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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리게 걷기 Aug 02. 2021

사춘기와 하드 디스크

  일요일 오후, 학원을 다녀온 아들이 간식을 먹다가 말을 꺼냈다.

" 엄마, 오늘 수업 시간에 제가 쓴 글을 읽었는데요. 선생님이 갑자기 훌쩍이는데 보니까 울고 계셨어요"

선생님이 울다니 도대체 무슨 일인가. 나는 인문학 선생님의 얼굴을 잠깐 떠올려 보았다. 인문학 선생님은 50대 후반의 내성적이고 점잖은 남자 선생님이었다. 나는 도대체 아들이 무슨 글을 썼길래 선생님이 훌쩍이셨다는 건지 궁금해졌다. 나는 아들에게 글을 보여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아들은 잠깐 망설이는 눈치더니 자기 방으로 들어가서 프린트된 종이를 가지고 나왔다.


     나는 천천히 아들의 글을 읽어 내려갔다. 글의 제목은 '사춘기와 하드디스크'였다.



   나는 중 2 때 하드디스크를 날려먹었던 적이 있었다. 그것도 아버지가 15년 가까이 찍어왔던 100기가가량의 내 어릴 적 사진들 말이다. 당시에 나의 사춘기는 극에 달했고 부모님과 싸우고 게임에 미쳐있었다.

   하드디스크를 날려먹었던 것도 게임을 하겠다며 컴퓨터를 포맷하던 바람에 날렸던 것이었다. 하드가 날아간 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하드디스크를 복구하러 업체를 찾아갔으나 40만 원만 날리고 떠나간 사진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우셨다. 사실 당시에는 별 생각이 없었다. 차라리 하드디스크에 사진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홧김에 지워버렸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다가 최근에 어렸을 적에 살던 동네를 들러보게 되었다. 당시에는 신축 아파트에 전세로 살았는데 1층에 살았었다. 8년 만에 가보니 크게만 느껴졌던 5차선 도로는 사실은 2차선 도로였고 요새는 놀이터가 되어 있었다. 정말 커 보이기만 했던 것들이 작다는 것과 내가 많이 컸다고 새삼 느꼈다.

   나는 1학년 때 ADHD 때문에 학교에서 문제아였다. 난 산만했고 선생님은 부모님을 수업에 불러서 내 옆에 앉히고 수업을 하기도 하였다. 그렇게 회사에서 연차를 내고 정장을 입은 채 부모님은 1학년 교실에서 나와 함께 수업을 들었다.

  그럼에도 우리 부모님은 항상 나에게 헌신적이었다. 친구가 없던 나를 위해서 아버지는 승진을 미뤄놓고 일찍 퇴근하여 나와 동네 아이들의 축구판에서 뛰었다. 지금 돌아보면 모양이 우스울지도 모른다. 8살 꼬마들과 30대 아저씨가 매일 축구를 하다니.

  그렇게 회상하다 보니 옛날 우리 집 현관문이 보였다. 너무나 익숙하고 영락없는 우리 집이었는데 이제 아니다. 문을 열면 어린 시절의 나와 부모님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 현관문 뒤에는 어머니 아버지의 가장 행복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 참 모두가 행복했었다. 그때는 아버지가 항상 웃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 웃음은 사라졌다. 나는 한때 부모님을 증오했다. 연을 끊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부모님과 함께했던 순간을 되돌아보면 참 행복했던 순간이 많았고 부모님은 날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하드디스크가 떠오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건 아마 이 이유에서 일 것이다. 전에는 사진이 사라진 것에 관심도 없었다. 가족과의 관계는 필요 없었고 그랬기에 추억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보면 서글퍼진다. 아버지는 퇴직하고 말년에 내 어릴 적 사진을 보며 회상하고자 했던 소망이 있었다. 그런데 10분의 9 가까이 되는 사진이 날아간 것이다. 과거의 시간들은 기록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있었던 시간들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게 아버지한테 미안하였다.

    사춘기는 나의 큰 전환점이었다. 순수하고 소심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사춘기 이후로 많이 바뀌었다. 그리고 언젠가 결혼을 하여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면 아버지의 심정을 조금은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이러했던 내 성장과 심정을 담아 보고 싶었다. "  



  아들의 글을 읽고 나서 나는 먹먹한 감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작년 12월에 예전에 살던 아파트에 가 본 적이 있었다. 차에는 남편과 나, 그리고 아들이 타고 있었다. 우리는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골목에 차를 세우고 아파트로 들어갔다. 우리가 살던 집은 101동, 1층이었다. 아파트 후문을 통해서 들어가면 바로 우리가 살던 집 거실이 들여다 보였다. 우리는 아파트 동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먼저 자전거를 보관하는 자전거 거치대가 보였다. 우리는 그곳에 어린이 자전거를 보관하곤 했었다. 그곳을 지나 계단을 7개쯤 올라가니 101동 입구가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가 살던 101호의 현관문이 보였다. 현관문은 예전과 다름없이 밝은 베이지색이었고 엘리베이터 바로 왼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서서 101호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무수하게 열고 들어가던 그 문이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그 문 앞에서 멍한 기분이 되었다. 마치 벨을 누르면  30대의 나와 아이들이 그 안에서 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고 그런 생각은 너무 생생해서 마치 현실의 내가 가짜인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시절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환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7살, 4살짜리 아이들과 남편과 나는 늘 웃을 일이 많았고 집에는 장난기 섞인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1층이지만 앞이 트여 있는 덕분에 거실은 환하고 따뜻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박스를 이어 붙여서 장난감 집을 만들어서 놀고는 했었다.

     그 순간의 기억들이 순식간에 눈앞으로 펼쳐졌고 나는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감정에 휩싸여서 그대로 서 있었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남편의 눈이 젖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둘 다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고 그 지나가 버린 시절에 대한 회한과 아쉬움 때문에 차 오르는 눈물을 겨우 삼켜 버리고 있었다. 그때 사실 아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으며 아파트 주위를 어슬렁 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남편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너무 좋았던 시절, 너무 행복했던 시절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 왜 이렇게 아픈지 모르겠다고.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말자고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 아들의 글을 읽고 나는 그날 아들이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들도 그날 101호가 보이는 아파트 동 입구에 서서 비슷한 감정을 느끼며 과거로의 여행을 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 수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었다.


  삶이란 예측이 어렵다. 가끔은 짓궂은 장난 같기도 하고 가끔은 잔인한 괴롭힘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와 아주 오랜 시간을 돌아 돌아서 겨우 문 앞에 서게 되었다. 다시는 올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고 다시는 아들과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절망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흐르고 거짓말처럼 우리는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가슴에 이는 파도에는 같은 이야기들이 실려 있었다.


     이제 다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동안 우리를 집어삼킬 듯이 몰아치던 무시무시한 파도에서 겨우 헤엄쳐 나온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감정을 만나고 가족의 존재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런 깊은 우울을 오랫동안 지치지 않고 헤엄쳐 올 수 있게 해 주었던 내 주변의 모든 것들에 감사하.


   다시 101동 101호 문 앞에 을 때 나는 더 이상 감당하기 힘든 슬픔 때문에 휘청거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제는 조금 담담하게 그 시절을 회상하고 미소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픔은 오래지 않았고 상처는 언젠가는 아무는 것이고 시간은 그 모든 것을 다 가능하게 하는 마술 같은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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