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남편이 생일선물로 받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다.
TV에 나오는 남자 연예인들은 아내 생일에 써프라이즈 파티를 열거나 이벤트를 잘만 기획하던데 현실의 남편은 역시 현실적이었다. 필요한 물건을 지정해 달라고 직접 물어보다니 참으로 낭만적 요소가 없다는 생각에 실망감이 절로 밀려왔다. 나는 뭐가 받고 싶은지 잠깐 생각해 봤다. 사실 특별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고 남편의 돈이 곧 나의 돈이고 우리 공동의 돈이기 때문에 선물이라기보다는 지출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최대한 실용적인 물품을 생각하려고 머리를 굴렸다.
나는 핸드폰 케이스가 낡아서 바꿔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떠올리고 핸드폰 케이스를 사 달라고 말했다. 그것도 카드를 같이 수납할 수 있는 지갑형 케이스여야 한다는 사실도 덧붙였다. 남편은 혹시 특별히 원하는 색깔이 있냐고 물었다. ' 글쎄, 때가 안 타는 색깔이면 좋겠지' 그렇게 생일선물에 대한 우리의 대화는 짧고 간결하게 끝이 났다.
며칠 후 생일날이 되어서 남편은 수줍은 듯이 뭔가를 들고 나타났다. 부피가 크고 무게도 제법 나가 보이는 것이 핸드폰 케이스가 아닌 것이 확실했다. 나는 약간의 기대감을 가지고 남편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선물 꾸러미를 내밀었다. 포장지는 작은 꽃들이 프린트된 무광의 종이 포장지였다. 남편은 그 종이 포장지로 선물을 포장하고 위에 다시 갈색 끈으로 리본을 묶어서 정성스럽게 포장을 완성한 모양이었다. 이런 디테일까지 신경 쓰다니 남편은 역시 나와는 다른 부류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매사에 덜렁대고 사고를 치는 나와 다르게 남편은 매사에 꼼꼼하고 치밀한 성격이다.
나는 천천히 선물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그 사이 자기 방에 틀어 박혀 있던 딸도 나와서 선물 개봉을 같이 구경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나온 것은 핸드폰 케이스였다. 케이스는 갈색이고 아무런 장식도 없는 지갑형 핸드폰 케이스였다. 땅바닥에 몇 바퀴를 굴려도 때를 탈것 같지 않은, 지독하게 단순하고 짙은 색깔의 핸드폰 케이스라니, 나는 1차로 살짝 실망을 했다. 나는 남편에게 '디자인이 아주 심플하네'라고 말했다. 칭찬도 불만도 아니었지만 남편은 칭찬으로 알아 들었는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얇은 비닐에 들어 있는 선물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나는 선물을 천천히 열어 보았다. 그것은 바로 앞치마였다. 앞치마는 하나가 아니라 자그마치 두 개였다. 하나는 민트색에 주름이 많이 잡혀 있는 풍성한 드레스형 앞치마였고 하나는 갈색톤의 기본형 앞치마였다. 생일선물로 앞치마라니. 어쩔 수 없이 나는 김 빠진 콜라처럼 피식 한숨을 쉬며 남편을 쳐다보았다.
" 당신이 맨날 앞치마가 어디 있는지 찾으러 다니잖아. 이 방 저 방 매일 돌아다니고. 그래서 내가 당신에게 꼭 필요한 앞치마를 색깔별로 준비했지"
남편은 천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다. 그것은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항상 앞치마를 찾으러 다닌다. 앞치마는 항상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다가 발견되곤 했다. 가끔은 아이들 방 책상에 있거나 옷장에 들어가 있기도 하고 빨래통에서 나오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앞치마가 필요할 때마다 나는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며 앞치마를 찾느라 한바탕 난리를 치른다. 다음부터 앞치마를 정해진 곳에 두어야겠다고 다짐하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그게 잘 지켜지지 않는다. 그러니 남편은 나의 Needs를 완벽하게 파악한 것이다. 나에게 앞치마는 꼭 필요한 물건이고 매번 앞치마 때문에 난리를 치르니까 앞치마를 선물하면 좋아할 거라고 기대했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남편의 선물에 항상 기쁨을 표시했다. 여기에서 기쁨을 표시했다는 것과 기뻐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항상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사실 순도 100%의 기쁨이었냐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곤란해진다.
남편은 결혼하고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에 강아지 인형을 선물했다. 그다음 해에는 캐릭터 방석이었다. 강아지 인형은 귀여웠고 캐릭터 방석은 푹신하고 따뜻했지만 내가 원하는 선물은 아니었다.
작년 크리스마스때 받은 선물은 빨강머리 앤 책이었다. 문제는 그 책이 한글판이 아니라 영자판이라는 데 있었다. 남편은 내가 책을 좋아하고 영어를 전공했기 때문에 이 책을 좋아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퇴근하고 굳이 광화문 교보문고까지 가서 이 책을 사 가지고 왔다고 했다. 그 말을 할 때 남편의 표정은 어찌나 뿌듯하고 행복해 보이는지 차마 교환이나 환불해 오라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남편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나는 자주 빨강머리 앤 책을 꺼내서 읽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진도가 영 나가지 않았다. 결국 30페이지 정도 겨우 읽고 난 후에 나는 책을 뒷방에 있는 책장으로 옮겼다.
여자들에게는 기념일과 선물에 대한 약간의 환상과 기대심리가 있다. 평소에는 장바구니에 담았던 물건을 몇 번이나 삭제하고 쿠폰을 찾기 위해서 이벤트 카테고리를 뒤지지만 기념일이나 생일에는 그런 지독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있다. 그래서 기념일이 되면 남편에게 평소와 다른 일상과 선물을 은근히 기대하게 된다. 그날만은 평소와 다르게 고급스러운 식당에도 가고 싶고 특이한 디저트도 먹고 싶고 비싼 브랜드의 선물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품어보게 되는 것이다.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지만 평소에 내가 자발적으로 구매하기 부담스러웠던 물건을 남편에게 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여름에 어울리는 작은 펜던트라거나 향수 같은 품목이 일단 떠오른다. 그러니까 그날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실용적이지 않더라도 특별한 선물을 받고 싶은 그런 심리가 나에게도 있었던 모양이다.
남편은 나에게 어서 앞치마를 입어 보라고 재촉했다. 앞치마를 펼쳐서 양쪽 팔을 끼우고 입어 보니 앞에 셔링이 잡혀서 중세 시대 드레스를 입은 것처럼 옆으로 풍성하게 앞치마가 펼쳐졌다. 앞치마가 이렇게 화려할 수 있다니. 가만히 보니 가슴팍에 뭔가가 새겨져 있다. 그것은 남편의 이름 이니셜과 나의 이름 이니셜이었다. 남편은 이 앞치마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앞치마라고 강조를 했다. 이런 식의 로맨틱함이라니.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남편은 이 앞치마는 평범한 앞치마가 아니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색깔부터 디자인까지 며칠을 고른 데다가 우리 이름의 이니셜이 새겨졌으니 아주 특별하다는 것이었다. 남편의 자세한 설명과 흐뭇한 표정을 보고 있으니 한편으로 웃음이 나왔다. 앞치마는 특별하기는 특별했다. 앞에 이름 이니셜이 크게 새겨져 있어서 입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갈 수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앞치마 선물은 감동은 없었지만 며칠 사용해 보니 아주 실용적이기는 했다. 천이 얇고 린넨 소재여서 일단 시원했다. 이전의 앞치마는 자꾸만 땀이 찼는데 이 앞치마는 아주 시원하고 가벼웠다. 그리고 디자인이나 색상도 세련되기는 했다.
나의 적당한 허영심은 전혀 만족시키지 못했지만 실용성과 편리성에서는 아주 우수한 선물임에는 틀림이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러나 가끔은 실용적이지 않더라도 약간은 불필요한, 그러나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고민할 수는 없는 걸까.
남편의 선물은 언제나 이렇게 2% 부족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선물을 준비하면서 나름 고심했을 남편을 생각하면 선물에 대한 불평을 계속 늘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쪼록 남편이 앞으로 선물을 고를 때 실용성이라는 기준 외에 더 필요한 요소는 없는지 여자의 심리관점에서 고민해보기를 희망해 본다. 물론 그게 갑자기 가능하기나 할지 생각해 보니 역시 기대는 섣부른 희망이 될 것 같다. 아마 앞으로도 남편의 선물은 2% , 아니 20% 부족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