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단편소설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리게 걷기 Apr 12. 2021

세입자 (1)

단편소설

 지윤은 지하철에 올랐다. 출근시간이 한참 지난 지하철 안은 한산했다.  입구 쪽 빈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으니 피로가 둑이 터진 제방처럼 몰려왔다. 지윤은 눈을 감았다. 


  주인 여자의 전화를 받은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지윤은 주방에서 빵을 굽고 있었고 아이들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었다. 와인을 사러 마트에 간 남편 선우가 들어오기만 하면 파티가 시작될 참이었다. 집 안에는 빵 굽는 달큰한 냄새가 퍼지고 있었고 캐럴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에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여유롭고 평화롭고 어딘가 주체할 수 없는 설렘으로 약간의 흥분 상태에 빠져 있는 그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갑작스러운 침입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지윤은 움찔했다. 이 시간에 전화 올 데가 없는데. 지윤은 불안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주인 여자였다. 주인 여자의 마르고 각이 진 얼굴형이 떠올랐다. 그러나 주인 여자 얼굴의 세세한 곳까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6년 전 전세 계약을 할 때 부동산에서 잠깐 본 게 전부였으니 이목구비까지 생생하게 떠올린다는 것은 무리였다. 주인 여자는 지윤과 비슷한 연배였다. 그녀는 30대 중반쯤으로 보였고 긴 생머리를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어딘가 새침하고 냉소적인 얼굴에는 특별한 감정이 없었다. 그저 부동산에서 벌어지는 행정절차가 귀찮고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 후로 그녀를 볼 일이 없었다.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라는 것은 계약서를 쓸 때나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지 그 이후에는 얼굴조차 기억하기 힘든 익명성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법이었다. 집에 문제가 생기면 연락하라고 주인은 말했지만 어차피 새 아파트였으니 문제랄 게 없었다. 지윤은 2년마다 전세금을 올려 주었다. 처음에는 2천만 원, 다음은 3천만 원이었다. 그때마다 전화를 걸어온 것은 언제나 주인 남자였다. 그는 손등에 털이 수북하게 나 있는 어딘가 고릴라 같은 느낌의 남자였다. 그러나 굵은 뿔테 안경을 쓰고 말없이 앉아 있는 수줍은 표정만 보더라도 그가 과묵하고 내성적인 고릴라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전세금을 올려 줄 때 잠깐씩 주인 남자와 통화를 했지만 그 짧은 순간의 용건을 제외하고 그들은 서로 마주칠 일도 전화를 할 일도 없었다. 그러니 주인 남자와 주인 여자의 존재를 완전히 잊어 버리고 지윤은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주인 남자가 아닌 주인 여자가 갑자기 전화를 해 온 것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무언가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날 거라는 것을 예감하면서 지윤은 주인 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주인 여자는 빠르게 용건을 말했다. 이 집에 계속 살 생각인가요? 지윤은  당연한 것을 묻는 질문 앞에서 적지 않게 당황했다. 그랬다. 지윤은 이 집에서 계속 살 생각이었다. 한 번도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간다거나 새로운 집을 찾아보려는 생각조차 한 적이 없었다. 어느새 이 집은 지윤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손때 묻은 코트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 이 집을 나간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낯선 일로 느껴졌다. 지윤이 당연히 이 집에 계속 살고 싶다고 대답을 하자 주인 여자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이번에 전세금을 시세대로 받으려고 해요. 1억 5천만원을 올리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실지 결정해서 알려 주세요. 


 그 쯤에서 지윤은 반쯤 얼이 빠져 버렸다. 지윤의 머릿속으로 1억 5천이라는 단어가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상대방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멍하니 있던 지윤은 정신을 차린듯이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혹시 가격을 조정해 주실 수 있으세요? 지윤은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말을 완전히 끝맺지 못하고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지윤은 갑자기 자신이 낯설고 초라하게 느껴졌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혼란스러운 기분에 사로잡힌 데다가 자신이 하려고 했던 말도 명료하게 끝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윤은 불에 데인 듯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지만 심장이 미친듯이 뛰고 있어서 대화를 차분하게 이어나갈 수 없었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놀랍도록 침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단 이사를 갈지 계속 살지 결정하고 전화 주세요. 주인 여자는 전화를 먼저 끊었다. 지윤은 멍하니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 집 안에 흐르던 따뜻한 기운과 달콤한 냄새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윤은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침대에 걸터 앉았다. 불과 10분 전과 완전히 다른 공간에 나온 것처럼 지윤은 두렵고 불안한 기분을 느꼈다. 지윤은 거실로 선뜻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잃어버린 시간(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