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는 학년이 올라가면서 성적이 조금씩 떨어졌다. 그러나 기본기가 워낙 탄탄했기 때문에 성적이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드라마틱하게 하향곡선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경희가 당연하게 차지하던 일등은 자주 놓쳤다. 경희는 2등을 하기도 하고 3등을 하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경희는 어두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서 책만 파고들었다. 화장실도 가지 않고 점심도 제대로 먹지 않고 책상에 앉아만 있었다. 그럴 때 경희는 악에 받힌 사람처럼 보여서 말을 걸기 무서울 정도였다.
경희는 대학 입시에 실패했다. 본인의 점수보다 높은 대학교에 지원했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경희는 자신의 점수와 실패를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장 높은 점수였을 때 가지고 있던 기대치를 계속 가지고 있었다. 경희는 재수를 하겠다고 했다. 겉으로 보기에 경희의 상태는 담담해 보였다. 아니 적어도 주변 사람들에게 초조한 기운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미련 없이 공부해 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후로 경희는 친구들 모임에도 따라 나왔다.
경희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같은 단과학원을 다니던 친구들 모임에서였다. 그 날은 나의 남자 친구인 K를 소개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K와 우리들은 같은 도시에서 자랐기 때문에 서로 아는 처지였다. 특히 K와 경희는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고 같은 반을 한 적도 있어서 서로 인사를 했다.
그 날 경희는 평소보다 말이 많았고 자주 웃었다. 평소 같으면 아이들이 떠드는 얘기를 듣고만 있을 텐데 그 날은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기도 하고 다른 아이 말에 맞장구도 쳤다. 경희 얼굴에서는 입시에 실패한 사람의 우울함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가끔 대화가 끊어질 때 경희 얼굴에 무거운 그림자가 잠깐 내려앉기는 했지만 경희는 금세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얼굴에 실패한 사람의 회한 같은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 후로 경희는 친구들과 연락이 끊어졌다. 우리는 캠퍼스를 누비며 연애하랴 놀러 다니랴 바빴다. 경희도 공부하느라 바빴을 테니 경희 쪽에서도 우리 쪽에서도 먼저 연락을 하기는 애매한 상황이었다. 경희가 재수까지 했는데도 원하던 대학에 가지 못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차마 삼수를 할 수 없어서 그냥 등록을 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경희가 우울증에 걸렸다는 소문도 돌았다.
경희를 만날 수 없었다. 그때쯤 경희는 우리의 전화를 일부러 피하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 우리도 제각각의 이유로 그만큼 바빴다. 우리는 젊고 에너지가 넘치고 세상에 호기심이 많았다.
그런데 남자 친구 K가 어느 날 경희 얘기를 꺼냈다. 경희가 K에게 연락을 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걸 물어보는 전화였고 두 번째는 어떤 친구의 연락처를 묻는 전화였다고 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걸려온 전화는 바다를 가고 싶다는 전화였다고 했다. K는 거절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했다.
네 번째 전화가 걸려온 날은 내가 K와 함께 있던 날이었다. 내가 경희의 전화를 받았다. 경희는 당황한 듯이 보였고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둘 다 어색했다. 결국 경희는 잘 지내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 후로 경희는 나에게도 K에게도 전화를 하지 않았다.
경희의 기이한 행동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경희는 왜 K에게 전화를 한 걸까? 설마 K에게 이성적인 감정이 있어서. 그게 아니라면 그냥 너무 힘들어서 누구라도 자기를 잡아 줬으면 해서. 그런데 그 대상이 왜 K인 걸까. 경희는 아직도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못한 걸까. 그래서 누구라도 자신이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경희는 그냥 나의 안온한 삶을 훼방놓고 싶었던 걸까.
경희는 간간히 연락하던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었다. 원래 살던 시골집도 이사를 가서 경희와 연락할 방법이 아예 없어졌다. 간간이 들려오는 소식에 의하면 경희는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경희는 행정고시 준비에 사활을 건 것 같았다. 행정고시에 합격하면 다시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얼마 전 시골에 갔다가 경희의 소식을 들었다. 경희는 10년 가까이 시험 준비를 했지만 결국 합격하지 못했다고 했다. 우울증과 불안장애 때문에 치료를 받고 있다는 소식도 함께였다.
경희의 화려한 시절은 경희에게 아름다운 노래가 아니라 슬픈 노래였던 걸까. 경희는 언제나 그 노랫가락에 취해서 현실의 자신을 인정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일까.
나는 몇 번이나 경희의 예전 번호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이 번호는 없는 번호입니다. 안내가 반복되었다. 인터넷에서도 경희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경희가 자신을 가두고 있는 작은 방에서 나오기를 바란다. 상장으로 도배가 되어 있던 그 작은 방 말이다. 그 방에서 걸어 나와 조금 허술하고 부족해도 그냥 괜찮다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날이 언젠가는 오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