려서 따뜻한 시선으로 고개를 끄덕이면 우리는 모두 경희를 부러워했다. 


 그러니까 신분이나 계급이란 게 없었지만 만약 그런 게 있었다면 경희와 우리 사이에는 분명히 다른 경계 같은 것이 존재했다. 경희가 신고 있는 차콜색의 도톰한 무릎 양말과 우리의 목이 늘어진 양말 사이에 설명할 수 없는 무엇처럼 말이다. 경희의 머리는 언제나 단정하게 양갈래로 묶여 있었고 말을 할 때는 입에서 오렌지 치약 냄새가 났다. 


  우리들은 경희를 남몰래 동경했다. 서로 경희와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경희와 가장 친해진 사람은 바로 나였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 둘이 친해졌다기보다는 내가 경희에게 접근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태도에는 어딘가 굴욕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경희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경희를 만날 때마다 편지나 초콜릿을 주었다. 한 번은 정말 큰 맘먹고 큰 선물을 한 적도 있었다. 퀼트 천으로 만든 동그란 핸드백 같은 것이었는데 가격이 만원 가까이 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른들이 주는 돈을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아서 경희에게 그 가방을 선물했다. 사실 바쳤다고 하는 편이 솔직한 표현이다. 나는 그 선물을 고르고 포장하면서도 경희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리고 선물을 주던 날에도 경희의 표정을 쉴 새 없이 살피며 경희가 그 가방을 마음에 들어하는지 불안해했다. 


 다행히 경희는 그 가방을 마음에 들어했다. 다음에 만날 때도 그 가방을 메고 나왔으니 말이다. 그렇게 나는 차마 내가 가질 수도 없을 만큼 비싼 선물을 그 아이에게 주고 그 아이의 마음을 얻는 것으로 만족했다. 어차피 그 가방은 나에게 어울리지도 않는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말이다. 

 나는 작은 엽서에 짧은 편지를 적어서 경희에게 주곤 했다. 거기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네가 특별한 친구가 될 거라는 것을 알았어. ' 

경희는 나의 카드에 답장을 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경희 집은 부자들이 많이 사는 동네에 있었고 정원이 딸려 있었다. 경희네 아버지는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는 피아노 학원 원장이었다. 마당에는 나무 몇 그루가 심어져 있고 키가 작은 꽃들이 줄을 맞춰 있었다. 그 정원 쪽으로 커다란 창이 나 있는 방이 바로 경희의 방이었다. 경희의 방에는 책상과 책꽂이가 있고 검은색 피아노와 침대가 있었다.
 

    나의 방에도 책상은 있었지만 피아노와 침대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런 물건을 자기만의 공간에 두고 언제든 손을 뻗을 수 있다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경희네 집에 처음 갔던 날 나는 경희 방에서 숨길 수 없는 부러움을 그대로 드러냈다. 경희는 나의 부러움이 담긴 시선을 싫어하지 않았다. 그 아이는 그런 시선에 이미 익숙한 것 같았다. 부러움과 경탄과 동경의 시선은 이미 그 아이에게는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이었다. 


 경희 방에는 놀라운 것이 또 있었는데 그것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상장이었다. 성적 우수상, 글짓기 우수상, 미술대회 우수상, 착한 어린이 상 , 반장 임명장, 나는 상의 종류가 그렇게 많은 것에 놀라고 경희가 그렇게 많은 상장을 받았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랬다. 경희는 피아노만 잘 치는 것이 아니라 공부도 잘했다. 당시 여자 아이로는 드물게 반장을 맡고 있었고 학교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나는 경희와 점점 가까워졌다. 우리는 학교가 달라서 주말에만 볼 수 있었지만 그때마다 옆에 붙어 앉았다. 경희는 재미있는 친구는 아니었다. 농담을 받아치거나 장난을 칠 줄을 몰랐기 때문이다. 내가 웃긴 말을 하면 항상 반응이 느렸다. 다른 아이들처럼 고무줄놀이를 하자거나 철봉에 매달려 있자고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나에게 경희는 특별한 친구였다. 선물로 받은, 사이즈가 맞지 않는 외투처럼 불편하지만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은 그런 존재였다. 내가 가져 보지 못한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아이, 그래서 그 아이와 함께 걷기만 해도 나는 특별해 지는 같았다. 

비록 나는 팔꿈치를 기운 옷을 입고 있지만 피아니스트처럼 피아노를 연주하는 경희의 친구라는 사실이 나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렇게 경희를 추종하면서 그 곁을 맴돌았다. 경희는 나를 아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내가 잊을만 하면 나에게 친밀함을 표시했다. 그 아이가 조금씩 보내 주는 친밀함의 징표에 나는 쉽게 감동하곤 했다. 그렇게 나는 오래도록 경희 곁을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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