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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Mar 21. 2021

잃어버린 시간(2)

  나는 경희와 같은 중학교에 입학했다. 경희는 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경희는 3년 내내 당연하게 반장이었고 3학년 때는 전교 회장이 되었다. 우리가 조회를 하기 위해 운동장에 나가면 경희는 마이크를 잡고 앞에 서 있었다. 경희는 ' 교장 선생님께 경례' 하고 구령을 붙였다. 우리는 경희의 구령에 맞춰서 교장 선생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앞에는 높은 교단이 있고 교장선생님은 그 교단 위로 올라갔다. 선생님들은 각자 맡은 반의 앞 쪽에 서 있었는데 경희는 선생님들 가까이 서 있었다. 마이크를 쥐고서 말이다. 조회를 마치고 교실로 들어갈 때 경희도 천천히 걸어서 들어갔다. 그럴 때 경희 얼굴은 약간 상기되어 있었다. 수줍음과 뿌듯함이 모두 엿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경희는 그런 표정을 금새 거두고 무표정한 표정으로 자기 교실로 들어갔다.  


  경희는 중학교 내내 일등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반 배치고사에서도 일등을 했다. 당연한 결과였지만 온 시내가 떠들썩했다. 그때는 시내에서 경희를 모르면 간첩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나올 정도로 경희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경희 또래 자식이 있는 집 부모들은 경희를 본받으라는 잔소리를 곧잘 했고 아이들은 경희하고 비교당하는 게 싫다고 툴툴댔다. 경희는 그런 존재였다.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한 존재, 우리가 동경하고 부러워 하지만 감히 넘볼 수 없는 존재, 경희는 그런 존재였다.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경희와 같은 반이 되었다. 담임은 결혼을 하지 않은 노처녀 선생님이었다. 나이는 30대 중반이었다. 선생님은 이제까지 내가 만났던 선생님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아이들을 격의 없이 대했고 자신의 연애 이야기도 술술 털어놓아서 아이들의 환호를 받았다. 


  한 번은 선생님이 늦게까지 교실 정리를 하던 아이들을 데리고 떡볶이 집에 간 적이 있었다. 우리는 대 여섯 명 되었는데 학교 근처 분식집에 몰려가서 떡볶이와 순대를 시켰다. 선생님은 짧은 단발 파마 머리를 하고 있고 얼굴에는 여드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선생님은 다음에 선생님 집에 놀러 오라고 제안을 했고 우리는 그 계획을 세우느라 신이 나 있었다. 


   다른 선생님과 함께 있는 자리였다면 그 날의 주인공은 당연히 경희였을 것이다. 선생님들이 경희를 대하는 태도에는 공통적으로 비슷한 것이 있었다. 선생님들은 마치 주변에 있는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것처럼 경희에게만 관심을 보이고 질문을 하고는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 담임은 경희한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담임은 오히려 활달하고 말이 많은 아이들한테 더 질문을 많이 던졌고 그러다 보니 경희는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그 날, 내성적인 경희는 유독 존재감이 없었고 말도 몇 마디 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경희 표정이 어색해지더니 일그러졌다. 경희는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자리가 파하자 사라져 버렸다. 표정은 차갑고 도도했다. 나는 경희의 뒷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을 홀대한 단원들처럼 말이다. 무대 뒤에 얌전히 있어야 하는 조연들이 일제히 무대 중앙으로 나와서 주인공의 자리까지 차지해 버린 것 같은 미안하고 무안한 기분이었다.  


  그 뒤로 경희는 학교에서 나에게 거리를 두는 것 같았다. 말도 자주 걸지 않고 자기 주변 친구들하고만 어울렸다. 마음이 쓰였지만 마냥 경희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을 수도 없었다. 여고에서는 재미있는 사건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벌어지기 때문이다. 옆 반 미정이가 과학선생님한테 주려고 꽃다발을 들고 왔다느니 그런데 그 과학선생님이 어떤 유부녀와 바람을 피워서 난리가 났다느니 하는 소문들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경희하고 소원해진 것에 일일이 신경을 쓰거나 마음 아파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올라오고 나서 경희의 성적이 조금씩 떨어졌다. 경희는 철저한 노력파였는데 고등학교 공부는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경희는 예전보다 더 지독하게 공부에 매달리고 쉬는 시간에도 자리에 앉아서 책만 읽었는데 이상하게 성적은 회복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 번은 모의고사에서 내가 경희보다 점수를 더 잘 받은 적이 있었다. 경희는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경희는 나를 대하는 표정이나 태도가 달라졌다. 경희는 용납할 수 없는 공격을 받은 사람처럼 방어적인 표정으로 나를 보곤 했다. 경희는 내가 자신과 동등해 지는 것, 혹은 자기를 넘어서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


   얼마 후 모의고사를 보던 날 사건이 벌어졌다. 시험이 다 끝나고 나는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왔다. 쉬는 시간이라 교실은 어수선하고 군데군데 자리는 비어 있고 아이들은 삼삼오오 떠들고 있었다. 그런데 내 뒤에 앉은 친구가 머뭇거리며 내 얼굴을 쳐다봤다. 왜 그러냐는 말에 그 아이는 대답했다. 네가 화장실 간 사이에 경희가 네 시험지를 꺼내서 점수를 확인하고 갔어. 시험이 끝나면 아이들끼리 가채점을 하고 점수를 대충 확인해 본다. 그걸 경희가 꺼내서 보고 갔다는 것이다. 남의 시험지를 몰래 꺼내서 보고 가다니.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 오르고 화가 치밀었다. 


 나는 경희 자리로 가서 따져 물었다. 경희는 복도로 나가자고 했다. 복도 끝으로 가서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경희는 울기 시작했다. 경희는 울먹이며 말했다. 나성적이 떨어지면 엄마한테 혼이 나. 엄마는 무섭게 화를 내고 밥도 주지 않아. 나는 죽고 싶어. 네 점수가 얼마인지 너무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 나도 모르게 네 시험지를 꺼내서 확인했어. 나도 왜 그랬는지 정말 모르겠어. 그냥 네 시험지를 확인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불안했어. 정말 미안해. 경희는 죽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 말에 움찔한 것은 나였다. 경희 얼굴은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해 보였다. 그 아이 말은 두서가 없었고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경희 엄마가 떠올랐다. 항상 스커트를 입고 있는 단정하고 지적인 얼굴 말이다. 우리 엄마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우아한 아줌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길에서 우리 엄마와 경희 엄마가 만났을 굳이 알은체를 하던 엄마 때문에 나는 얼마나 창피해 했던가. 그냥 지나치면 될 텐데 굳이 다가가서 누구 엄마라고 인사를 하던 화장기 없는 엄마 때문에 나는 화가 나서 발끝으로 땅바닥을 툭툭 치고 있었다. 단정하고 지적인 경희 어머니와 화장기 없고 늙어 보이던 우리 엄마, 그 사이에서 경희 엄마를 몰래 훔쳐 보면서 나는 마음 속으로 저런 엄마를 가지고 있는 경희를 더욱 부러워 했었다. 


   그렇게 우아한 아줌마가 성적 때문에 밥을 주지 않다니 그리고 경희처럼 공부를 잘 하는 아이가 공부 때문에 혼이 나다니 모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로 나와 경희 사이는 서먹서먹해졌다. 그리고 다음해 반이 갈리면서 우리는 더욱 볼 일이 없어졌다. 나는 가끔 복도를 지나가다 경희가 교실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도 경희만큼 바쁜 수험생이었고 우리는 서로의 안부를 물을만큼의 시간과 관심이 모두 없었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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